공동체의 고유성·정체성 논의는 미래지향- 지역 통합에 따른 발전전략도 21세기에 새롭게 모색해야분화에서 통합으로-‘평택(平澤)’이라는 지역공동체국가는 소국→연맹왕국→고대국가를 거치면서 발전하였다. 현재의 군(郡) 규모인 소국에도 통치 권력이 존재했고, 수취체제가 있었기에 특정 마을이나 지역의 명칭은 있었을
좌익·우익은 적산농지 불하·농지개혁(유산몰수·유상분배)로 타협- 지주·소작제도의 변화와 자영농 육성이 시작돼‘경자유전’은 토지제도의 기본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업(農業)은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직업이 되었다. 계급이 나타나고 사적소유(私的所有)가 보편화되면서부터는 토지(土地)가 가장
해방 이후 평택의 좌우익 대립-신탁통치·노동조합파업·단일정부수립·농민폭동 등에 갈등과 투쟁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은각종 사회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1946년 9월 하순경 좌익진영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총파업 지령을 내리자농민폭동은 전국적으로걷잡을 수 없게 파급되었다평택도 예외는 아니었다당시 가재리에서시작한 농민폭동은칠원리,
중앙의 좌익과 우익 세력 갈등과 조직들이 평택지역에도 재연징용자·군수물자·친일파·일본인 재산(赤産)문제 등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송진우를 중심으로 조직된한국민주당이 중심이었다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국내의 민족역량을 중심으로국외의 제반 단체를 망라한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한국민주당은 중국
최석화 안재홍 황경수 정존수 유치송 이윤용 최영희 서상린 거치고80년대 이자헌 권달수 김영광 원유철 허남훈 정장선 등 등장당대나 사후 어떤 평가들을 받는지…? 민주정치는주권재민(主權在民)을 바탕으로 한다선거를 통하여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시민들이 도시의 주인임을 표현하는 행위이다하지만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했을 경우그 피해는
원칠원 마을·서탄면 사리·현덕면 신왕리 등성공사례 많지만 공과에 대한 현재 평가는 연구 필요농촌새마을운동은 관(官) 주도의‘농촌근대화’운동이었다정부가 주도하여 농민의 자발성을이끌어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이정부의 ‘시책’과 ‘지시’에 따라추진되었기에 이 사업이&ls
‘잘살아보세’하며 농촌농업을 ‘근대화(?)’시켰지만…정신없이 자본주의·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린 40년 산업화 과정매일 아침마다 동네 스피커를 통해‘잘 살아보세’에 이어 ‘새마을 노래’가방송되고 나면 컬컬한 목소리의 이장과새마을지도자의 육성이 흘러나왔
한국 전쟁이 평택지역에 미친결정적 영향은 미군기지의 건설이었다.전쟁 도중에 평택지역에미군 기지가 들어섰고, 이후 평택은미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대규모 미군기지가 2개나 들어섰으니,평택은 동두천, 의정부와 더불어대표적인 기지촌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한국 전쟁과 평택 평택만큼 한국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을
전쟁난민정착사업으로 이주하여 개간·간척하며 정착-자료정리나 연구 필요 팽성읍은 남산3,4리와 신대2,3,4리,함정2리, 석봉리, 대사2리, 안정6리 등에난민정착사업소가 건설되었고,서평택지역은 포승읍 원정6리, 홍원1리,청북면 지역은 고잔6리, 삼계3리 일대,고덕면은 문곡4리, 서탄면은 마두2리그리고 평택시내에서는합정동 돼박산과 비전2동 문화촌에
6·25전쟁으로 인한 평택의 참상은유엔군 비행기의 폭격만 있은 아니었다압록강까지 진출하였던 한국군과유엔군이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를거듭하는 과정에서도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1951년 1·4후퇴 때에는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들이합정동 조개터 마을 일대에 불을 질렀다 일종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평택시 용이동 산1-7번지에 세워진남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용어로 ‘6·25사변’,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 등등 다양하게 불린다. 처음에는 ‘6·25사변’이 일반적으로 불렸지
해방 초기 좌익들이 대중적 지지를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해방세력으로의정통성과 친일잔재 청산, 토지개혁과 같은혁명적 개혁안 때문이었다.좌익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아래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조선농민조합총연맹(전농),조선청년총동맹(청총), 조선부녀총동맹 등부문별 조직을 결성하고 신속하게지지기반을 구축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평택지부(인민위원회)가결성된
“짐은, 현재의 세계 대세와 일본의 현상을 깊게 생각하여 비상한 수단을 가지고 이 시국을 수습하려고 생각하면서 충성스러운 모든 일본 국민에게 고한다. 짐은, 우리 정부를 통해서 미국·영국·중국·소비에트 연방의 4개국 공동선언에 대해 일본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 취지를 각국에 통지하게 하였다…&rd
가장 주요한 과제는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 제도의 마련과토지개혁,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져야 했다.그러나 1945년 12월 16-26일 사이에 열린이른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과 상황은이러한 논의를 비켜가고 말았다. 1946년 5월 중순경 좌익세력이 연합하여평택군민위원회의 이름으로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대한지지를 위한
1938년 이후 일제가 실시한 강제동원은지원병제와 징용이었다.당시만 해도 행정체계 미흡으로징병제 실시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징병(徵兵)을 실시할 경우조선인들의 권리요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 해군특별지원병,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형식상 자원하는 형태로 병력과인력을 모집하였다. 1942년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일본해군시설대 보급기지와 비행장이건
조선총독부에서는 1937년 8월‘조선인 지원병제도 실시 요항’을 만들고,학무국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이른바 ‘국민교육에 대한 방책’을 마련했다.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제도를실시하기 위해서는이른바 ‘황민화교육’이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일제강점기 중 1930년대 이후를 흔히 전시체제
이태종, 임시재, 주익상, 강대철, 유석기, 유창렬, 한상룡, 한상학 등…”영원히 해방 안 올 줄 알았다” 부일협력이나 친일은흔히 매국이라고 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그 어느 때보다도 치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부일협력은 개항 이후 세력화하기 시작하여한말,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어릴 적
평택에서도관북지역 수재를 돕기 위한구제회가 조직되었다.진위청년회와 동아일보 평택지국에서는구제방침을 논의한 결과관북수재동포구제회(關北水災同胞救濟會)를조직하기로 하고 의연금이 모아지면전달하기로 하였다.1927년 3월 평택향교는효녀와 절부를 선정하여독행자(篤行者) 표창식을 가진 바 있었다.이때 진위군 부용면 평궁리황희회(黃羲會, 47세)는 효자로,현덕면 권관리
조선총독부가 전매제를 실시해허가받은 사람들이면 아편 원료인양귀비를 재배할 수 있었으며,‘의료용’아편을 만들 수 있었다.때문에 이들로부터 흘러나온 아편은중독자들을 양산했다.세상 살다보면 다양한 ‘사건 사고’의 소식을 듣는다. 그 사건 사고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도 있다. 요
1927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분리된 조선농민총동맹이라는전국단위의 합법적 농민조직을 결성하였다.이들 농민조직들은 소작료문제,소작권 이동, 동척이민철폐와 같은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함께야학운동, 독서회, 소인극 개최와같은 사업으로 백성 속을 파고들었다. 1932년 12월 일제는수진농민조합을 와해시킬 목적으로핵심간부 8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연행하고 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