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과정에 중앙의 좌익과 우익 세력 갈등과 조직들이 평택지역에도 재연

징용자·군수물자·친일파·일본인 재산(赤産)문제 등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송진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이 중심이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국내의 민족역량을 중심으로

국외의 제반 단체를 망라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국민주당은 중국 중경(重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환영하여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에서 해방되자 정쟁시작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전쟁은 1943년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은 막바지까지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종전은 다가왔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해방의 희망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943년 11월 27일 루스벨트(미국), 처칠(영국), 장개석(중국) 등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종전에 관련된 회담(카이로회담)을 했다. 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군사행동을 협의하고 일본의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 독립케 할 것도 결의한 카이로선언(1943년 12월 1일)이 발표되었다. 이어 얄타회담(1945월 2월 4∼11일)에서는 상호협조에 의한 전후의 세계문제 처리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을 결정했다. 그 해 5월 독일이 항복하자 포츠담회담(7월 26일)을 개최했다. 이 회담에서 미·영·중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통보했다. 그럼에도 일본이 저항하자 연합군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이에 따라 조선반도는 1945년 8월 15일 법률적으로 식민지가 된지 36년만에 해방되었다.

▲ 1945년 11월 해방 직후 개최된 청년대회 기념사진 <사진제공 박성복>

이와 같은 국제상황이 급변하고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국내에서는 정치세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정치 주도권 장악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와 송진우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이 중심이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국내의 민족역량을 중심으로 국외의 제반 단체를 망라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국민주당은 중국 중경(重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환영하여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지만 끊임없는 정쟁으로 이어졌다. 정쟁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징용 물자 귀환 적산 토지 등 새로운 갈등 시작

평택은 일본 해군 시설대(현재 K-6기지)가 있었던 특수지역이었다. 당시 징용으로 끌려와 근무했던 근로자들이 꽤 있었다. 해군 시설대는 군수품이 산적해 있는 보급기지였고, 평택역 구내 창고에도 군수품이 가득하였다. 풀려난 징용근로자와 인근 주민들은 군수품을 탈취하기 위하여 기지를 습격하였고, 이것을 막으려는 경비대의 충돌로 평택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게다가 징용으로 끌려갔다 귀환하는 사람들로 평택은 그야말로 혼란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혼란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일본 군사시설 및 사업자를 보호해 준 덕택으로 거액의 사례금을 얻어내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고, 군수품을 절취하여 치부한 자도 생겨났다. 군수물자를 탈취하였다고 하여 곤욕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고, 빼앗긴 물품을 찾기 위하여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945년 10월경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친일파를 숙청하자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인신공격이 난무하였으며 일부 세력은 일본인 재산을 점유하는데 몰두했다. 또한 일제의 동원령에 의하여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사람들은 마구 보복하는 행위를 하기도 해 평택은 그야말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 평택JC 초청으로 학교를 방문해 모형비행기를 만들어 보이는 미군들(1955)

건준 인민위원회 등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우익)과 사회주의 계열(좌익)로 분화되었던 세력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정국 주도권 장악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평택은 1945년 해방 이후 좌익세력의 준동이 심했던 곳으로 유명했다. 해방으로 혼란에 빠진 평택의 치안유지는 ‘자치대’라는 단체가 맡았다. 자치대의 핵심인물은 해방 전 경방단 출신의 박종화와 이문영이었다. 이외에 건준 평택지부가 치안을 담당했다. 건준 평택지부 위원장은 이민항이었다. 평택지부는 얼마 되지 않아서 해산되었다. 이는 평택 출신의 안재홍이 건준에서 탈퇴한 이후 건준은 좌익 세력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좌우익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각지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는 평택 치안을 담당하는 한편 청년동맹과 여성동맹을 산하단체로 조직했다. 이들 단체는 치안유지, 적산관리, 친일파 숙청, 우익단체 억압, 신탁통치 지지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미군정 평택 치안책임자 파악스 상사는 국제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중립노선을 견지했다. 이에 평택지역은 좌익 세력들의 대두가 용이해졌고, 기세를 올렸다. 여기에 평택경찰서 사법주임 최문진이 좌익의 앞잡이가 되어 좌익 세력들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을 제공하였다.

최문진은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철도노조 및 전국산업체 총파업사건이 일어났을 때 평택경찰서 프락치사건을 일으킨 주모자였다. 당시 평택 사회를 경악케 한 이 사건으로 최문진은 평택지역 폭동에 무기를 은닉시키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좌익세력의 ‘토지무상분배’라는 감언이설에 일부 농민층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로 인해 평택지역은 좌익세력이 점차 세력화되었다.

다양한 우익단체들도 등장

해방 이후 혼란한 틈에 좌익세력이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자 우익세력도 점차 정치적 세력화를 도모했다. 우익세력들은 좌익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익단체를 조직하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거나 일제 강점기 공무원을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자본주의자로 매도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우익세력들은 치안유지 명목으로 1945년 10월 조선관에서 조선소년군 평택연대를 결성하였다.

평택연대는 17∼20세까지의 청소년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고 애향심을 배양하여 치안유지 협조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들은 좌익세력의 폭력에 맞서서 진압활동을 하였고 우익단체 활동에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조선소년군 평택연대는 1945년 12월 29일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우익세력들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가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별동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 해방 후 각종 정치집회가 열렸던 평택우시장 터(현 원평동 평택초등학교)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위해 서울에는 지휘본부, 지방에는 시·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평택군도 1946년 반탁군위원회가 조직되어 반탁시위를 주도했다. 이외에 적지 않은 우익단체들이 결성되었다. 1946년 2월 하순경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가 결성되어 각 읍·면과 부락지회까지 조직을 정비하였다.

1946년 2월 하순경에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평택지부가 결성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최준화가 맡았다. 핵심 임원들은 최병규·김명옥·이철훈·이덕경·차관영·조돈세·조정행·조성행·이재옥·유충의·김정학 등이었고 양재현은 경기도 연맹 조직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은 평택에서 대공별동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서북청년단원 오혁, 박영찬, 김광택, 이성삼, 김두찬 등 5명을 초청하여 특수임무를 수행케 했다.

또한 1946년 2월 하순경 대한독립촉성부인회 평택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평택지부는 대개 청장년층으로 각 읍·면 조직을 추진하면서 부녀자들의 독립사상 고취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성들 못지않게 좌익 부녀동맹과 대결하는 한편 청년 별동대원들의 급식을 뒷바라지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46년 8월에는 전국학생총연맹 평택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과격 학생들을 선도하는 한편 평택군내 학생상호간의 단결에 주력하였다. 대동청년단은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사령관을 역임한 지청천이 조직한 단체로, 1947년 9월 하순경 평택지부가 결성되었다. 평택군단부는 단원의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배속장교를 배속시켰다. 배속장교는 단원들에게 계획된 군사훈련과 민족주의 사상을 교육하였다. 이후 대동청년단 평택군단부는 좌익세력들을 제지하고 5·10선거의 안정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 밖에 우익단체는 민족청년당 평택군단부, 대한독립청년단 평택군단부, 호국군 평택중대, 대한청년단 평택군단부 등이 결성되었다. 정부는 대한청년단이 향토예비군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대통령령으로 정하여 청년방위대로 변경하였고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발전하였다. 대한청년단 간부단원은 단장의 심사를 거쳐서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에 입교하여 1개월간 군사훈련을 수료하였다. 수료한 간부는 예비역 소위로 임관시켜 청년방위대 각급 지휘관으로 배속시켰다. 청년방위대는 광복군편제를 모방하여 총사령부을 설치하고 각도에는 단(여단급)을 각군에는, 지대(연대급)를 각 읍·면에는 편대(대대급)를 두고 그 밑에 중대를 조직하였다. 평택군은 안성군을 합하여 제4지대가 있었는데 지대장은 차관영이 맡았다. 편대는 안성, 안중, 서정리 등 3군데 있었으며 대원은 대한청년단원 중에서 지원한 사람들을 선택하였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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