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잔재 청산과 토지개혁 명분으로 좌익활동세력 결집하여 우익과 대결

해방정국에서 우(右)와 좌(左)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해방 후 민족의 가장 큰 과제는 식민잔재 청산과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일제에 빌붙어 잘 먹고 잘 살았던 친일파들은 처단되고, 핍박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일운동에 헌신했던 인사들이 민족국가를 건설할 것으로 믿었다. 국내외에서 식민잔재 청산과 해방 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방 직전 ‘민족(民族) 대 반민족(反民族)’의 구도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결성한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에게 있었다. 1945년 9월 6일 건준은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하는 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선포하였다. 인공은 해방 후 국외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세력과 이승만을 환영하였고 김구와 김규식, 이승만도 중도와 좌익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군정’ 소식이 전해지면서 안재홍을 비롯한 중도우파세력이 인공에서 탈퇴하고, 미군정도 포고령 1호를 통하여 ‘현상유지정책’과 ‘미군정 외에 다른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하자 임시정부, 인공 등 자주적 국가건설을 시도하던 세력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1945년 말 신탁통치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민족 대 반민족’ 양상으로 흐르던 해방정국이, ‘우익은 애국(愛國), 좌익은 매국(賣國)’의 분위기로 바뀌면서 좌익들은 정국 주도세력으로의 지위를 잃게되자 향후 극단적인 좌우대립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친일잔재청산과 토지개혁을 내세워 지지 획득

해방 초기 좌익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해방세력으로의

정통성과 친일잔재 청산, 토지개혁과 같은

혁명적 개혁안 때문이었다.

좌익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아래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선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청년총동맹(청총), 조선부녀총동맹 등

부문별 조직을 결성하고 신속하게

지지기반을 구축하였다.

해방 초기 좌익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해방세력으로의 정통성과 친일잔재 청산, 토지개혁과 같은 혁명적 개혁안 때문이었다. 좌익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아래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선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청년총동맹(청총), 조선부녀총동맹 등 부문별 조직을 결성하고 신속하게 지지기반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좌익은 좌익이 주도하는 민주적 임시정부 수립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신탁통치에 대한 총체적 지지를 선언하게되자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였고 정국(政局)의 주도권을 우익에게 넘겨주었다.

1946년 초 임시정부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미군정과 연대하는 한편 적극적인 반탁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좌익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 전평, 전농, 청총 그리고 김원봉, 장건상 등을 묶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여 우익에 대응하였다. 이로써 해방 직후 상호공존의 형태로 전개되던 정치상황은 좌우익으로 나눠져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좌우대립의 정치구도 속에서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좌익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실정(失政)을 비판하며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고,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월 사건을 계기로 남한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세력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미군정도 이에 호응하여 김규식을 중심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고, 1947년 2월에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를 발족하였지만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강화되면서 상황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제3의 길로 가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단정)으로 흘러가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과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와 같은 중도세력은 단정반대를 주장했으며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선 및 단정지지를 선언했다. 남로당은 1948년 2·7구국투쟁을 통하여 남한만의 단선, 단정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김구, 김규식 등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분단정권 수립을 막기에는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평택에서 좌익폭동 발생

건국준비위원회 평택지부(인민위원회)가 결성된 뒤 평택지역에도 전농, 전평, 청총 등 좌익단체가 결성되었다. 1946년에 좌익계 통합조직인 민전(民戰)이 결성되었고 그 해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창당될 때에는 심인O 등에 의해 남로당평택지부도 조직되었다. 좌익들은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신탁통치문제로 좌우익이 대립하고 미군정과 우익들의 탄압이 거세지자 이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평택지역 좌익들의 움직임을 시기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46년 5월에는 민전 경기지구대회가 수원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1천 여 명이 모였는데 이 가운데 평택지역 민전 조직원들도 포함되었다. 좌익들은 1946년 8·15해방 기념일을 기해 대대적인 폭동을 계획하였다. 그러자 미군정과 경찰은 좌익단체를 수색하고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힘썼다. 1946년 8월 20일 제1관구경찰청장 장택상은 평택지역 경찰의 폭동과 테러 소식을 접하고 좌익이 민전평택사무소를 급습하여 권총과 실탄 여러 발을 압수하였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8·15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힘썼지만 평택시내에서도 행사는 개최되었다. 오성면 오봉산에서는 1천 여 좌익농민들이 집결하였다.

1946년 9월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총파업지침에 따라 송탄동 가재리 마을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가재리 농민폭동은 좌익이던 평택경찰서 사찰주임 최문진이 지원하고 하가재 마을에 살던 김현O이 주도하였다. 김현O은 서울농전(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중퇴한 인텔리로 동생과 함께 가재리와 송탄동 막곡, 칠원리 등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교통 요지였던 칠원동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렸다. 농민폭동은 고덕면과 팽성읍 망해산, 합정동 돼박산에서도 발생하였다. 망해산폭동은 좌익세력이 강했던 팽성읍 서부지역에서 우익마을에 속하던 본정1리가 좌익들에게 핍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익세력이 본정리를 급습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정부수립 전후하여 좌익세력 약화

건국준비위원회 평택지부(인민위원회)가

결성된 뒤 평택지역에도 전농, 전평, 청총 등

좌익단체가 결성되었다.

1946년에 좌익계 통합조직인 민전(民戰)이

결성되었고 그 해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창당될 때에는 심인O 등에 의해

남로당평택지부도 조직되었다.

좌익들은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신탁통치문제로 좌우익이 대립하고

미군정과 우익들의 탄압이 거세지자

이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

▲ 김현O의 고향이며 가재리농민폭동이 일어났던 송탄동 가재리마을(2008)

좌익폭동은 1947년으로 넘어가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1947년 3월에 진위면 무봉산에서 농민폭동이 발생하였다. 무봉산농민폭동은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던 좌익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산에서 진위면 방향으로 밀고 내려오다가 가곡리, 봉남리, 동천리, 용인시의 봉명리 일대 좌익농민들이 무봉산에 올라가 단독정부수립 반대 궐기대회 및 횃불시위를 한 사건이다.

▲ 1947년 무봉산농민폭동의 현장. 진위면 동천1리와 무봉산(2014)

같은 해 8월 15일을 기해 남로당을 중심으로 또 다시 폭동을 일으키려는 조짐이 보이자 미군정과 경찰이 대대적인 좌익세력 검거에 나섰다. 이에 평택지역에서도 평택경찰서 경찰관과 남로당평택지부가 결탁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폭동을 일으키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로당 평택위원장 심인O을 비롯한 13명이 검거되었지만 남아 있던 조직원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탄면 수월암리에서 미군정의 공출독려를 위해 마을에 들어온 경찰관들에게 대항하여 1천여 명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47년 11월에는 고덕면 해창리에서 황명O 등이 8·15행사를 금지시킨 것에 불만을 품고 좌익농민들을 선동하여 봉화를 올리고 경찰서에 방화하려다가 적발된 일도 있었다.

▲ 1946년 8.15집회가 열렸던 오성면 오봉산(2010)

평택지역에서 좌익활동이 활발하자 미군정은 1946년 치안군심판소를 경성지방법원 평택출장소에 병설하였다. 또 민족청년단 평택군단부, 대동청년단 평택군단부 등 우익청년조직을 결성하여 경찰과 함께 좌익세력을 탄압하였다.

좌익들의 활동은 1948년 전후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면서 크게 둔화되었다. 1948년 1월에는 남로당평택읍위원장 유달O, 평택군민조직의장 김석O 등 핵심좌익간부 12명이 집단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1947년 8·15폭동사건을 빌미로 남로당평택위원장 이주O, 심인O, 이계O, 이성O 등이 포고령 2호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이로써 좌익세력의 활동은 크게 약화되었고, 전향한 인사들 상당수는 정부수립 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직후 안정리비행장 등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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