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에서 건국까지 3년간의 격동기…별별 갈등들과 혼란

“짐은, 현재의 세계 대세와 일본의 현상을 깊게 생각하여 비상한 수단을 가지고 이 시국을 수습하려고 생각하면서 충성스러운 모든 일본 국민에게 고한다. 짐은, 우리 정부를 통해서 미국·영국·중국·소비에트 연방의 4개국 공동선언에 대해 일본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 취지를 각국에 통지하게 하였다…”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일상속에 예상못한 충격

칙칙 거리는 라디오에서 일본국왕의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문어채의 조서를 듣자마자 일본인들은 일본황궁을 향해 엎드려 통곡하였고, 조선인들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지금도 우리가 해방(解放)하면 떠올리는 가장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은 실제 1945년 8월 15일 해방(解放) 당시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해방당시 경성방송국 기자였던 문제안씨는 ‘일본이 항복하던 날 기자인 자신조차 반신반의했으며, 안재홍선생 댁에 가서 항복소식을 설명 듣고 만세를 부른 뒤에야 실감했고, 방송국에서 몇 번이고 조선말로 항복선언문을 반복 방송하고 난 다음 날에서야 태극기를 손에 든 군중들이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언론인 소설가인 강준식씨도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방송이 나왔던 그날에도 우리민족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을 보냈으며 서울과 전국 대도시의 거리는 비교적 조용했다’고 기록하였다. 해방이 되고도 일본인들은 풀이 죽긴 했지만 벌벌 떨며 황급히 빈손으로 물러가지도 않았다. 공공기관과 경찰서에는 일제강점기의 공무원들이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고, 평택지역의 경우에도 평택역전 혼마찌(본정통)나 팽성읍이나 안중읍 마을주변에 거주하던 수많은 일본인들은 빠르게 신변을 정리하고 조용히 조선을 떠났다. 떠나는 일본인들에게 해코지하는 조선인도 거의 없었다. 하려고 해도 일본 군인들과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평생을 일궈 놓은 집과 재산을 놓고 알몸으로 쫓겨 가는 일본인들 가운데는 정국(政局)이 안정되면 돌아와 집과 재산을 다시 찾으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에게 재산관리를 부탁한 경우가 많았고, 일제강점기의 각종 재산문서들도 꼼꼼하게 챙겨갔다. 지난 1월 말 평택지역을 함께 답사했던 전남 나주 출신의 황선생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1970년대 초 일본의 ‘나주애향회’라는 단체에서 고향마을에 장학금과 돈을 보내와 마을회관을 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이 일제강점기 나주에 살았던 일본인들이었고, 또 마을에는 적산가옥과 창고들이 많았는데 마을사람들 중에는 일본인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이것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해방의 풍경은 다양하게 연출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감격적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지역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서는 어제의 일상이 반복되는 새로운 하루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해방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일본은 항복했고

친일적으로 기울어졌던 인사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일상생활에 묻혀 살았던 조선인들도

‘해방’이라는 단어가 가져올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감하지 못하였다.

40년 가까이 이웃에서 함께 살았던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조선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던 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및 경찰관 주재소,

수리조합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지,

동양척식(주)나 일본인들이

소유하던 농장과 회사들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패망하리라 예측했던 평택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신문과 방송에는 연일 일본의 승리소식이 전해졌고,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를 넘어 미국과 인도를 점령하는 것도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평택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1944년의 도회의원(현 도의원) 선거나 면협의원 선거 입후보자들의 수와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입후보자들의 수가 1935년, 1939년보다 월등하게 늘었으며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려던 사람들도 경쟁적으로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1920, 30년대 평택지역 사회운동에 기여했던 인사들도 이때쯤에는 일본인들과 합작하여 회사를 설립하던가 국방헌금을 납부하고 일제의 지방통치기구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시기에 일본은 항복했고 친일적으로 기울어졌던 인사들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일상생활에 묻혀 살았던 조선인들도 ‘해방’이라는 단어가 가져올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감하지 못하였다. 40년 가까이 이웃에서 함께 살았던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조선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던 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및 경찰관 주재소, 수리조합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 것인지, 동양척식(주)나 일본인들이 소유하던 농장과 회사들은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인내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했거나 반일적 감정을 키워왔던 인사들은 달랐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치안과 일제잔재청산, 민족국가건설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제가 철수하고 치안유지가 어려웠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평택에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평택지부(지부장 이민항)를 위시하여 각종 정치,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다. 해방 몇 달 뒤부터는 징용, 징병, 지원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먹고 살기위해 만주와 연해주, 일본으로 디아스포라되었던 사람들도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가수 이인권이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로 시작되는 ‘귀국선’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도 1946년 초였다. 급작스럽게 다가온 해방은 민중들을 잠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해방의 꿈과 희망을 피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새 국가건설 희망속에 좌우익 대립

해방 후 곡물가격 상승과

흉년은 일반서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해방 전후 농업생산력이

감소하면서 곡물부족현상이 심각해지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공포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최장 5개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전해졌다. 우리민족은 신탁통치를 또 다른 식민지화로 받아들였다. 초기만 해도 좌우익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정치 사회단체와 일반 민중들은 신탁통치가 제국주의세력의 위임통치로 판단하고 반대의 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동아일보 보도가 오보였음이 알려지고 신탁통치문제를 향후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과 관련지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좌익은 ‘찬탁은 한국독립의 진일보이며, 현 단계에서는 필연적인 것’임을 내세워 찬탁으로 돌아섰다.

1946년 초 평택지역에서도 우익들이 중심이 되어 신탁통치반대 평택군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일제강점기 기업가로 면협의원, 평택농회 의원, 평택상공회의소 설립에 앞장섰던 황경수였다. 1946년 2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세력은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였다. 비상국민회의는 곧 미군정의 입법고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되어 반탁운동을 이끌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승만의 주도하에 결성된 독립촉성중앙위원회가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국민회로 개칭되면서 자율정부수립, 반탁운동, 좌익봉쇄를 주장하였다. 중앙에서의 활발한 움직임에 따라 같은 시기 평택지역에서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위원장 김준석)과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평택지부(위원장 최준회)가 결성되었다.

대립적인 입장에 있던 좌우익은 평택우시장과 평택역전에서 반탁대회, 찬탁지지대회를 개최하며 힘겨루기를 하였다. 1947년 6월 단오에는 우익단체가 총동원되어 반탁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사회적 국면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우익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민중들의 여론도, 좌익들이 또 다시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오해하였다. 사회적 여론이 우익과 반탁지지 쪽으로 기울어지자 일제 말 친일성향이었던 인사들도 반탁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 해방정국에서 각종 좌우익의 집회가 개최되었던 원평동 옛 평택역 광장 터(2013)

해방 후 곡물가격 상승과 흉년은 일반서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해방 전후 농업생산력이 감소하면서 곡물부족현상이 심각해지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공포하였다. 미곡수집령은 농민들의 반발을 샀지만 일부에서는 경기도청 농상부 식량과에 미곡을 자진하여 기증하기도 하였다. 평택군에서는 포승읍 석정리 이병찬과 방림리의 이계성이 각각 벼 30가마와 10가마를 기증하여 표창을 받았다. 소작료 3:7제 시행도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3:7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평택지역만큼은 시책에 따라 30%의 소작료만 납부하는 농가들이 많았다.

토지개혁은 해방정국의 가장 큰 이슈였다. 좌익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민중들의 토지분배 요구가 빗발치자 미군정은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7년 12월 남한농지개혁법안을 과도입법의원에 상정하고 남한 내 적산농지를 분배하였다.

1946년 6월 장마철에 대홍수가 평택지역을 덮쳤다. 하루 저녁에 430여 밀 리가 내린 폭우로 추산하기로는 사망자 80여 명(정부발표 11명), 농경지 1,816에이커가 유실되었으며, 구 평택시가지(원평동 일대)와 평택장이 물에 잠겼고 안성천과 진위천 일대의 마을과 들이 침수되어 피해를 입었다.

어수선했던 해방 직후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되고,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금지에 반발하는 좌익봉기가 잠잠해지기 시작한 1947년 9월 경에는 안정을 찾아갔다. 같은 해 10월에는 좌우합작위원회도 해산되었고,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총선안,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파견안 등이 가결된 뒤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추진된 남북협상이 1948년 전반기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제주 4·3사건도 은폐되어 묻히면서 예정대로 5.10총선이 실시되고 7월 17일 헌법이 통과되고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힘들게 수립되었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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