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칠원 마을·서탄면 사리·현덕면 신왕리 등

성공사례 많지만 공과에 대한 현재 평가는 연구 필요

모든 국민이 잘사는 농촌만들기 프로젝트

“새마을 운동이란 무엇이냐? 나는 작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쉽게 말하여 「잘 살기 운동이다」라고 풀이를 했습니다. 이「잘 살기」라는 것이 대단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하면 나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고대광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자조심이 강하고 서로 협동하여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가면서 나도 잘 살고, 우리 이웃도 잘 살고, 우리 고장도 잘 살고, 우리나라도 잘 사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강조했습니다. (1973년 11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 유시)”

▲ 1970년대 퇴비증산운동에 동참한 학생들

새마을운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잘살기 운동’이다. 1970년대 당시 제3공화국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각에서 ‘잘 산다’는 개념은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혼자 부자가 되어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자조(自助)하고 협동(協同)하여 모든 국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지향점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작사했다는 새마을노래에도 잘 드러나 있다. 새마을노래의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이고, 3절은,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새마을을 가꾸세’ 이며, 4절은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마을을 가꾸세’이다. 그리고 후렴구마다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로 끝을 맺는다.

▲ 1970, 80년대 새마을운동이 활발했던 현덕면 신왕리 일대(2013)

제3공화국 정부는 각 지역마다 새마을지도자를 발굴하고 주민들을 부역 동원하여 마을길 넓히기와 초가집 개량, 생활개선,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하였다. 또 전국에서 우수지도자를 선정하여 표장과 훈장을 수여하였고, 우수사례를 발굴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평택지역에서도 6명의 지도자가 훈장을 받았다. 새마을운동 사례 가운데 전남 여수 돌산의 새마을지도자 고효주의 사례를 살펴보자.

고효주는 전남 돌산 출신의 청년으로 월남전 참전 후 전역하여 1973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하던 군내리를 개혁하기 위해 교회청년들을 중심으로 ‘웃샘회’라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의식개혁, 나무심기, 새마을교실운영, 문화재보호운동 등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1975년에는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첫 해에는 마을의 숙원이었던 전화가설사업을 시작으로 비탈의 암석을 뚫고 깎으며 마을진입로를 확장하였고, 다음 해에는 전화를 가설하고, 수산물가공을 위한 새마을공장을 만들었고, 간이상수도를 설치하여 농촌환경을 개선하고 농가소득을 증대시켰다.

불굴의 새마을지도자 칠원리 김기호씨

군내리는 고효주라는 새마을지도자의 헌신으로 새마을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마을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1981년 4월 돌산대교가 준공되자 옛 방답진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유산과 훌륭한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영세농업보다는 어업 및 수산업과 관광산업을 발전시켰다. 현재 군내리는 돌산읍의 중심마을로 우수한 마을경관과 문화유산, 그리고 어업 및 수산업을 활용하여 소득이 향상된 대표적인 마을로 이름이 높다.

▲ 팽성읍 두2리 다락말의 새마을지도자 박세홍 공적비(2008)
▲ 이동협동조합과 새마을운동 당시에 건립한 서탄면 사리 새마을공동창고와 사리마을(2012)

이처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우수한 새마을지도자의 리더십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성패를 좌우하였다. 제3공화국 정부에서 규정한 우수한 지도자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정부에서 발행한 자료를 참고하면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가정생활이 건전하여 모범이 되고 가족의 지원과 지지를 받는 사람, 둘째, 남다른 노력으로 마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 셋째,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 넷째, 사업을 추진하고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다섯째, 정부기관이나 대외활동에 원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 등이다.

이 인물기준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친정부적이고, 정부시책에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며, 지역에 사회 경제적 지위가 있는 유지(有志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새마을지도자가 선출되면 우선 마을 개발 사업을 결정하고, 추진방법을 계획하며, 10여 명 수준의 개발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개발위원은 이장이나 반장, 마을의 유지(有志) 급 인물들이 선출되었다. 새마을부녀회도 가정살림, 자녀교육, 생활개선, 가족계획운동과 같은 의식개혁운동과 마을개발사업 지원을 담당하였다.

평택시 칠원1동 원칠원 마을은 조선시대 삼남대로 갈원(葛院)이 설치되었던 주막거리마을이었다. 인구가 적고 주민구성이 복잡했으며 생산기반이 취약하여 주변마을과의 관계에서도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1960, 70년대는 주막거리도 시들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주민들은 경사진 밭에 채소를 심어 평택장날 팔거나 산지봉이나 멀리 도일동까지 가서 나무를 해다가 서정리장에 팔아 생계를 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농업용수도 부족하였다. 대물린 가난 때문에 교육수준도 매우 낮았다.

▲ 칠원1동 새마을운동지도자 김기호의 자서전이제는 울지 않으련다

칠원동 새마을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김기호씨였다. 김기호씨는 소년시절부터 원칠원소년단을 결성하여 보리이삭줍기로 종자돈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뒤 종자돈으로 마련된 보리쌀 5말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10년 뒤에는 백미 20가마로 불렸다.

이 기금으로 관혼상제에 필요한 상여와 공공물품을 구입하여 마을에 기증하고 마을 뒷산에 산림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

1970년대 초 김기호씨는 가난을 퇴치할 수 있는 희망을 새마을운동에서 발견하였다. 준비된 지도자의 지도를 따라 정부가 지급한 시멘트를 활용하여 도로확장과 농로개설, 공동우물조성, 지붕개량사업 등 공공사업을 진행하였다.

농지가 부족한 칠원1동의 현실을 감안하여 축산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이태리포플러 묘목사업, 약초재배사업과 같은 소득증대사업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공로로 김기호씨는 3.1문화상과 새마을 훈장 협동장, 이충웅씨는 새마을훈장 노력장을 받았으며, 마을은 내부부 선정 새마을 홍보마을, 보건위생 선도마을로 지정되었고, 세계 각 지역에서도 견학 오는 ‘새마을’의 상징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의 ‘역사적 평가’는 어떠할까?

서탄면 사리(寺里)는 칠원 윤씨, 안동 김씨로 형성된 농촌마을이다. 1919년 3.1운동 때 서탄면장 윤기선과 윤교영 주도의 만세운동도 있었다. 1954년과 1958년부터는 4H운동과 이동협동조합운동을 통하여 대표적인 성공사례를 만들어냈다. 사리새마을운동은 사리이동협동조합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새마을지도자들도 협동조합 임원들이 담당하였다.

마을안길 확장이나 마을 앞 오산천을 건너는 사리교(寺里橋)를 건설하는 등 각종 사업에는 이동협동조합에서 자금을 출자하고 협력하여 완공하였다. 사리마을은 새마을부녀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마을이었다. 새마을부녀회는 1972년 산림녹화사업이 추진될 때 묘포(苗圃) 사업을 통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재래식부엌개량, 화장실 개조, 공동구판장 설치, 어린이놀이터 조성사업 등으로 부녀회장 최정희씨는 새마을훈장 노력장을 수여받았고 마을은 새마을운동 홍보마을로 선정되었다.

안성천 하구에 있는 현덕면 신왕리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의 마을이었다.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어업활동이 어렵게 되고 드넓은 하천부지가 형성되자 지도자 김원기씨를 중심으로 새마을사업을 통하여 하천부지 개간과 소하천을 개수하여 경작지를 확보하고 홍수예방을 위한 사업을 했다. 마을회관과 공동창고를 신축하고 마을금고를 설립하여 ‘잘사는 농촌’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농촌새마을운동은 관(官) 주도의 ‘농촌근대화’운동이었다. 정부가 주도하여 농민의 자발성을 이끌어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이 정부의 ‘시책’과 ‘지시’에 따라 추진되었기에 이 사업이 ‘관(官)’ 주도였음을 알게 된다.

새마을운동의 가장 긍정적 효과는 생활환경이 바뀌고 우리나라 농업이 기계화되는 과정에서 마을길 확장과 농로확장 등을 통하여 변화의 기반을 조성한 것과, 농민들에게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근대화를 위한 정부정책 중에는 들도 일부 정책에서는 효과를 봤지만 상당수의 다른 정책에서는 실패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정부정책의 반대로 해야 성공한다’는 불신풍조도 생기게 되었다.

정부가 농촌근대화를 외쳤으면서도 1970~80년대 저곡가정책과 일관성 없는 농업정책으로 농가부채를 가중시킨 점도 새마을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그늘이다.

새마을운동은 30, 4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기에 어려움도 있다. 운 점이 많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이 평택지역의 농촌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핵심적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이 운동에 대한 사료수집과 학문적 연구가 좀 더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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