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더 가진 사람들이 더 비루한 인생을 선택한 기막힌 시절

이태종, 임시재, 주익상, 강대철, 유석기, 유창렬, 한상룡, 한상학 등…

”영원히 해방 안 올 줄 알았다”

일본 극우 준동과 부일협력 청산의 미해결

최근 일본 아베(安培) 수상이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함에 따라 한일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일본은 20세기에 전개하였던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오히려 이를 찬미하고 있다. 더욱이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까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함에 따라 일본의 뻔뻔스러움은 극에 달하고 있다. 신사참배의 기억은 현재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에게 강제로 참배토록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식민지 조선인 중에도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를 부일협력(附日協力) 내지 친일(親日)이라고 한다.

부일협력이나 친일은

흔히 매국이라고 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치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일협력은 개항 이후 세력화하기 시작하여

한말,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부일협력이나 친일은 흔히 매국이라고 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도 치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일협력은 개항 이후 세력화하기 시작하여 한말,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해방 후 친일청산이 역사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함에 따라 그 숙제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이 최근 들어 일본의 극우 준동은 이러한 숙제가 민족사적 과제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였다. 이때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가지를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강점한 후 오키나와, 홋카이도처럼 일본에 영원히 편입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우리나라의 역사가 주변 국가에 의해 발전하였다는 타율성론(他律性論), 우리나라의 역사가 고대사회에 머물고 있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이 아니라 스스로 파쟁의식에 의해 멸망하였다는 당파성론(黨派性論) 등의 식민사관을 가르쳤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종종 역사를 왜곡하게 만들고 있고, 일부에서는 이를 동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이 맞서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1930년대부터 시작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은 식민지 조선을 인적 물적으로 수탈하였으며, 수많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언니, 누나, 오빠를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참여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 또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명예를 누리고자 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일찍이 평택은 상무정신이 강하였다. 그런데 이 상무정신의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면 추앙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민족반역자로 매도되었다. 그렇다면 평택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부일 협력한 인물은 누가 있을까?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친일인명사전>에 이태종 등 6명 이름 올라

▲ 일제강점기 일본신사가 있었던 평택기계공업고등학교 본관건물(2013)

먼저 이태종(李台鍾)이다. 일본식 이름은 궁본태종(宮本台鍾)인데, 창씨(創氏)만 한 것이다. 1899년 6월 평택에서 태어난 이태종은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기수, 수원고등농림학교 조교수와 교수로 활동하였다. 중일전쟁 직전 1936년 4월경 만주로 건너가 간도성농림학교 부교장, 1939년 7월 공립국민고등학교장, 11월 만주국 민생부 교육사 편심관에 발탁되었으며, 1940년 7월 교학관으로 승진하였다.

이 공로로 만주국으로부터 주국장(柱國章)과 건국신묘창건기념장(建國神廟創建記念章) 등 훈장을 받았다. 1940년 10월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조선인 협화회 조직인 수도계림분회(首都鷄林分會)에 참여하였다. 수도계림분회는 친일파로 알려진 최남선, 이범익, 박석윤 등이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며, 국방헌금과 위문대 헌납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1944년 5월 만주국 교학관을 사직하고 국내로 돌아와 전시교육체제에 맞게 보성전문학교를 재편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활동하다가 1944년 11월 27일 사망하였다.

임시재(任是宰)는 1895년 2월 진위에서 태어났으며 경성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1914년 판임관 견습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관료로서의 길을 걸었다. 강원도 회양군에서 판임견습관을 거친 후 회양군 서기로 출발하여 강릉군 서기, 인제군수, 삼척군수, 강원도 이천군수, 보령군수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임시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전시체제가 시작된 후 1934년 4월 충남 국방의회연합회 이사로서 일제지배정책에 적극 참여하였다.

주익상(朱益相)은 1888년 1월 진위에서 태어났다. 1908년 순사로 등용되어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11년 6월부터 1913년까지 충남 아산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하였고,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 충남 서산경찰서 통역생을 거쳐 1915년부터 진위경찰서 통역생으로 지냈다. 1915년 판임관 견습시험에 합격한 후 1916년 4월 경부로 승진하였다. 이후 개성경찰서,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근무하였으며, 1921년 9월 경기도 경찰부 경무관 경부 겸 조선총독부 경찰관강습소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1929년 6월 경사로 승진하여 전북 경찰부 경무과 경기 겸 순사교습소 소장으로 부임하였다. 1931년 5월 순사부장시험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12월 퇴직하였다. 주익상은 경찰관으로 활동한 공로로 1928년 6월 훈8등서보장, 11월에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0년 3월 훈7등 서보장 등 훈장을 받았다.

강대철(姜大喆)은 1882년 진위에서 태어났으며 관립 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6월 한성중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부일협력을 시작하였다. 1905년 일본으로 유학 일본대학 고등사범부를 졸업하였다. 유학 중 대학유학생회 번역원, 청년학원 교사, 대한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4월 학부 주사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충남 회덕군 서기, 정산군 서기, 충남 내무부 학무과 서기 및 제1부 서기, 충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에는 청양군수, 보령군수, 홍성군수, 당진군수, 평산군수 등을 거치고 1931년 3월 퇴직하였다. 1938년 6월 말에는 충남 보령어업조합 이사로 재직하였다. 강대철은 일제에 부일협력한 공로로 한국병합기념장,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등 훈장을 수여받았다.

유석기(柳奭基)는 1889년 12월 진위에서 태어났으며 1911년 7월 황해도 신천군 서기를 시작하여 평산군 서기, 수안군 군속(郡屬), 해주군 군속, 황주군 군속을 거쳐 곡산군 재무주임(군속)으로 근무하면서 평양전매지국 사리원출장소 속을 겸직하였다. 이후 곡산군수, 수안군수로 재직하다가 1931년 3월 퇴직하였다. 이외에도 수안군농회 회장, 수안군 축산협동조합 조합장, 수안군 제지업조합 조합장, 황해도 농회 통상의원, 수안군산림조합 조합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부일협력 공로로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조선쇼와5년 국세조사기념장 등 훈장을 수여받았다.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에 파견된 보합단원 검거해

▲ 친일파 지주 한상학과 한상룡의 근거지였던 해창3리(2009)

유창렬(柳昌烈)은 1897년 10월 진위에서 태어났다. 1917년 3월 형사보에 임명되었다. 1917년 7월 경기도 경무부 교습생 과정을 거친 후 경기도 진위경찰서 순사보로 발령을 받은 후 본격적인 친일경찰의 길로 들어섰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순사로 승진하여 종로경찰서 순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형사계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를 검거하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1920년 12월 친일파 처단과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보합단원 김도원(金道源)이 종로경찰서 형사대와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1명과 조선인 순사 1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유창렬은 끝까지 추격하여 김도원을 체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보합단 관련자 7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합단 조직이 발각되어 전국의 보합단원 수십 명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이 공로로 유창렬은 1921년 7월 사이토(齋藤) 총독으로부터 경찰 최고훈장인 경찰관리공로기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수여된 경찰관리공로기장은 경기도에서는 최초로 유창렬이 받은 훈포장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을 포함하여 모두 네 명 밖에 없을 정도로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어릴 적 평택에서 생활한

한상룡(韓相龍)이라는 거물 친일 인물도 있다.

한상룡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宇都宮太郞)을 찾아가

3.1운동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고

내선동화정책과 관련된 12개조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 해창리 출신의 친일파 한희교와 한상룡의 농장이 있었던 구동안들(2007)

이후 1923년 7월 경기도 양평경찰서 순사로 전임되었다가 신경쇠약으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평남 평양경찰서와 경기도 광주경찰서 순사,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 순사로 복직과 퇴직을 거듭하였으며, 1935년 11월 일본 정부가 주는 경찰 재직 14년 4개월에 대한 은사금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평택 출신은 아니지만 어릴 적 평택에서 생활한 한상룡(韓相龍)이라는 거물 친일 인물도 있다. 한상룡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宇都宮太郞)을 찾아가 3.1운동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고 내선동화정책과 관련된 12개조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의견서에는 일본식 창씨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후 친일 및 부일협력 단체인 경성교풍회, 동민회, 조선농회, 이문회, 일만중앙협회, 대일본쇼와연맹, 경성국방의회, 경성교화단체협의회, 소도회,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경성군사후원연맹, 애국금차회, 국위선양무운장구기원제를 위한 협의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시국대책조사회, 조선방공협회,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조선호국신사봉찬회, 배영국민대회, 조선유도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반도무훈현창회, 조선전시종교보국회, 대일본흥아회 등에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친일 전선에 앞장섰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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