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오산 죽미령 전투 미군참패로 평택안성 방어선 포기하고 천안으로 후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용어로 ‘6·25사변’,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 등등 다양하게 불린다. 처음에는 ‘6·25사변’이 일반적으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표준어는 ‘6·25전쟁’이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채결돼 휴전에 들어간 전쟁이다. 이 휴전은 오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선 6·25전쟁의 개요를 간략히 살펴보자.

6·25전쟁 3년 끝에 휴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용어로

‘6·25사변’,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 등등 다양하게 불린다.

처음에는 ‘6·25사변’이라고 불렸지만

최근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표준용어는 ‘6·25전쟁’이다.

▲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폭격으로 폐허가 된 평택역(사진제공-박성복)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38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됐다. 6·25전쟁의 과정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북한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한 시기다. 북한군은 점령지역에서 공산당과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한편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침입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했다. 이제 6·25전쟁은 국제전쟁이 되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이 중국 문제로 불참하였기 때문에 거부권 행사 없이 미국에서 제출한 안건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이에 앞서 미군은 이미 한국 전선에 투입되어 있었다.

제2단계는 미군을 중축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까지 진격한 시기다. 이 시기 중요한 결정은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적극적인 북진을 주장했고, 미국 역시 북진이 유리하다고 판단함으로써 마침내 38도선을 넘었다.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유엔도 총회에서 38도선 이북 진격을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을 설치했다.

제3단계는 유엔군의 북진에 중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김화 일대까지 진출하는 한편 소련의 휴전 제의에 따라 휴전교섭에 들어간 시기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하는, 중국 남부지방에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 정부의 반대로 맥아더는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제4단계는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이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즉각 받아들임에 따라 15일 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개최하였고, 이어 7월 10일 본회의가 열렸다. 휴전회담의 주요 안건은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휴전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휴전회담은 위기에 빠졌다.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 경제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무마시켰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평택에 방어선이 구축되다

6·25전쟁은 38선 일대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전선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평택도 6월 25일 이후 바로 그 영향 아래 들어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4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정부는 대전으로 피신했다. 서울에 잠시 머물던 북한군이 남하함에 따라 평택도 전선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평택전투는 미군과 북한군과의 전투였다.

당시 미군과 북한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제24사단장 월리엄 F. 딘 소장, 제21연대장 리처드 W. 스테픈스 대령, 제1대대장 찰스 스미드 중령, 제3대대장 칼 C. 젠슨 중령, 제34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 대령 등의 지휘관들이 2000명의 미군을 이끌었다. 이에 북한군은 제3사단장 이영호 소장, 제7연대장 김창봉 대좌, 제8연대장 김병종 중좌, 제9연대장 김만익 대좌, 포병대장 안백성 대좌, 제4사단장 이권무 소장, 제5연대장 최인덕 대좌, 제16연대장 박승희 대좌, 제18연대장 김희준 대좌, 제105기갑사단장 유경수 대좌 등으로 구성된 1만2000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평택전투는 1950년 7월 5일부터 12일까지 전개되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을 점령한 후 한동안 머물던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남하하자 유엔에서는 북조선의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의 방침에 따라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8군 워커 사령관에게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보병 제24시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이 작전 명령에 따라 7월 1일 새벽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선발대로 이날 낮에 이타주케(板付) 공군기지에서 부산으로 공수되었다.

스미스 부대는 7월 4일 오산 부근에서 북한군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다. 사단장 딘 소장은 스미스 특수부대를 오산부근에 투입할 당시는 북한군의 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스미스 부대가 오산 북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여 시간을 얻게 된다면 제34연대를 평택과 안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 1950년 7월 4일 유엔군의 평택시가지 폭격으로 평택군청이 불에 타버린 뒤 임시 군청사로 사용되었던 평화병원 터(2013)

7월 4일 오후 제34연대 1대대가 선발대로 먼저 대전에 도착했다. 딘 사단장은 우선 이 대대를 평택 부근에 급파하여 스미스 부대 엄호토록 응급조치를 했다. 7월 5일 새벽 제3대대와 연대본부가 평택 인근에 도착하자 긴급명령을 내렸다. 첫째는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기갑부대와 함께 수원 부근에서 남하 중이며 스미스 부대가 오산 부근에서 이를 방어한다. 둘째 제1대대는 평택 부근에서 진지를 점령할 것, 셋째 제3대대는 안성을 확보할 것, 넷째는 연대 지휘소는 성환에 둘 것 등이었다.

그렇다면 평택과 안성을 잇는 방어선 구축은 왜 했을까 하는 것이다. 평택은 금강 이북 지역에서 국도의 방어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는 점이다. 서쪽은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안성천이 자연스럽게 평택의 서쪽을 방어하는 형세이고, 동쪽은 남북을 종단하는 도로가 빈약하여 북한군의 공격이 오산과 평택을 잇는 도로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입장에서는 우회하는 도로가 없기 때문에 경부선을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평택은 미군이 북한군을 저지할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평택을 북한군에 빼앗긴다면 금강 이북 지역에서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러브리스 연대장은 7월 5일 낮에 연대 본부를 성환에 설치했다. 그리고 평택 성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육군 1군단을 창설했다.

북한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평택지역을 폭격하다

7월 6일 들어 제34연대는

평택-안성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퇴각했다. …

평택의 북쪽 통복천 교량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평택역 일대가 쑥밭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날씨가 매우 불량하였다. 비가 내리는 한편 안개가 낮게 내려앉기도 했다. 이로 인해 평택과 성환, 안성 등으로 이어지는 무선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선마저도 피난민에 의해 노끈 대용으로 잘려져 나가는 사례가 빈번했다. 무선과 유선이 불통되는 상황에서 연대장의 지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같은 날 오산 죽미령에서는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벌여 참패하였다. 그렇지만 평택과 안성의 방어선은 큰 접전 없이 유지되었다. 이날 새벽 5시 제1대대는 신임 대대장 에이리스 중령의 지휘 아래 평택으로 진출했다. 대대는 평택읍의 북쪽 국도변 한 민가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그 인근에 1개 중대를 배치하는 한편 2개 중대를 4㎞ 북쪽으로 진출시켜 도로의 동쪽 칠괴리 부근에 배치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산에서 포병사령관 대리 바스 준장이 평택에 도착하였다. 바스 준장은 스미스 부대의 전투 상황을 전하면서 곧 북한군의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니 잘 정찰하는 한편 로켓포를 배치하여 대비하도록 했다.

오산 죽미령에서 패한 스미스 부대는 오후 4시 반부터 철수했다. 북한군의 전차가 오산을 지나 국도를 따라 남하하자 스미스 부대는 안성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날 오후 집결했다. 이곳에서 제3대대와 합세했다. 그런데 스미스 부대의 철수과정을 제대로 연락받지 못한 평택의 제1대대와 성환의 연대본부는 북한군의 남진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방황하는 꼴이 되었다. 그렇지만 7월 6일 들어 제34연대는 평택-안성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퇴각했다.

▲ 한국전쟁으로 원평동 평택장터가 파괴된 뒤 새장터가 형성되었던 시장로터리(2013)

평택에 남아있던 제1대대는 이날 오전 9시 지휘소를 성환으로 이전하는 한편 지원 중인 한국 공군 교량폭파조로 하여금 일선 부대가 평택을 떠나는 즉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평택의 북쪽 통복천 교량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평택역 일대가 쑥밭이 되었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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