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통치, 농촌진흥운동, 황민화 교육 등 전시체제기 철저한 준비에 부응

조선총독부에서는 1937년 8월

‘조선인 지원병제도 실시 요항’을 만들고,

학무국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른바 ‘국민교육에 대한 방책’을 마련했다.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황민화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 일제 말 국방헌금 모금에 참여했던 가재리강습소의 후신 송탄초등학교(2013)

일제강점기 중 1930년대 이후를 흔히 전시체제기라고 한다. 전시체제기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며,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연속되었다. 일본이 전시체제기를 형성한 것은 다양한 배경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대공항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온 불황에 허덕일 정도로 심각하였다. 일본은 이 위기를 국내에서는 국민에 대한 팟쇼적 지배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대륙침략 전쟁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자위적 탈출을 위한 침략전쟁에 따라 전시체제기 식민지조선은 대륙침략병참기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에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당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일협력 또는 친일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다. 전시체제기 전에는 자발적인 친일적 행위가 많았다면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기에는 자율적인 친일도 있었지만 전시체제라는 상황에서 타율적 부일협력도 적지 않았다. 이제 일상생활 그 자체가 부일적 형태로는 띠었다. 이러한 부일적 형태는 국방헌금 모금과 황군위문품 전달, 징병지원 등이 있었다.

▲ 진청학원(현_중앙초등학교)장, 평택운송이사, 평택곡자재조합장, 평택면협의원, 경기도회의원으로 활동하며 각종 친일활동에 적극 가담한 이민훤(노훤은 오기로 보임)공적비(2013)

각 마을 농촌진흥회도 국방후원회에 헌금 납부

일제가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만주사변 직후부터였다. 침략전쟁을 시작하면서 국방헌금을 모은 것이다. 국방헌금은 일본에서 시작되었지만 식민지조선에서도 국방헌금을 수거했다. 1932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일본에서 628만원의 국방헌금을 모았다. 식민지조선에서의 국방헌금 모금도 본격화되었다. 1932년 12월 28일까지 경기도에서 모금한 국방헌금은 9,289원 63전에 달했다. 평택에서 첫 국방헌금은 일본인이었다.

1933년 1월 진위군수인 사촌절태랑(四村折太郞) 외 62명이 216원을 납부했다. 이후 한동안 부진하였던 국방헌금 모금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강화되었다. 각 지역에서는 국방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평택에서도 국방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기사에, 진위군에서는 비상시국인 만큼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7월 31일 오전 11시부터 1백여 명의 유지가 모여 더위를 무릅쓰고 4,5시간 비상시국에 대한 긴급대책 여하를 긴급히 토의하고 오후 3시에 모임을 끝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국방후원회가 조직되었고 회장에 원제열, 부회장에 이용손과 일본인 1인이었다. 이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부회장으로 추대된 이용손과 남병희가 각 30원을 납부하였다. 또한 윤종민 원제동 조성구 원제승 등이 각각 20원, 박원훈 김종철 최익화가 각각 15원, 원제열 엄주호가 각각 10원씩 국방헌금을 납부하였다. 이외에도 다수가 1원부터 5원씩 국방헌금을 냈다.

중일전쟁에 황군위문품도 전달

국방헌금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도 여전히 모금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개인보다도 단체를 중심으로 국방헌금을 모았다. 평택에서는 평택공립소학교 동창생 일동이 15원, 동양척식주식회사 평택농장에서 20원, 지제리 O성 농촌진흥회 10원 86전, 유천리 둔성농촌부인회 2원, 송탄면 신장리 제역갱생부락 5원, 고현리 우촌갱생부락 15원, 청호리 청호갱생부락 10원, 청호리 천당농촌진흥회 4원, 동천리 사동농촌진흥회 7원, 하북리 하북농촌진흥회 15원, 신리 신리농촌진흥회 8원, 견산리 산직농촌진흥회 5원, 견산리 견산농촌진흥회 5원 80전, 은산리 방촌농촌진흥회 9원, 가재리강습소 3원 등 농촌진흥회, 부인회, 갱생부락, 농촌진흥회 부인부, 강습소에서 국방헌금을 냈다.

뿐만 아니라 평택지역의 유지로 알려진 이경영이 150원, 이행규 40원, 홍병렬 300원, 이근현 10원, 민광식 300원, 이민훤 300원, 성주한 200원, 이원민 10원 등을 납부하기도 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갱생부락 또는 농촌진흥회에서 국방헌금을 모금에 많이 동참하는 모습이 보인다. 농촌진흥회는 일제의 관변운동인 농촌진흥운동의 연장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은 겉으로는 농촌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선융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특질이 있다. 첫째는 내선융화를 위해 식민지 조선인에게 적당한 정도로 빵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농촌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춘궁과 빚을 퇴치하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둘째는 농촌진흥운동은 운동의 대상을 개개 농가, 개개 농민에게 두었다. 이는 일제가 식민통치기구를 농가 내지 농민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셋째는 농촌진흥운동은 농가경제의 재건을 목적으로 내걸었지만 민족운동 또는 공산주의운동을 탄압하고 황국신민정신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에 식민지 조선이 농민은 갱생농민이 아니라 ‘황국농민’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 내지 특질에 따라 읍면동뿐만 아니라 마을 단위로 농촌진흥회를 조직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있던 것이다. 평택지역도 각 마을 단위로 농촌진흥회가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합하는 단체가 되었다. 이에 전시체제기에는 국방헌금을 납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방헌금 외에도 일본군과 군사용 기자재를 구입하는 비용을 내기도 하였는데, 성동공립보통학교 학생, 진위공립소학교 6학년, 평택공립소학교 학생 일동 등도 내기도 하였다.

국방헌금을 낸 사람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당시 신문에 홍보하였다.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국방헌금뿐만 아니라 황군 즉 중국과 전쟁을 치루는 일본인을 위한 위문품을 모집하였다. 일본군을 위한 첫 위문품은 1937년 10월 말까지 진위군청에서 모았는데, ‘무려 수백 명’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위문품을 내놓았다. 이에 군청에서는 중국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에게 전달하였다.

지원병에 적극 참여, 평택에서 400여 명 지원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대륙침략을 재개한 이듬해인 1932년부터 조선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조선인 병역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연구를 거듭했다. 이는 대륙침략을 재개한 상황에서 병력 충원 면에서도 조선인의 협력을 요구할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936년 8월 5일 임명된 남차랑(南次郞) 총독은 조선군사령관, 육군대신, 관동군사령관 겸 만주국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했던 인물로 동화정책의 극단적인 형태인 황민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조선통치의 2대 목표는 자신의 임기 안에 ‘천황’을 식민지조선에 오도록 하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남차랑은 통치기간 첫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 둘째 목표는 그의 임기 중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실시하여 기초를 닦아두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동안 자치운동 내지 참정권운동을 벌이던 친일세력도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지원병제도를 실시할 것을 요청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936년 11월 경성 부민관에서 지원병제도발기준비위원회 간담회를 열고 한규복, 조병상, 신태악, 김성욱, 성원경, 박희도, 이성환, 남궁영 등을 상무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들 상무위원들은 1937년 1월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지원병제도 실시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을 한 달 앞둔 1937년 6월 일본 육군성이 조선군에 이 문제에 대한 의견서 제출을 요구했다. 조선군사령부는 같은 해 7월 2일자 극비문서로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조선군은 “조선인에게 황국의식을 확실히 갖게 하고 또 장래 병역문제 해결을 위한 시험적 제도로서 조선인 장정을 지원에 의하여 현역에 복무시키는 제도를 창정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마침내 1937년 7월 7일 만주에서 일어난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남차랑 총독은 8월 5일 조선군 참모 및 총독부 국장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조선인에 지원병제’를 ‘최단시한 내’에 실시하기로 했다. 같은 시기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의장에게도 징병령과 지원병제도를 조선에 실시해 달라는 청원서가 조선인 유지들 명의로 제출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37년 8월 ‘조선인 지원병제도 실시 요항’을 만들고, 학무국에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른바 ‘국민교육에 대한 방책’을 마련했다. 왜냐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황민화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적지 않은 청년과 학생들이 지원병에 지원했는데, 평택에서는 1940년 2월 당시 지원병 신청자가 3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지원병 상황을 신문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을 볼 수 있다. 시국하 피 끓는 용사들은 애국정신에 넘치는 가슴을 안고 금년도 즉 1940년도 조선특별육군지원병 모집에 지원한 용사가 339명이나 된다고 한 바, 각 읍면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평택읍 67명, 송탄면 54명, 북면 44명, 포승면 34명, 고덕면 31명, 오성면 26명, 팽성면 21명, 서탄면 20명, 청북면 20명으로 평택의 각 지역에서 참여하였다. 이들 중 몇 명이 지원병으로 입대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이해 3월 평택군에서 70명의 지원자 중 38명이 합격하여 일본군으로 중일전쟁에 참여한 사실이 있다.

1930년대 이후 전개된 전시체제기는 부일과 수탈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부일과 수탈은 평택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였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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