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우익은 적산농지 불하·농지개혁(유산몰수·유상분배)로 타협

- 지주·소작제도의 변화와 자영농 육성이 시작돼

‘경자유전’은 토지제도의 기본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업(農業)은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직업이 되었다. 계급이 나타나고 사적소유(私的所有)가 보편화되면서부터는 토지(土地)가 가장 보편적인 재산(財産)이 되었다. 계급사회에서 힘의 불평등은 토지소유의 불평등과 관계된다. 권력을 지닌 지배계급은 일하지 않으면서도 생산물의 대부분을 소유하였고, 정작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농민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처지였다. 만성적인 흉년과 무거운 세금도 농민들을 고통스럽게 하였고, 때로 전염병이라도 돌면 허약해진 농민 수천 또는 수만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그래서 균전(均田)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법칙은 농경문화가 근본인동아시아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이상(理想)이기도 하였다. ‘배불리 먹는 것’을 하늘로 여겼던 농민들이 배부르지 않고는 사회적 안정이나 국가재정확보, 국방강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민심은 곧 천심(天心)인데 민심(民心)을 얻기 위해서도 농민을 배불리 먹여야 했다. 이 정치적 메커니즘을 가장 잘 이해한 정치가가 삼봉 정도전이었다. 그가 조준과 고려 말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했던 것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실현이 곧 민본(民本)의 실현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균전(均田)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을 꿈꿨다. 실학자들은 조선후기 사회적 문제는 오랜 관행이던 지주제(地主制)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주제를 혁파하고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내놓은것이 그것이 유형원의 균전제, 이익의 한전제, 정약용의 여전제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농민생활 안정을 위한 다양한 균전(均田) 방식을 제시하였지만 정작 지주제의 혁파와 토지의 재분배는 이뤄지지 않았다. 실학자들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도 양반이었고 지주였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 해방 후 적산농지가 많았던 추팔리 앞 통한들

해방 후 토지개혁 투쟁

농민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가장 주요한 수탈 대상이었다. 개항 초기부터 시작된 일본자본의 토지침탈과 일제 강점 초기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은 그나마 소유하고 있던 토지조차 잃는 경우가 많았다. 산미증산계획과 전시체제기의 강제공출 지주층의 수탈은 농민층의 빈곤을 부채질하였다.

경기도사(2005년)에 해방 직후 전 인구의 77%가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소작농이거나 영세한 자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남한지역 총 경작지는 232만 정보 중 147만 정보(63.4%)가 소작지였다. 논의 경우 71%가 소작지였다. 전체 농가(農家) 가운데 48.9%는 순 소작농이었고, 34.6%가 자소작농이었고 자기 땅으로만 먹고 살수 있는 농민은 13.8%에 불과하였다. 소작농민들은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지불하였다. 미군정 하에서는 30%로 줄었다지만 그렇다고 농민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생산수단인 토지가 농민에게 돌아가지 않고서는 농민층의 빈곤과 농업경영의 합리화는 기대할 수 없었다.

▲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간척된 송산들과 대안4리 구진개

해방 후 농민들은 토지 재분배를 기대하였다. 국가 차원에서도 농업경영의 합리성을 회복해야만 사회적 안정과 국가경영의 안정이 가능하였다. 해방직후 농민들은 토지개혁투쟁을 시작하였다. 토지개혁투쟁은 일제 강점기 농민운동을 통해 의식화된 사회주의적 성향의 운동가들과 농민들이 주도하였다.

▲ 통복천변에 위치하여 오랜 가난과 수해로 피해를 입었던 동삭동 서재마을(2007)

농민들의 요구에 대하여 정치권은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하였다. 사회주의 정치단체인 조선노동당이나 민주주의 민족전선, 그리고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던 중도세력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고,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던 한민당과 우익세력은 무상몰수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소작료 1/3제를 계속 실시하면 지주들이 이익이 적어 토지를 방기하게 될 터이므로 그때 국가가 매입하여 분배를 하고 지주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도록 도와주면 해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해방 정국의 토지개혁은 빈농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좌익과 중도세력, 지주와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간의 갈등이었다.

지주들과 우익세력의 반대 속에 지지부진하게 전개되던 토지개혁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1946년 북한에서 실시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때문이었다. 북한의 토지분배 소식을 들은 남한 농민들은 거세게 개혁을 요구하였다. 궁지에 몰린 한민당과 우익세력은 제1공화국이 수립되자 태도를 바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받아들였다.

▲ 고덕국제신도시 건설로 폐동된 고덕면 율포리 모내기 모습

농지개혁으로 지주층이 대신 자영농 시작돼

남한의 토지개혁은 미군정기에 실시된 적산농지 불하와 제1공화국에서 실시한 농지개혁으로 각각 추진되었다. 적산농지 불하는 정부수립 직전에 실시되었다. 1948년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경기도 지역의 귀속농지는 논 2만3634정보, 밭 9658정보였다. 경기도지역은 귀속농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었지만 평택지역은 조선후기부터 궁방전이나 역둔토의 비율이 높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동척(東拓)이나 일본인 지주가 많았다. 귀속농지 분배는 1948년 3월부터 시작되어 제1공화국 수립 전까지 80% 이상 분배되었다. 조건은 토지가격을 평년 소출의 3배 수준으로 정하고, 소작지 또는 소유지가 2정보 이하인 사람으로 해당 토지의 주 생산물 가운데 20%씩 15년 동안 현물로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제1공화국의 토지개혁은 1948년 말부터 추진되었다. 조봉암이 장관이던 농림부가 ‘지주에게 평균수확량의 15할을 3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농민들은 12할을 6년 동안 매년 2할씩 상환하고 나머지는 국가가 부담하며, 모든 농지의 매매, 증여, 소작을 금지’하는 혁신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2월 기획처는 1949년 수확량의 20할을 10년 동안 상환하는 방식을 제시하여 정부안으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국회는 정부안을 묵살하고 1949년 3월 ‘수확량 30할을 10년간 분할상환’하는 안을 본회의에 제출하였다. 국회 본회의는 무소속 의원들의 강렬한 비판과 정부와의 줄다리기 속에서 1949년 6월 21일 ‘15할을 10년 동안 매년 3할씩 상환하고, 농지 소유상한선을 3정보로 하는 안을 의결(법률 제31호)’하여 공포하였다.

농지개혁은 한국전쟁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전쟁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재실시되었다. 평택지역은 사전매매가 많지 않았고 농지분배도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소작농들은 ‘3정보 이하의 소작지’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농지를 분배받을 수 있었다. 수확량의 3할이나 되는 상환액이 부담되기는 했지만 수백 년 만에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에 대부분 상환기일을 지켰다. 흉년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기한 내에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상환기일을 연장해 주기도 하였다.

빈농들은 자기 땅을 갖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만 지주나 마름들에게 농지개혁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당시 평택지역의 지가(地價)가 연 수확량의 2~3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만약 기획처에서 주장한 30할 또는 20할이 확정되었다면 지주들은 큰 손해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15할로 확정되고 그것도 10년 분할상환이다 보니 흡사 목돈을 주고 푼돈으로 나눠 받는 것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지주보다 더욱 곤란에 빠진 것은 마름이었다. 마름들은 대부분 자기 땅이 적었고 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면서 얻은 이익으로 부(富)를 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농지를 분배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마을사람들의 배척까지 받으면서 고향을 떠나는 경우도 생겼다.

농지개혁은 평택지역의 경제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사건이다. 가장 큰 변화는 영세 소작농이나 자소작농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수천 년 이어져 내려왔던 지주제가 붕괴된 것도 큰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 농민들을 괴롭혔던 마름의 억압과 중간착취도 사라졌다. 자영농으로 성장한 농민들은 몇 년 뒤 간척사업에도 참여하여 경작지를 넓힐 수 있었으며, 1970년대 전반 아산만방조제 준공과 경지정리사업으로 수리안전답이 되면서 경작지도 확장되어 경지정리로 기계화영농이 가능해지면서 부농(富農)으로 성장하는 계기도 되었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