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평택을 걷다를 마치며

공동체의 고유성·정체성 논의는 미래지향

- 지역 통합에 따른 발전전략도 21세기에 새롭게 모색해야

 

분화에서 통합으로-‘평택(平澤)’이라는 지역공동체

국가는 소국→연맹왕국→고대국가를 거치면서 발전하였다. 현재의 군(郡) 규모인 소국에도 통치 권력이 존재했고, 수취체제가 있었기에 특정 마을이나 지역의 명칭은 있었을 것이다. 국가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구획을 나눠야 했던 시기는 고대국가 단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상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연맹왕국 단계까지는 소국의 명칭만 등장하며 행정구역 명칭은 없다.

평택지역에 대한 기록도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지역 명칭이 나타난다. 삼국이 정립돼 갈 무렵 평택지역은 백제 땅이었다. 처음으로 진위 지역에 연달부곡(淵達部曲)이나 송촌활달(松村活達) 같은 지명이 붙여졌는데, 그 명칭이 ‘부곡’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 중요한 행정구역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팽성지역인 하팔현(河八懸) 역시 삼국시대에 등장한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으나 설치된 구체적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안성천 이북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진위면 일대에는 부산현이, 안중면 용성리 일대에는 상홀현이 설치되었다. 고구려의 지배력이 안성천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팔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삼국이 통일되고 신문왕 때 9주, 120개의 군(郡), 305개 현(縣)을 두었는데 기존의 군현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다가 757년(경덕왕 16년)에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부산현을 진위현으로, 상홀현을 거성현으로 고쳐 수성군(수원)의 관할하에 두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현종대에 지방행정구역의 체계가 완비되었다. 고려시대 평택지역에는 진위현, 평택현, 용성현, 영신현, 광덕현, 경양현 등이 있었다. 983년(성종 12년) 12목을 설치하면서 진위현을 중심으로 한 안성천 북쪽은 광주목의 관할 아래에, 평택현을 비롯한 안성천 남쪽은 청주목의 통제하에 두었다. 995년(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도, 128주, 449현으로 편제하면서 안성천 북쪽은 수주(수원), 안성천 남쪽은 천안부의 지배하에 놓였다. 1018년(현종 9년)에 다시 지방행정제도가 정비됐으나 평택지역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일반 행정구역 외에 향·부곡·소가 존재하였다. 이충동 주변에는 송장부곡, 서탄면에는 천장부곡, 합정동 부근에 백랑부곡, 포승읍에는 포내미부곡, 육내미부곡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계속적으로 군현제가 개편되어 1432년(세종 14년)까지 전국이 330여 군현으로 정리되었다. 충청도에 속했던 진위현은 1398년(태조 7년)에 경기도로 옮기고 영신현, 송장부곡, 천장부곡 등을 아우르게 되었다. 백랑부곡을 아우른 평택현은 충청도와 경기도를 오갔다. 임진왜란 중에 전란의 피해가 심한 평택현은 1596년(선조 26년)에 폐현 당하여 직산현에 합쳤다가 1610년(광해군 3년)에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면리제가 실시되어 중앙의 행정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진위현은 15개 면, 평택현에는 6개 면을 설치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면서 진위현은 진위군으로, 평택현은 평택군이 되어 충청도 공주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1896년 13도제로 바뀌면서 진위군은 경기도에, 평택군은 충청도에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기존의 진위군, 평택군에 수원군의 일부가 통합되어 ‘진위군’이 되었다. 이로써 통합 진위군이 설치되면서 오늘날 ‘평택’이라는 지역 행정체제로 공동체의 공간·지리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공동체성과 개별성-1914년 이후의 통합, 분화, 재통합

1914년 진위군에로의 통합은 군(郡) 통합과 면(面) 통합으로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먼저 군(郡) 통합을 살펴보자. 기존의 부(府)와 군(郡)의 관할구역은 넓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곳은 500방리(方里, 1방리는 15.423㎢)가 넘었지만 작은 곳은 3방리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인구도 편차가 커서 많은 곳은 2만8000여 호, 적은 곳은 1300여 호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군폐합의 기준을 면적은 40방리, 가구 수는 1만 호로 정했다. 기준에 미달될 경우 인접 군(郡)에 폐합하고 이상인 경우에는 존치시켜 전국적으로 97개 군이 폐합됐다. 충청도 평택군이 경기도 진위군에 합치게 된 것도 이 때다.

평택군이 진위군에 통합된 것은 1914년 3월 1일이지만 통합하기로 한 것은 1913년에 결정되었다. 이에 기존의 진위군을 포함하여 당시 수원군에 속했던 종덕면·율북면·수북면·토진면·서신리면·청룡면·숙성면·오정면·언북면·포내면·현암면·안외면·승량면·가사면·광덕면과 충청남도의 평택군 일원을 진위군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오늘날 ‘평택’이라는 공간적 틀이 비로소 마련됐다.

진위군 통합이 이뤄짐에 따라 관내의 면(面) 폐합이 이어졌다. 먼저 진위군에 통합된 평택군에서 면(面)폐합이 실시됐다. 1914년 3월 4일의 <평택군 면(面)폐합에 관한 건>에 의하면 3개면이 2개면으로 폐합됐다. 폐군된 평택군은 읍내면·동면·서면 3개 면이었지만 통합과정에서 부용면과 서면으로 폐합됐다. 즉 읍내면의 경우 구창리·신환포·신덕리·창월리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와 동면의 노와리·평궁리·추팔리를 통합해 부용산의 지명을 따서 부용면(12개 리)으로, 서면의 전부와 동면의 남산리·대사동·석근리를 합하여 서면(13개 리)이 되었다. 면(面)폐합으로 진위군은 통합 이전 15개 면에서 5개 면(面)으로 대폭 축소됐다.

1913년 11월 24일 수원군에서 면(面)폐합을 신청했다. 신청안은 1914년 3월 26일 인가되어 청북면·현덕면·포승면·오성면이 진위군으로 편입됐다. 1914년 부·군 폐합 후 진위군은 모두 11개 면으로 구성되고 ‘경기도령 제3호’에 의거 1914년 4월 1일자로 시행됐다. 통합된 진위군은 1938년 9월 24일 다시 평택군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평택군으로 변경된 것은 평택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이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진위군의 주도층이 되었기 때문이며, 평택지역의 정치·행정·경제적 기능이 평택역 주변에 집중되었기에 가능했다.

1938년 진위군에서 평택군이 되어 해방을 맞이한 평택은 한국전쟁 뒤 미군기지촌의 발달과 농업인구의 증대, 도시지역의 발달과 공업화에 힘입어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1986년에는 평택읍이 평택시로 각각 승격 분리되었다.

이로써 또 다시 세 지역으로 분리되었던 평택지역은 1995년 행정구역 통합정책에 따라 평택군, 송탄시, 평택시가 통합돼 오늘의 평택시가 되었다.

 

통합의 의미와 지역성(地域性)

‘지역(地域)’은 역사적 경험과 문화(文化)를 함께 공유하며 살아온 공동체다. 같은 지역에 산다는 것은 언어습관, 음식, 생산활동, 놀이, 음악, 공동체적 경험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평택지역은 역사 단계마다 행정구역이 매우 복잡했다. 행정구역이 복잡했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과 공유했던 문화가 서로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는 통합 이후 정체성(正體性) 형성에 큰 장애가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역성(地域性)’이 형성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지역성은 역사적 경험과정에서 형성된 그 지역만의 독특한 전통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지역에 따라 형성된 다른 정서와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지역성만이 강조되고 공동체성이 결여된다면 정체성 형성과 통합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평택지역에도 지역마다 뚜렷한 지역성이 존재한다. 평택시의 지역성은 과거 역사에서 출발한 것도 있고 근·현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지역성은 지방자치시대에 지역 간의 갈등과 알력, 정치적 이해관계로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택지역에서는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많지 않았다. 각 지역마다 지역적 특성을 존중하면서도 ‘평택’이라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많지 않았다. 평택시가 갖고 있는 향후 1중심 3부심 플랜이나, 북부, 남부, 서부라는 현재 행정 개념도 각 지역의 역사와 정서를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후 평택시가 70만,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여 외부 유입인구가 급증했을 경우 기존 시민들과는 다른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가진 이질적인 사람들을 평택이라는 공동체에 녹아들게 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다. 시민들이 ‘평택’이라는 이름에서 얻을 수 있는 자긍심, 평택시민이라는 긍지를 갖는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2013년 4월 ‘평택의 근·현대를 걷다’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하였다. 본래 기획 의도는 지역통합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시간을 다시 보며 객관적으로 성찰해보자는 것이었다. 과거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현재의 평택을 진단하고 미래의 평택을 전망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하였다. 지난 50번의 연재로 애초의 목적을 모두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평택지역의 근현대사를 이전보다는 객관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연재하는 동안 관심을 가져주신 독자들, 애정 어린 조언으로 목적과 방향성을 잃지 않게 해주신 지역 선후배님들, 그리고 평택시민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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