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좌우 이익싸움에 휘둘려 눈치보기는 해방정국이나 지금이나…

가장 주요한 과제는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 제도의 마련과

토지개혁,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16-26일 사이에 열린

이른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과 상황은

이러한 논의를 비켜가고 말았다.

 

해방되고 나니 민주와 민족의 정치상황 복잡해져

▲ 1946년 5월 좌우익 세력이 충돌한 평택우시장 자리에는 1969년에 평택초등학교가 세워졌다.

1945년 8월 15일, 그리도 염원하던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과 동시에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 민주과제가 주어졌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조직된 단체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이하 건준 *건국동맹과는 다름)였다. 이 단체는 해방 당일에 여운형과 안재홍이 주도하여 조직되었으며, 대부분의 좌우 인사들을 망라하였다. 건준은 국외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이 귀국하기 전에 조직되어 지도부의 활동은 여운형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창설하고 치안 유지를 담당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 9월부터 11월 사이에 속속 귀국하면서 해방 정국의 정치 지형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점차 좌익이 건준을 주도하게 되면서 우익인사들이 이탈하였다. 이어 유력한 인물들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1945년 11월 1일 현재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과 정치단체의 수가 무려 250여개에 이를 정도였다.

1945년이 끝나갈 무렵에 주요한 정치적 세력 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에서는 여운형과 인민당,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 이승만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김성수와 한국민주당,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만주지역 항일무장 세력, 김두봉·무정의 연안 독립동맹 세력, 그리고 조만식의 민족주의 세력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패망이 연합국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그어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총독부를 인수한 미군은 10월 10일 미군정청의 아놀드 군정장관이 남한의 정부는 미군정뿐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은 미국과 소련의 울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 평택좌익단체간부 12명이 집단으로 탈당한 사실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46년 1월 13일)

해방 정국에서 가장 주요한 과제는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 제도의 마련과 토지개혁,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16-26일 사이에 열린 이른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과 상황은 이러한 논의를 비켜가고 말았다. 1946년 1월부터 신탁통치 문제가 주요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극단적인 좌·우 대립이 나타났고 1945년 8월 15일과 9월 9일,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통일국가 수립은 끝내 무산된 채 해방정국의 끝을 맺었다.

해방 정국에서 평택지역에서 조직된 각종 단체들은 중앙의 정치 지형과 무관하지 않았다. 주로 중앙에서 조직된 정치 단체의 지부(支部)적 성격을 띠었고, 1946년 이후에는 좌·우익의 대립이 심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건준 평택지부와 인민위원회 등 사회주의 단체

해방 후 평택 지역에서 처음 결성된 단체는 일제강점기 경방단원이었던 박종화와 이문영이 중심이 된 ‘자치대’로 보인다. 이는 일제의 패망 직후 치안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 보이나 활동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9월 초에는 이민항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택지부가 창설되었다. 이 단체는 평택 4리의 전 일본 해군시설부 관리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9월 6일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같은 해 11월까지 각지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방조직들과 각종 자생적 조직들이 전환되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9월 초 평택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청년동맹과 여성동맹을 만들고 치안유지, 적산관리, 친일파 숙청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유포된 사회주의 사상이 평택 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방 공간에서 소사 테러 사건, 가재리 폭동사건, 팽성면 계양리와 봉남리 무봉산, 서탄면 수월암리 등에서 일어난 일련의 농민 폭동 사건 등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전과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 단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나, 이들이 대부분 지하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직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당시 미군정 평택 치안 책임자였던 파악스 상사가 국제 사회주의자였고, 평택경찰서 사법주임인 최문진이 사회주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문진은 1946년 9월 가재리(현 평택시 송탄동)에서 전국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총파업에 따라 일어난 농민폭동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도왔다. 또한 1947년 9월 16일자 동아일보에 평택경찰서 수사주임, 경사, 형사 등이 남로당 평택지부원과 결탁하고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는 죄목으로 검거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평택에서 민전, 전평, 남로당 등의 단체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1월 10일에는 평택군 좌익단체 간부들이 집단 탈당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평택군 민전조직의장 김석봉을 위시한 간부급 인물 10명과 평의원급 2명 등 12명이 집단으로 탈당하였다. 이어 같은 해 2월 17일에는 남로당 평택위원장 이주상 등 4명의 남로당원이 폭동사건 혐의로 검거되어 기소되었다. 이후 평택 지역의 사회주의 단체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촉성 등 대공 우익단체들도 다양

1946년 5월 중순경 좌익세력이 연합하여

평택군민위원회의 이름으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위한 군민총궐기대회를

평택우시장(현 평택초등학교)에서 개최하였다.

모인 인원은 만 여 명에 이르렀다.

 

주로 지하에서 활동했던 좌익계열의 단체들과는 달리 우익계열 단체는 대체로 읍·면 단위까지의 조직 양상과 조직원의 명단이 명확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9개 정도의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1945년 조직된 조선소년군 평택연대 이 외의 단체들은 1946-7년에 집중적으로 조직되었다.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의 전신인 조선소년군의 평택연대는 1945년 10월에 조직된 평택 지역 최초의 우익 성향의 단체이다. 일반 대원 17-20세까지의 청소년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와 치안 유지에 주력하였다.

해방정국에 조직된 평택의 대표적인 우익 성향의 단체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가 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2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발족된 단체이다. 평택지부는 1946년 2월 하순경 결성되어 초대 지부장으로 김준석을 선출하고 지부장 아래에 중진 간부가 있었으며 각 읍·면별로 지부장을 두었다. 이어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대한독립촉성부인회도 결성되었다.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또한 각 읍·면별 책임자를 두었으며 대공별동대를 조직하고 서북청년단원을 초청하여 반공 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한독립촉성부인회 역시 각 읍면으로 조직을 확대하였으며 부녀자들의 독립사상 고취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좌익 부녀 동맹과 대결하는 한편 청년 별동대원들의 급식을 뒷바라지 하였다.

1945년 8월에는 전국학생총연맹 평택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과격 학생들을 선도하는 한편 평택군내 학생 상호간의 단결에 주력하였다. 또한 대한광복군 사령관을 역임한 지청천이 1947년 9월에 결성한 대동청년단의 평택군단부가 9월 하순에 결성되어 각 읍·면별로 간부들을 두었다. 이 단체는 단원의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배속장교를 두어 군사훈련과 민족주의 사상을 교육하였다.

11월에는 이범석이 조직한 민족청년단 평택군단부가 결성되었는데 독촉의 간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 단체는 각 읍·면마다 단부(團部)를 조직하였으며 푸른 제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서상천이 주도한 대한독립청년당의 평택군단부가 출범하였다. 이 단체는 대동청년단원 일부가 이탈하여 가담하였으며 극우 노선을 지향하고 대공(對共) 투쟁을 전개하였다.

▲ 1947년 8월 31일 3만 군중 동원하여 반탁 대회를 개최한 기사(동아일보 1947년 9월 2일)

중앙 좌·우익 대립의 지역 대리전

같은 해 8월 말에는 국민촉성회 명의로

3만 여명이 반탁 청년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해방 정국의 대립은 민족세력과 반민족세력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전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분쟁이 정치적 이슈의 블랙홀이 되면서 대결의 기본 구도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중요한 결정 사항인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정치·사회 세력의 선정 문제를 논의하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점차 심화·확산되었다. 이에 분단에 대한 위기의식이 일어나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이 나타났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중앙의 거물급 인사들 사이에서 일어났을 뿐 지역 사회로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은 좌·우익의 대립구도 속에서 각 지방에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시·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평택에서도 1946년 황경수를 위원장으로 반탁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반탁군위원회는 16명 정도의 핵심간부를 위시하여 각 읍·면별 책임자를 선정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하였다. 앞서 조직된 조선소년군 평택연대는 반탁위원회의 별동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제 지역사회에서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 간의 잦은 대립이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 평택경찰서의 수사주임, 경사, 형사 등이 적화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된 기사(동아일보 1947~)

1946년 5월 중순경 좌익세력이 연합하여 평택군민위원회의 이름으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위한 군민총궐기대회를 평택우시장(현 평택초등학교)에서 개최하였다. 모인 인원은 만 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100여명의 우익 진영 행동 세력은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돌팔매질과 몽둥이로 혼란을 유도하여 대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같은 해 8월 말에는 국민촉성회 명의로 3만 여명이 반탁 청년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지역사회에서 조직된 단체들의 활동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문제로 모아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장연환 효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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