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소작쟁의 시작-농민백성이 언제 편했던 때 있었는가…

1927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분리된 조선농민총동맹이라는

전국단위의 합법적 농민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 농민조직들은 소작료문제,

소작권 이동, 동척이민철폐와 같은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함께

야학운동, 독서회, 소인극 개최와

같은 사업으로 백성 속을 파고들었다.

 

▲ 1930년 5월 26일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 진위농조를 수진농조로 개편할 것을 결의한 진위면 봉남리 강우찬의 집 부근(2012)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쪽으로

1920년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화주의를 구체화하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 청년들은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대한 청사진을 내놨다. 사회주의 이론에 익숙해진 노동자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자본가를 타도하고 계급 없는 평등세상을 꿈꿨고, 농민들도 일제의 식민지수탈과 지주와 마름의 착취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 농민운동은 질적으로 성장하였다. 농민들은 지역단위의 소작인회, 소작조합을 발전시켜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1927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분리된 조선농민총동맹이라는 전국단위의 합법적 농민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 농민조직들은 소작료문제, 소작권 이동, 동척이민철폐와 같은 농민들의 생존권 문제와 함께, 야학운동, 독서회, 소인극 개최와 같은 사업으로 백성 속을 파고들었다. 1930년대에 운동조건과 운동노선이 변하자 합법적 농민운동을 청산하고 비합법적인 혁명적농민조합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들 비합법적 농민조합들은 악덕지주나 사음(舍音:마름이라고도 했다. 토지주의 대리인)의 횡포에 저항하거나 양곡수탈 거부투쟁, 군용도로 부설공사 인력동원 거부 등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전후의 농민단체들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 지향이었다. 중심인물들도 농민운동과정에서 성장한 농민출신 운동가들이 많았다. 이들은 국제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빈농우위의 원칙을 내세웠다. 농민층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상향식의 조선공산당 재건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남상환의 고향으로 추정되며 수진농조 고덕지부 결성을 추진하던 고덕면 율포1리 방죽말(2011) (1)

대지주들 농장의 고율 소작제로 소작쟁의

근대전후 평택지역은 저습한 평야에 도로교통, 수로교통이 활발한 고장이었다. 저습한 평야지대에는 바닷물이 유입되고, 하천 좌우에는 매우 넓은배후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늘 범람하여 수해를 입히던 하천에 제방뚝을 쌓으면서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간척되기 시작한 주인없었던 배후습지들은 일제강점기 대부분 총독부에 귀속되어 일본인 농업이민자들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친일지주들에게 싼값에 불하되었다. 평택평야에는 동척농장도 많았고, 가등, 평원, 길본, 덕전과 같은 30정보(정보:10,000m2, 약 3000평)이상 토지경영하던 일본인 농장도 많았다.

고덕면 해창리 간척지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였던 친일파 한상룡의 농장도 있었다. 한상룡은 대한제국기의 친일파 한희교의 아들로 해창3리에 연고가 있었다.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뒤에는 조선총독부 고위관료들과 교유하며 국민총력연맹 사무국장, 동양척식(주) 촉탁을 지냈으며, 전시체제기 비행기헌납운동과 지원병제도 창설에 앞장섰던 친일파였다.

일제강점기 평택지역 농민들은 대부분 자작 겸 소작이거나 소작농들이었다. 농민들은 일년에 얼마씩의 도조를 내는 정조법보다는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는 타조법에 의해 수탈당했다. 소작계약도 1년 단위로 짧아 지주나 마름에게 잘못 보이면 소작권을 빼앗겼다. 소작료 이외에 다양한 명목의 수탈도 많았다. 1927년 3월 진위청년회 총회에서 ‘무리한 소작권 이동에 대한 조사위원 파견’을 결의한 것을 보면 당시 소작권 이동문제나 무리한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농민들의 생활은 날로 악화되었고 대홍수나 대가뭄이라도 당하면 보릿고개에 피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할 만큼 굶주렸다.

열악한 생활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소작쟁의로 저항하였다. 평택지역에 소작쟁의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다. 대표적인 것으로1931년 4월의 진위면 갈곶리 소작쟁의, 같은 해 11월의 서탄면 금각리 소작쟁의, 1934년 1월 고덕면 율포리 소작쟁의, 1938년 3월 청북면 백봉리 소작쟁의가 있다. 쟁의는 일본인 지주의 농장과 조선인 지주의 농장에서 골고루 발생했고, 지주보다는 마름의 횡포, 부당한 소작권 이동, 과다한 소작료 인상에 저항한 경우가 많았다.

▲ 남상환이 서정리노동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경부선 서정리역전 골목(2013)

오산 진위농민조합이 창립하다

수진농민조합(水振農民組合)은 1930년 3월 10일 100여 명의 농민들이 진위군 북면 야막리 박규희의 집에 모여 ‘진위농민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전국농민총동맹 중앙위원이며 서정리청년동맹 중앙위원과 서정리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남상환(1908

~1933)이었고, 발기인은 진위면 야막리에 살며 천도교 진위교구를 대표하고, 오산사회운동단체를 이끌던 박규희였다. 이들은 창립목적으로 농민층의 이익획득과 생활향상, 문맹퇴치와 의식 교양, 상호부조를 통한 단결도모를 내세웠다.

1930년 3월 28일 진위면 갈곶리 강우찬의 집에서 개최된 제1회 집행위원회에서는 본부의 위치를 오산에 두고 조합의 명칭을 ‘수진농민조합’으로 바꾸는 문제와 지부설치 문제가 결의되었다. 이것은 진위농민조합의 조직 확대 과정에서 고덕면 율포리 출신으로 조선공산당재건 적색농민조합조직준비위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심인택과, 수원군 양감면(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출신으로 수원청년동맹 간부, 신간회 전체대회 중앙집행위원, 조선일보 수원지국장, 카프 회원 등으로 활동 중이던 박승극, 그리고 박승극과 연고가 있었던 양감면 용소리의 장주문(농민), 이원섭(서당훈장)이 참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부설치는 고덕면과 양감면이 거론되었다. 고덕면은 당현리 출신으로 보이는 남상환(당시 남상환의 본적과 주소지가 고덕면이었음)과 두릉리 출신의 김영상의 암약으로 수진농조에 가입한 조합원이 많았고, 양감면은 수진농민조합 간부 박승극을 비롯하여 장주문, 이원섭의 활동근거였다. 고덕지부설치는 고덕면 율포리 뒷산에서 모의되었다. 하지만 1930년 5월 초에 있었던 고덕지부 설치는 평택경찰서의 금지로 실패하였고, 이어 추진된 양감지부 설치도 성사되지 못했다.

1930년 6월에 진안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협동조합은 무산농민의 자립과 생산수단의 공유를 개념으로 하는 사업으로 1930년대 전후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협동조합운동이 진행중에 ‘수진협동조합’이 아닌 ‘진안협동조합’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시기를 통해 안성지역에서 활동하던 죽산농우연맹, 양성농우회, 안성농우회와 같은 농민조직이 수진농민조합과 연대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1932년 12월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핵심간부 8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고 이 가운데 남상환, 박승극,

김영상, 장주문, 이원섭을

특별공판에 회부하였다.

 

▲ 심인택의 고향마을이던 고덕면 율포2리 밤개울과 양성말(2011)
▲ 천도교 진위교구가 있었고 수진농조 창립 발기인 박규희의 고향마을 진위면 야막리(2013)

일제말기 암흑으로 꿈이 사라지는…

수진농민조합은 당시 적색농민조합의 ‘빈농우위’ 원칙을 바탕으로 농민문제에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특히 1930년대 평택지역과 수원군 양감면 일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소작쟁의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내에 쟁의부를 설치하고 소작농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예컨대 1930년 수원군 정남면의 사음(마름) 김준식이 도조(賭租)로 받던 소작료를 갑자기 타조(打租)로 바꿔 이득을 취하고, 부당하게 소작권을 이동시키고, 각종 부당한 요구로 이익을 취하자 쟁의부원들을 서울의 부재지주에게 직접 파견하고 담판하여 문제를 해결한 일이 있다. 또 서탄면 금각리와 황구지리에서 일본인 부재지주가 도조(賭租)를 타조(打租)로 바꿔 징수하자 남상환이 주도하여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지주 및 사음과 담판하였다. 이처럼 수진농조가 농민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농민층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자 농민들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수진농민조합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졌다.

수진농민조합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일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을 가하였다. 창립 발기인이었고 오산사회단체엽합회 집행위원이었던 박규희는 가택을 수색당하거나 격문사건으로 연행되어 취조당하였으며, 남상환이 이끌던 서정리노동조합에도 각종 위해를 가하였다. 또 남상환과 김영상에게도 금각리 소작쟁의 개입혐의로 연행하여 취조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탄압하였다. 심지어 청북면 어소리의 전성녀라는 여인은 수진농민조합원이라는 이유로 경찰과 조선농회 직원에 의해 심어 놓은 벼를 뽑히고 모욕을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32년 12월 일제는 수진농민조합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핵심간부 8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고 이 가운데 남상환, 박승극, 김영상, 장주문, 이원섭을 특별공판에 회부하였다. 수진농민조합 간부들에 대한 재판은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수진농민조합원들도 단체로 상경하여 재판을 응원하였고, 신문과 잡지들은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전국적 관심 속에 진행된 재판은 1년 반을 질질 끌었다. 마땅한 죄가 없는 상황에서 핵심간부들을 미결수 상태로 구금하여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수작이었다. 결국 1년 반 만에 구속된 4명은 증거불충분으로, 남상환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남상환은 고문과 구금의 후유증으로 출소하자 사망하고 조직은 무너졌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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