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슷비슷하게 세상돌아가던 기부,나눔,봉사 등은 예나 지금이나

-그 힘든 시절에도 상부상조하던 평택사람들의 情과 교육열

평택에서도

관북지역 수재를 돕기 위한

구제회가 조직되었다.

진위청년회와 동아일보 평택지국에서는

구제방침을 논의한 결과

관북수재동포구제회(關北水災同胞救濟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의연금이 모아지면

전달하기로 하였다.

세상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슬픈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늘 공존한다. 지난 기사에는 ‘사건사고’라는 이야기를 찾았다. 근대 평택에는 사건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흐뭇한 이야기로, 재미있는 이야기로 지역주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암울했던 시기 훈훈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동아일보 1934년 2월 4일

교육기관에 기부 문화 : 서상언, 황노일, 이필성, 구택희 여사, 박성훈, 이기수 등

평택은 근대교육이 시작된 후 여느 지역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각종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3.1운동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1922년 진위군 오성면 숙성리 사는 서상언(徐相言)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 교육기관이 없는 것을 늘 아쉽게 생각하였다. 이해 7월 제실(祭室)을 수리하여 교사(校舍)로 제공하였다. 당시 교육기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고, 교사는 최인원(崔寅源)을 초빙하였다. 적지 않은 비용은 서상언이 지원하였다.

또 진위군 서남면 평택리 사는 황노일(黃魯一)은 부용공립보통학교 기성회에 당시 돈으로 50원을 기부하였다. 진위군 서탄면에도 교육기관이 없었는데, 이필성(李弼成) 면장은 기금 수천 원을 모아 회화리에 진서강습소를 설립하고 1924년 4월 10일 교실 17칸을 건축하고 8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다.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 내려온 영의정 심순택의 부인 구택희(具澤喜)는 평소 사회사업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였는데, 1925년 5월 진위공립보통학교 증축 공사비로 5백 원을 기부하였다.

1927년 7월에는 병남면 평택리 사는 김정석당(金靜石堂) 여사가 부용면과 서면에 조직된 학교 기성회에 현금 1백 원과 대지 3백 평을 기부하였다.

진위청년회는 1931년 4월 진청야학원(振靑夜學院)을 창립한 후 3백여 명의 무산아동에게 한글 보급 등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진청야학원을 운영하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난로에 들어가는 석탄 값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진위청년회는 이를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해왔던 소인극(소인극)을 하기로 하였다. 마침 민예극단(民藝劇團)이 평택에서 공연을 하기로 함에 따라 이를 이용하여 동아일보지국의 후원으로 이해 10월 6일부터 8일까지 진위청년회관에서 공연을 하였다. 진청야학원의 동정금을 모금한다는 소문을 들은 지역주민은 매 공연마다 만원사례를 할 정도로 성원하였다. 공연으로 160원의 수입을 올렸으며, 이중 90여 원은 지역 유지와 주민들의 기부금이었다. 1932년에는 평택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에서 진청야학원 경비로 1백원을 기부하였다.

1933년에는 현덕면 덕목리 살던 박성훈(朴成勳)이 교육 기부행위를 하였다. 박성훈은 이해 봄 인근 마을에서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남녀 어린이 40여 명을 모아 자신의 집에서 자기의 사촌되는 서면 도두리 박성훈(朴性勳)을 불러 가르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40여 명으로 출발하였으나 11월에는 80여 명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덕목리 박성훈은 경제적으로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경우를 보면 자신을 희생하여 도와주었다. 1934년에는 포승면 원정리에 있는 중성학원(衆醒學院)의 경영이 어렵자 청북면 덕우리 사는 이기수(李起秀)는 넉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유지비로 2백 원을 기부하였다.

이외에도 날품팔이 노동자 정경천(鄭敬天)의 진청학원 50원 기부, 틈틈이 모은 한 작부의 진청학원 기부, 김호근의 진청학원 150원 기부, 노동자 양석철의 노동야학 설치를 위한 70원 기부 등이 계속 되었다.

기아, 수해 등 자연재해 구휼사업 :

방국재, 서기훈, 김덕수, 김화식, 이강헌, 이민호 등

▲ 동아일보 1935년 5월 1일

평택은 진위천과 안성천, 그리고 이 두 하천이 서해안으로 흘러들어감에 따라 수해 등 자연재해가 적지 않았다.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무엇보다도 생계문제가 가장 절실하였다. 오늘날처럼 연말연시나 홍수 등 자연재해가 있으면 불우이웃돕기 등 구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평택도 자연재해가 있을 때는 지역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전하였다. 1924년 9월 진위군 서면 대추리 일대가 한재(旱災)로 인해 30여 호가 기아로 허덕이고 있었다. 더욱이 추석 명절을 끼고 있어 생활은 더 처량하였다. 이에 방국재(方菊栽)는 백미 40여 두를 집안 사정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방국재도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

또한 청북면 율북리에 사는 양재근(梁在根)은 평소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는데, 특히 교육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오랫동안 자신의 집에 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 강습소는 율북리와 인근 지역의 무산아동을 모아 자신이 직접 가르쳤다. 1928년 8월 심한 가뭄으로 생활이 어려운 궁민에게 정조 40여 석을 분배 구휼하였다.

이해 9월에는 관북지방에 큰 비가 내려 수해를 입어 적지 않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국적으로 각지에서 수해구제회가 조직되었다. 평택에서도 관북지역 수재를 돕기 위한 구제회가 조직되었다. 진위청년회와 동아일보 평택지국에서는 구제방침을 논의한 결과 관북수재동포구제회(關北水災同胞救濟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의연금이 모아지면 전달하기로 하였다. 이는 평택지역 주민들이 평택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 대한 구휼활동도 적극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보릿고개라고 하던 춘궁기에도 구휼사업이 전개되었다. 오성면 양교리 서기순(徐琦淳)은 남을 도와주는 마음이 있어 평소에도 자선사업을 많이 하였다. 특히 1927년 혹독한 한해(旱害)의 여파로 끼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궁민이 늘어만 갔다. 숙성리와 양교리 일대에 40여 호가 끼니를 거를 정도였다. 이들에게 조와 쌀 25포대와 가마니 직조 자금 70여 원을 사정에 따라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932년 봄에도 기근상태가 날로 심해지자 그 참담이 목불인견일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청북면 삼계리에 사는 김덕수(金德秀)는 좁쌀 18포를 내어 면장에게 의뢰하여 극빈자 180여 명에게 분배하였다. 1933년에도 평택면 평택리 이민두(李敏斗)는 백미 5가마를 궁민 50여 호에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북면 한산리 김화식(金華植)은 과거에도 자선사업에 진력하였는데, 이해 춘궁기에 빈민구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춘궁기를 겪는 궁민에게 곡초(穀草, 볏짚) 1천여 분을 제공하여 가마니를 짜서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김화식은 이해 봄 청북공립보통학교 증축에도 1백 원을 기부하였다. 그밖에 기아에 헤매이는 주민에게 백미와 정조를 희사한 이강헌과 이민호 등도 훈훈한 미담으로 기록되고 있다.

빈민에 무료 의료 평화의원 김병용 의사 칭찬받아

이민훤·고종만 … 훈훈한 미담도

 

1927년 3월 평택향교는

효녀와 절부를 선정하여

독행자(篤行者) 표창식을 가진 바 있었다.

이때 진위군 부용면 평궁리

황희회(黃羲會, 47세)는 효자로,

현덕면 권관리 김씨부인(金氏婦人, 79세)은

효부로 각각 표창을 받았다.

▲ 동아일보 1936년 1월 6일

현대사회는 의료보험이 잘 보장되어 있다. 때문에 누구나 아프면 언제, 어디서나 병원을 찾을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자유스럽게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특히 빈민이나 궁민의 입장에서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김병용(金炳龍)은 평택 시내에서 1927년부터 평화의원을 운영하였다. 개업 5주년을 맞는 1932년 12월 20일(음)부터 1월 30일까지 40일간 군내 빈민을 대상으로 무료치료를 하였다. 병이 있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민에게는 큰 복음이라고 할 정도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당시 빈농에게 배포하였던 무료진료권은 동아일보지국에서 발행하였다.

한편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을 회유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효부, 절부 등을 선정하여 널리 홍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효부나 절부로 선정되었던 분들이 본래부터 덕행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식민지배정책에 이용되었다는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효부나 절부의 덕행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1927년 3월 평택향교는 효녀와 절부를 선정하여 독행자(篤行者) 표창식을 가진 바 있었다. 이때 진위군 부용면 평궁리 황희회(黃羲會, 47세)는 효자로, 현덕면 권관리 김씨부인(金氏婦人, 79세)은 효부로 각각 표창을 받았다.

흐믓한 미담은 친구의 유언을 그대로 지킨 이민훤(李敏煊)의 이야기가 있다. 이민훤은 친구 이민후(李敏雨)이 죽으면서 13세 된 아들 이상학(李相鶴)을 부탁하면서 돈 6백 원을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잘 맡아달라고 유언하였다. 10년이 지난 1934년 1월 31일 원금 6백 원과 이자 447원 50전, 합계 1,047원 50전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민훤과 이민우는 어릴 적부터 친한 ‘철석(鐵石) 같은 고우(故友)’ 즉 죽마고우였다.

사회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고종만(高鍾萬)도 훈훈한 미담을 남겼다. 고종만은 진위군 북면 가곡리에서 살다가 1930년 봄 청북면 백봉리로 이사했다. 이후 4년 동안 피폐된 농촌을 위하여 농촌진흥, 근검저축, 부업장려 등을 장려하였으며 주민회, 공동경작조합 등을 조직하였다. 또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 설립, 위생을 위한 목욕탕 설치, 회의 장소로 공회당 신축 등 지역주민을 위해 헌신하였다. 또 저리를 얻어 부채를 정리해주는 한편 농번기에는 식량을 제공, 도박을 금지시키는 등 쓰러져가는 마을을 살렸다. 이러한 고종만을 위해 6백여 동민 일동은 은잔을 선물하였다.

평택은 다양한 삶이 묻어나는 곳이다. 예부터 어려운 시기에는 상부상조하는 마음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바로 평택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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