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평택의 좌우익 대립

-신탁통치·노동조합파업·단일정부수립·농민폭동 등에 갈등과 투쟁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은

각종 사회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6년 9월 하순경 좌익진영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총파업 지령을 내리자

농민폭동은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게 파급되었다

평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가재리에서

시작한 농민폭동은

칠원리, 도일리로 파급되었다

 

▲ 가재리농민폭동이 일어난 송탄동 일대(2008)

우익이 평택 우시장의 찬탁지지 대회 저지

해방 후 가장 큰 혼란의 원인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사실 동아일보의 오보로 시작된 신탁통치 문제는 좌우익의 찬탁과 반탁으로 대립을 야기하며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평택도 그 유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반탁과 찬탁의 사회적 혼란 속에 1946년 5월 중순경 좌익세력은 현 평택초등학교 자리인 우시장에서 신탁지지 군민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반탁운동의 기세를 꺾으려고 하였던 좌익세력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과시하려고 대대적인 군중을 동원했던 것이다. 주민들에게 고무신과 광목을 나눠주고 반강제로 동원하였다. 참여한 주민들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찬탁지지’라는 깃발을 들었으며 구호를 외쳤다.

찬탁지지 궐기대회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접한 우익세력들은 이 대회를 분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미군정의 평택 책임자인 파악스는 국제사회주의자였으며, 또한 평택경찰서 사법주임 최문진 역시 좌익세력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대회를 막는 데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우익 청년별동대가 주민을 위장하여 대회 개최지에 잠입한 후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좌익세력의 찬탁지지 궐기대회가 절정에 달하자 우익 청년별동대는 돌팔매질로 장내의 혼란을 유도한 뒤 몽둥이로 맹타를 휘둘렀다. 이로 인해 찬탁지지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은 각종 사회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6년 9월 하순경 좌익진영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총파업 지령을 내리자 농민폭동은 전국적으로 걷잡을 수 없게 파급되었다. 평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가재리에서 시작한 농민폭동은 칠원리, 도일리로 파급되었다. 농민폭동의 주모자는 김현욱이었다. 김현욱은 먼저 이장과 마을의 온건한 유지들을 상대로 성토하고 난동을 부렸다. 이러한 정보를 들은 우익진영의 청년단체는 약 50여 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사건 현장에 잠입하려고 했다. 우익 청년들은 폭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투석과 고춧가루 세례에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결국에는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 농민폭동은 가재리 외에 고덕면에서도 일어났고, 얼마 후에는 계양리 꽃동산에서도 일어났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팽성면 서부 일대의 농민들을 계양리 꽃동산으로 집합시켜 반정부 선동과 사회불안을 일으킬 목적으로 횃불시위와 더불어 우익진영 인사들에 대한 성토를 전개했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우익진영의 청년단체는 바로 출동하여 이들과 충돌하였으나 곧 진압하였다. 평택 되박산 근처에서도 좌익세력이 주도한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주도인물은 한국전쟁 시 군인민위원장과 인민학교장을 지낸 사람으로 주위 농민들을 되박산으로 모이게 한 후 우익타도를 외치며 시내로 들어가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우익진영의 청년단체 100여 명의 단원이 출동하여 도로를 차단하고 농민폭동을 진압했다.

수원극장 좌익민전대회에서도 좌우 대립

1946년 5월 중순경 좌익의 경기지구 민전대회가 수원극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에 우익진영 청년단체들은 이 대회를 분쇄하기로 결정했다. 각군 청년단체에 출동을 요청하였는데 평택에서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이 각 읍·면에 연락을 취하여 50여 명의 별동대원을 출동시켰다.

평택을 포함한 각지에서 수원극장에 도착한 우익진영 청년단체 단원들은 일부 좌익을 위장하여 극장 내부에 잠입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극장 밖의 주변을 포위하여 좌익진영의 거물인 이강국을 납치하려고 하였다. 좌익진영의 청년들과 경찰관들의 삼엄한 경비로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민전대회는 개최되었다. 대회가 시작돼 이강국이 연설하고 있을 때, 우익진영 청년 약 300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단상을 점령하기 위해 대회장으로 돌진하였다. 민전대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고 위협을 느낀 이강국은 도피하였다.

단정반대 좌익 진위면 무봉산 봉화 시위

1948년에 남한만의 단일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됨에 따라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압박을 받은 좌익진영은 군중들을 선동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폭동사건을 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1947년 3월 중순경 진위면 봉남리 동북방 표고 200m 무봉산에서 좌익진영의 주요 인물들이 주변 농민들과 인근 용인지방 주민 수백 명을 모아놓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봉화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양재현을 중심으로 한 우익 청년단체는 각 읍·면의 별동대를 동원하여 평택경찰서와 합동해서 무봉산 농민폭동을 진압했다.

또한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을 앞두고 평택에서 경기지구 민전간부회의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입수한 우익진영의 청년단체 별동대는 회의장을 급습하기로 계획하였다. 평택 옛 시가지 2층 건물에서 경기지구 민전간부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약 50여 명의 우익별동대가 회의장을 급습하여 좌익진영의 경비대와 충돌하였다. 좌·우익 쌍방 간의 고함과 몽둥이가 난무하다가 협공을 받아 참패한 좌익진영 세력들은 가마니로 만든 들 것에 부상자를 싣고 적기가를 외쳐대며 시가를 누볐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의 중립노선으로 인하여 우익진영의 청년단체 별동대원들은 회의진행 방해라는 죄목으로 검거되기도 하였다.

▲ 서탄면 수월암리 농민폭동의 중심마을이던 수월암2리

서탄면 수월암리 농민폭동 진압

1944년 7월 10일, 서탄면 수월암리에서 농민폭동사건이 일어났다. 군청직원과 서탄면 직원인 한현수, 이종진 외 4명은 하곡 공출 독려 차 마을에 나왔다가 이장 최창희 집에 용무를 마치고 나오던 중이었다. 당시 서탄면 수월암리에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적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이때 이들이 농악을 울리면서 들일을 하고 마을로 돌아오다가 이장집에서 나오는 공무원들과 마주쳤다. 이 시기에 반정부 성향이 극에 달했던 농민들은 농기를 앞세운 채 공무원들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공무원들을 잡아치우자며 달려들어 구타를 하는 동시에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평택경찰서는 이와 같은 소식에 접하자 경찰관을 출동시켜 농민들의 난동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서탄면 수월암리의 주민들이 오산면 두곡의 주민들까지 선동하여 삽, 낫, 몽둥이를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그런데 농민들은 1천여 명에 달하였지만 경찰관은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진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윤부섭, 최일용 경관이 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평택경찰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수원경찰서와 합세하여 진압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서탄면과 진위면 우익진영 청년대와 각 면에서 출동한 대원들이 합세함으로써 서탄면 수월암리의 농민폭동은 수월하게 진압되었다.

▲ 진위면 무봉산 폭동에 참가하였던 가곡12리와 농민들이 올라갔던 무봉산 줄기

평택 우익청년들, 성환 경찰지서장에 체포되기도

1946년 9월 좌익진영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산하의 각 산업체에 파업선동의 지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용산역과 영등포역 등지에서 철도노조 파업이 일어나 국가의 운송망이 뒤흔들리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 하에서 경찰력만으로 노조의 파업과 폭동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우익진영의 청년단체와 학생들이 총 단결하여 철도노조의 파업과 폭동을 진압하였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진압되면서 경부선이 다시 개통되었고 시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좌익세력의 활동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한 우익진영 중앙청년단체 지휘본부는 각 지역에 연락하여 역 구간을 호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마침 평택에서는 씨름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대회를 중단하고 모두가 이 기관차 호송행사에 참여하였다.

평택지역 100여 명의 청년단체 단원들이 기관차에 올라 성환역에 진입하여 성환지역 광복청년회 회원들에게 인계하고 평택으로 귀환하려고 할 즈음 성환 경찰지서장과 시비가 일어났다. 성환지서장은 불법시위라며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평택으로 돌아온 청년들은 평택까지 추적해 온 성환경찰서 지서장에 의하여 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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