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비슷 비슷한 이야기들…화재,마약,연애,홍수,사기,교통사고,생활고 등

 

조선총독부가 전매제를 실시해

허가받은 사람들이면 아편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할 수 있었으며,

‘의료용’아편을 만들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로부터 흘러나온 아편은

중독자들을 양산했다.

세상 살다보면 다양한 ‘사건 사고’의 소식을 듣는다. 그 사건 사고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도 있다. 요즘에는 TV나 신문 등 대중매체를 통해 사건사고를 만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신문 또는 잡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신문은 사건사고를 전하는 가잔 중요한 매체였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평택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고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요즘도 추위가 매서운 한 겨울이면 화재가 적지 않다. 화재는 건물뿐만 아니라 인명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평택에서도 화재는 적지 않았다. 1922년 12월 31일 밤 11시 통복동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임명구의 집에서 갑자기 불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미처 꺼지지 않은 재를 변소에 내다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평택소방조와 진위청년회, 그리고 경관이 출동하여 진화를 하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방조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이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하여 설치, 운영해오던 중 일제강점기인 1915년 6월 23일 소방조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법규인 소방조규칙을 조선총독부령(제65호)으로 제정 시행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15년 12월 평안남도 경무부에서 소방조직규칙시행세칙을 제정하기 시작하여 황해도가 1931년에 마지막으로 제정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1938년 당시 소방조는 전국적으로 1,393개 조에 69,414명이었는데, 소방조는 일제가 황민화정책을 강화하면서 1939년 7월 경방단에 흡수되었고 경찰보조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평택소방조는 1922년 12월 31일 통복동에서 불이 난 4일 후인 1923년 1월 4일 평택역 앞에서 출범식을 가졌다. 이후 평택소방조는 평택지역의 화재를 진압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평택의 대화재는 1927년 2월 7일에 있었다. 이날 오후 4시반경 합정리 김학보의 집에서 불이나 이웃집 유병정, 송석필의 집까지 타버렸다. 한 겨울에 거처할 곳이 없자 진위청년회 간부와 지역 유지의 후원으로 무사히 추위를 넘길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28년 2월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평택리에서도 큰불이 나서 7천여 원의 손해를 입기도 하였다.

화재는 해마다 일어났는데, 1929년 3월에는 평택리 한 중국인이 경영하는 주철공장 창고에서 불이 났으며, 진위청년회관에서도 불이나 전소되기도 하였다. 가장 큰 화재는 1933년 9월에 있었다. 당시 화재는 겨울도 아닌 한 여름인 9월 26일에 일어났다. 평택역 근처 가납여관(加納旅館) 뒤에서 발화하여 가옥 7채를 태워버렸다. 이 불은 걸인의 실화로 일어났고, 피해액은 1만5천원, 소방원 3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1934년 11월에는 3일간 5번의 연속된 방화로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미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아편 등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심심찮게 신문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평택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약과 관련된 기사가 없지 않았다. 1923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평택에는 모르핀(아편의 일종) 중독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이에 경관의 단속이 강화되었는데, 모 병원에는 매일 중독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경관의 단속에 대해 분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들어왔다는 아편은 일제강점기 들어 점점 확산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전매제를 실시해 허가받은 사람들이면 아편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할 수 있었으며, '의료용' 아편을 만들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로부터 흘러나온 아편은 중독자들을 양산했다.

한 마을의 50여 명이 무더기로 중독돼 아침저녁으로 한 집에 모여 주사를 맞는 일도 있었고, 마약 단속을 맡은 일본인 경찰 간부가 아편을 흡입하다 붙잡히기까지 했다. 1930년에는 전국의 아편 중독자가 2만 명에 이르자 <조선일보> 는 "추악한 인간 세상의 암흑면"이라고 개탄한 바 있다. 이처럼 아편이 흔하다 보니 가정에서 질병 치료에 함부로 쓰다가 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경관의 단속에 분개한 것도 이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1926년 9월에도 아편 중독자가 여전히 늘어나자 평택청년회와 평택소년회가 긴급회의를 갖고 ‘아편중독자 박멸결의문’을 수백 매 인쇄하여 시내 주요한 곳에서 배포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8월에는 팽성면 객사리에서 건장한 사람이 아편 주사를 맞고 술을 마셨다가 즉사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1925년에도 큰 비가 내려

안성천이 범람하여 평택교 부근의

논밭이 잠겼으며, 천안 가는 도로가

물에 잠겨 한동안 차량 운행이 두절되었다.

당시 홍수로 평택리, 군문리, 통복리, 합정리,

유천리가 물에 잠겨 2백여 호가 침수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택과 둔포를 잇는 도로는

유실되었으며, 평택과 안성을 잇는

전신주가 곳곳에서 파괴되기도 하였다.

 

연애사건도 없지 않았다. 요즘도 각종 언론에서 수없이 전해지는 뉴스 중에 연애사건이 화제(話題)를 일으키고 있다. 1924년 6월, 평택역 앞에 다전창웅(多田昌雄)이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딸 다전정지(多田靜枝)는 19살이었는데, 같은 마을 김진봉을 사랑하였다. 그런데 다전정지의 아버지는 김진봉과의 연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인과 약혼을 시키고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다전정지는 마음에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여 독약과 칼로 죽음을 택하였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야반도주 하였다가 전의에서 붙잡힌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폭우나 호우로 인한 자연재해였다. 1920년 7월 중부지방에 큰 비가 내렸는데, 경기도가 크게 피해를 입었다. 평택은 안성천이 범람하여 시가지가 진흙탕 물에 잠겼으며, 인명 피해도 일어났다. 1925년에도 큰 비가 내려 안성천이 범람하여 평택교 부근의 논밭이 잠겼으며, 천안 가는 도로가 물에 잠겨 한동안 차량 운행이 두절되었다. 당시 홍수로 평택리, 군문리, 통복리, 합정리, 유천리가 물에 잠겨 2백여 호가 침수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택과 둔포를 잇는 도로는 유실되었으며, 평택과 안성을 잇는 전신주가 곳곳에서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홍수 피해로 인해 동아일보 평택지국장 유창근 등은 시민대회를 열고 제방을 수축하자고 결의한 후 군청에 이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제방 수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듬해 1926년 장마에 또다시 안성천이 범람하여 논밭 6백여 정보가 침수되었고 도로와 다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위천과 안성천의 범람과 조수로 인해 평택평야뿐만 아니라 시가지, 농가의 피해가 막심함에 따라 1932년에도 지역유지들이 기성회를 조직하고 실행위원 8명이 총독부와 경기도를 방문하여 양 하천의 개수를 진정하였다.

이외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1932년에는 평택에 술집만 늘어간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택은 5백여 호에 불과한데 색주가가 20여 호에 작부가 30여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일반은 죽네 사네하고 헤매는 때이지만 술집만은 밤마다 만원이다. 당시 평택에는 술집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33년에는 위조지폐사건도 있었다. 평택시장에 1원짜리 위조지폐 여러 장이 돌아다니는 일이 있자 시민들은 골머리를 앓았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선 1925년에도 위조지폐범 5명이 일망타진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1922년부터 지폐를 위조하기로 계획하고 1924년 7월 일본 지폐 50전짜리 수백 장을 위조하였다.

교통사고도 종종 언론에 게재되었다. 1926년 11월 제천 사는 한 여인이 친정인 진위 갈곶리를 가려고 평택역에서 내리다가 열차가 교차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927년 6월 말경 노량진에 사는 아들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서 아들집에 들렸다가 돌아오던 중 여비가 없자 무임승차를 하고 평택역 근처에서 뛰어내리다가 중상을 입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1930년대 들어 생활고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3년 동안 일을 해오던 청년이 직장에서 쫓겨나자 생활고를 비관하다 자살하였다.

열차와 화물차가 충돌하는 사건도 있었다. 1936년 1월 7일 서정리와 평택 사이에서 히까리 열차가 지나갈 즈음에 화물차와 충돌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화물차는 완전히 파손되었으며, 기관차도 일부 파손되어 38분 연착하게 되었다. 1940년 2월 11일 평택역 구내에서 봉천행 열차와 화물차와 충돌하는 사건도 있었다. 철도뿐만 아니라 도로 교통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34년 1월 평택에서 안중으로 가던 자동차가 신리에서 손님을 내리고 옆에 있던 7세 아이를 치어 죽게 한 후 도주하였다. 이로 인해 일대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건은 시내에서 일 대 활극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4년 9월 1일 새벽 2시경 평택경찰서에서 별안간 사이렌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강도가 평택으로 잠입하였던 것이다. 형사들이 출동하여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였는데, 양복을 입은 한 중년이 검문을 당하던 중 손을 뿌리치고 도망하여 평택금융조합 앞 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연못이 크고 어두워서 강도는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강도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독립운동가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평택은 예로부터 숭어(秀魚)가 유명하였다. 이에 숭어잡이가 유행하였지만 사고도 많았다. 1928년 6월 15일 오전 1시경 서면 북방에 있는 안성천 하류에서 어부 9명이 숭어잡이를 하다가 별안간 밀려드는 조수에 휩쓸려 3명이 익사하고 6명이 겨우 목숨을 구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사건 사고는 늘 있었다. 역사나 기록은 승자 또는 좋은 것만 기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상사에서는 다양한 역사나 기록의 소재가 있다. 사건사고의 소소한 기록도 평택과 함께 한 역사가 아닐까 한다.

청암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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