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제2국민’에 속아 끌려간 사람이나 남은 사람 모두가 피해자

1938년 이후 일제가 실시한 강제동원은

지원병제와 징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행정체계 미흡으로

징병제 실시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징병(徵兵)을 실시할 경우

조선인들의 권리요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 해군특별지원병,

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

형식상 자원하는 형태로 병력과

인력을 모집하였다.

 

조선청년들을 제국주의 전쟁에 내몰다

▲ 강제징병을 미화한 일제말의 엽서(한시준 김삼웅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발췌)

2013년 말 주일대사관에서 일제 말 강제동원 관련 명부 60여 권이 발견되었다. 강제동원 명부에는 정부가 이제까지 보상의 근거로 제시했던 자료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새로운 이름이 발견되어 그동안 입증자료 미비로 보상을 받을 수 없었던 강제동원자 및 유가족들이 새롭게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일제 말 전시체제기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약 300만 내외로 추산된다. 중복지원까지 계산하면 약 700만 명으로 늘어나고, 이 가운데 국외 동원자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다. 강제동원은 징용과 군무원, 근로정신대 등 노동력 수탈과 지원병, 징병, 학도병 등 군대에 동원된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다. 당시 평택지역에서 몇 명이 동원되었는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단편적이나마 일제 말 신문자료에 보도되는 경우도 있고, 90세 전후의 노인들 가운데 징병이나 징용을 다녀온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상당수가 강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강제동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강제동원이란 일제 말(1938~1945)에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하여 식민지 조선인을 전쟁터나 군수공장 등에 동원한 것. 일제가 조선인 강제동원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사변(1931)부터였다. 일본정부는 전쟁이 발생하면 많은 수의 전쟁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정신무장(?)이 되지 않은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했을 경우 일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줄 것인가가 염려되었다. 일본 군부(軍部)도 ‘조선청년을 전쟁터에 동원하면 총구를 일본군에게 돌리지 않겠는가?’라고 반발하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미뤄지던 조선인 강제동원은 중일전쟁(1937) 이후 본격화 되었다. 병력문제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조선인 뿐 아니라 대만, 동남아 여러 나라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청년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황국신민화 교육’이 강화되고,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이은호 등 저명한 인사들을 동원하여 시와 글, 그림으로 전쟁과 전쟁동원을 미화한 것도 이 때쯤이다.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강제성 강화돼

강제동원은 통상 18세에서 30세 미만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규정이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강제동원을 피하기 위해 형님이 도망갔을 경우 동생을 잡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식이 도망가자 부모를 잡아가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가 실시한 강제동원은 지원병제와 징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행정체계 미흡으로 징병제 실시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징병(徵兵)을 실시할 경우 조선인들의 권리요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일제는 육군특별지원병, 해군특별지원병, 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 형식상 자원하는 형태로 병력과 인력을 모집하였다.

국내외 노동력 동원이었던 징용(徵用)은 처음에 모집형태에서 시작하여, 관(官) 알선, 징용(徵用)의 형태로 발전했다. 모집 방식은 일제 말의 신문이나 일기류에 흔히 발견되는 ‘북선(北鮮)공사 인부모집’, ‘일본공장이나 남양군도 역부모집’과 같은 광고를 통해서였다.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문구를 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징발된 사람들도 강제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실제로 평택지역에서도 인부나 역부모집에 응해 일본이나 남양군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들은 돈 벌러 갔다 왔지 강제로 끌려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쟁이 확대되면서 광고모집 형태로는 필요한 인력확충이 어려워지자 점차 강제동원이 강화되었다. 일제는 1943년 경에는 월 1회 모집을 강제하였고, 전쟁 막바지부터는 월 2~3회로 늘리며 지원자가 부족하자 구장 등 면리원들을 동원하여 마을을 수색하고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청년들을 죄인처럼 잡아갔다. 강제동원이 강화되면서 징용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면 군(郡)이나 면(面)에서 공무원들이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밤중에 마을을 습격하거나 가족 중 한 명을 대신 잡아가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현덕면 장수리의 홍아무개(2007년 87세) 씨는 구장 보조원으로 일제 말 강제동원 업무를 담당했던 면리원이었다. 그는 구장보조가 되면 징병이나 징용을 피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면리원이 되었다. 일제 말에는 지원병이나 징병으로 남양군도나 중국으로 끌려가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만연했다. 설령 본토(일본)나 북해도에 징용으로 끌려가도 돈 벌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1942년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일본해군시설대 보급기지와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비행장과 보급기지 건설은

국내에서 징용으로 동원된 2만여 명과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평택지역에서 징발된 인력으로 실시되었다.

 

나도 ‘마쓰이 오장’처럼 되겠소!

▲ 미쯔비시 중공업 강제동원 규탄시위(통일뉴스, 2006)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 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 일부)

1940년 2월 8일자 동아일보에 339명의 평택군 지원병 지원자가 보도되었다. 지원병에 지원한 청년들은 평택읍이 67명으로 가장 많고, 송탄면 54명, 북면(진위면) 44명, 포승읍 34명, 고덕면 32명, 오성면 26명, 팽성읍 21명, 서탄면 20명 순이었고 이 가운데 합격한 사람은 38명이었다. 1941년에는 더욱 늘어나 680명이 지원하였고, 지역유지들은 성대한 환송식을 치러주며 국방헌금으로 화답하였고, 학생들은 위문품과 헌금으로 지원하였다. 춘원 이광수와 같은 인사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우리 민족이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워야만 발언권이 강화된다”는 식으로 대중을 현혹하였다.

서정주는 전쟁 막바지 자살특공대(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했다가 죽은 조선 청년을 기리는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시(詩)를 써서 청년들을 유혹하였다.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조국(일본)과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사나이의 기개’라며 나이 어린 학생들을 부추겼다. 어린 청소년들은 분위기에 쉽게 흔들렸다. 안중읍 안중5리 정아무개 씨는 당시 안중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지원병(소년병)에 지원하겠다고 나섰다가 3대독자를 전쟁터에 보낼 수 없다는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포기했다는 일화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1942년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일본해군시설대 보급기지와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비행장과 보급기지 건설은 국내에서 징용으로 동원된 2만여 명과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평택지역에서 징발된 인력으로 실시되었다. 근로보국단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인력 뿐 아니라 공사도구나 우마차, 말마차 등도 징발 당했다. 남자들이 징병이나 징용에 끌려간 빈자리는 여자들이 메웠다. 일제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부인단’을 조직하고 모내기나 벼베기 공동작업 뿐 아니라 곡물과 가마니 공출에도 동원하였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섞여 모내기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일제 강점기부터였다.

▲ 1941년 큐슈탄광지역에 징용되었던 월곡동 월구리 전용래(86세)씨

월곡동의 전아무개(88) 씨는 16세이던 1941년 징용으로 끌려갔다. 형님에게 징용통지서가 발부되자 부모님이 무학(無學)인 형님보다는 글자를 깨우친 동생이 말귀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며 대신 보냈다. 전 씨는 규슈 후쿠오카(福岡)현 제1다카마스 탄광에서 일했다. 당시 일제는 한 달에 2원 50전씩 월급을 약속했지만 단 한 번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일하다가 전쟁 막바지에 요코하마로 도망쳤고, 미군 B-29전투기 500여 대가 퍼부어대는 엄청난 폭격에서도 살아남아 해방 후 귀국하였다.

평택지역에서 징용으로 강제동원된 사람 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미쓰비시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한국원폭피해 기호지부 미쓰비시동지회(회장 이근묵)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1944년 9월 1,2차에 걸쳐 징용된 200여 명의 청년들이 주축이었다고 한다. 당시 평택군에는 면사무소마다 징용담당부서를 설치하고 수시로 청년들을 끌고 갔다. 끌려간 이들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근처의 미쓰비시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었다.

▲ 일제 말 종군위안부 사진(한시준 김삼웅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발췌)

이들 외에도 근로정신대(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도 있다.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웃동네 노총각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 여성들도 피해자라면 피해자다. 남편이 끌려간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어린 자식들과 생존의 사투를 벌였던 여성,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가슴을 쥐어뜯던 부모들도 모두 피해자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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