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사후퇴 당시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던 총검고지(180고지) 전적지

남하저지·철수와 재정비 시간 필요해 평택역 부근지역 폭격 당해

 

6·25전쟁으로 인한 평택의 참상은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만 있은 아니었다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

1951년 1·4후퇴 때에는

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들이

합정동 조개터 마을 일대에 불을 질렀다

일종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평택역과 원평동 일대 폭격하여 교통로 차단

1950년 7월 6일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평택역 일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은 다음날 유엔군 비행대대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날 오전부터 북한군이 평택을 점령한 후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는 교통로 차단이 중요했다. 당시 주요 교통로는 철도와 1번 국도였다. 서울과 천안을 잇는 1번 경부국도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특히 통복천을 잇는 다리는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했다. 6·25전쟁 초기 대부분의 전투는 도로를 따라 전개되었다.

폭격 명령이 떨어진 다음날인 7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소속의 B26편대가 평택 상공에 나타났다. 일단 유엔군 비행기가 나타나자 평택 시민들은 거리에 나가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유엔군 비행기가 북한군을 폭격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엔군 비행기는 북한군을 폭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길목을 폭격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평택역과 통복동 일대 상공을 몇 바퀴 돌다가 갑자기 평택역 철로를 비롯하여 당시 평택의 중심지였던 원평동과 평택동, 비전동 일대를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유엔군의 폭격으로 평택역과 원평동 일대는 잿더미로 변하였다. 유엔군 비행기가 폭격한 일대는 황폐화되었다. 이로 인해 원평동 방향으로 있던 평택역 주변은 이후 지금 형태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인한 평택의 참상은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만 있은 아니었다.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다. 1951년 1·4후퇴 때에는 영국군을 비롯한 유엔군들이 합정동 조개터 마을 일대에 불을 질렀다. 일종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청야전술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로,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이 청야전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에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수의 1차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활용되었다. 세계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나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활용하였다.

특히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 대표적인 원인이 바로 청야전술 때문이었다. 이 청야전술로 인해 6·25전쟁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평택에서도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들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굶어가며, 죽어가며 마산과 부산까지 걸어간 것도 이때였다. 뿐만 아니라 일부지역에서는 북한군 의용군으로 참여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송탄 180고지에서 치열한 전투

6·25전쟁 기간 동안 평택지역에서 큰 전투는 많지 않았다. 비교적 큰 전투가 1951년 2월 7일 송탄 180고지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전투였다. 이날 미 육군 25사단 27연대 E중대는 3백여 명의 중국군에 포위되었다. 이지 중대(Easy Company)로 불린 E중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약이 바닥났다. 설상가상으로 중국군의 대전차용 중화기에 공격을 당하지 중대장 루이스 밀렛(Lewis Millet) 대위는 병사들에게 총검을 소총에 착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육탄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격 명령을 받은 중대원들은 대전차포를 발사하는 중국군을 향해 질주하면서 총검으로 3명을 사살하였다. 밀렛 대위는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중대장의 용기에 힘을 얻은 미군 병사들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치열하게 공격하였다. 결국 중국군은 혼란 속에 흩어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밀렛 대위는 중상을 입었다. 이지 중대는 47명의 중국군을 사살하고 6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세웠다. 송탄 180고지에서 승리한 밀렛 대위는 훗날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지 중대가 승리한 180고지에 1951년 여름 미공군 오산기지가 자리잡게 되었고, 격전을 벌인 그곳을 총검고지라는 뜻으로 미군들은 ‘베니어닛 힐’(Bayonet Hill)이라고 불렸다.

197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비 평택에 세우다

 

평택시 용이동 산1-7번지에 세워진

남아공 참전비는

평택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국방부가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75년 9월 세운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합정동 일대의 유엔군 방화사건을 증언한 합정동 조개터 주민들(2010)

6·25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국은 16개국이다. 이들 참전국 중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비가 경부선을 지나다 보면 한 눈에 들어온다. 평택시 용이동 산1-7번지에 세워진 남아공 참전비는 평택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국방부가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75년 9월 세운 것이다. 참전비 앞에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사는 소과 동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상징하는 스프링복 동상이 서 있다. 그렇다면 남아공 참전군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자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고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대한군사지원에 관한 결의안이 절대다수에 의해 가결되자, 7월 1일 남아공은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대한 군사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남아공 정부는 8월 초 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국회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정부의 해외파병 결정을 합법화하기 위한 긴급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남아공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이태리 및 중공지구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날으는 표범’이라는 별명이 붙은 남아공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는 9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참전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1950년 11월 15일 전황이 혼미한 와중에 드디어 미 제6002비행단 본부로부터 장교 13명을 포함한 34명의 선발대를 편성하여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첫 작전명령을 받고 다음날 선발대는 다음날 미 공군 수송기편으로 존슨기지를 출발하여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했다.

남아공 전투비행단은 11월 19일 아침 무스탕기 4대로 편대를 구성하고 청천강 북쪽으로 출격하여 북한군 병력집결지와 야전보급소를 공격했고 22일 유엔군의 최종공세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평양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유엔군의 최종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 군우리로 출격하여 지상군을 근접 항공지원하고 신의주-신안주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적의 보급차량 대열을 폭격하였다.

특히 12월 20일 무려 20회를 출격하여 수안-사리원 지역에서 건물 57동, 트럭 15대, 철도시설 1곳을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남아공 전투비행단은 횡성비행장에서 1953년 1월 2일 오산기지로 이동하여 F-86기에 대한 조종훈련을 받았고, 3월 중순부터 F-86기로 작전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공 전투비행단은 6·25전쟁에 826명이 참전하여 전사 34명의 손실을 입었고, 휴전 후 1953년 9월 7일 항공기를 미 공군에 반납한 후 10월 29일 철수했다.

전투지역 유해 발굴 작업중

▲ 1951년 일사후퇴 당시 격전지였던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2012)

평택지역은 큰 전투는 없었지만 주로 미군이 북한군과 중국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곳이다. 특히 전쟁 초기 북한군과 1·4후퇴 과정에서 중국군을 막아낸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6·25전쟁은 당시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3년 7월 23일 휴전은 지금까지 분단이란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미군과 중국군의 유해발굴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 있다. 평택에서도 미군과 중국군의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 및 미군 스미스부대의 격전지였던 평택지역 무봉산과 불악산, 덕암산 일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이 지난해 5월 24일부터 시작됐다. 국방부와 육군 51사단은 이충동 이충분수공원 야외공연장 인근에서 개토식을 갖고 본격적인 유해 발굴사업에 들어갔다. 이날 개토식은 장광현 육군 51사단장과 김선기 평택시장, 송종수 국회의원, 이성준 수원보훈지청장, 평택지역 보훈단체장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으며, 국군 유해 발굴 감식단원은 7월 6일까지 무봉산과 불악산, 덕암산 일원에서 유해를 발굴하였다.

발굴지역인 무봉산과 불악산 일대는 6·25전쟁 발발 초기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군과 미군이 치열한 방어전투를 전개한 지역으로 최근 4개월 동안 전쟁사 연구와 참전용사, 지역 주민의 증언을 확보하고 현장답사와 지형정찰을 통해 발굴 가능성이 높은 곳이 선정되었다.

현장에서 발굴되는 유해는 임시 봉안소에 안치한 후 유품 확인과 유전자 감식을 거쳐 신원이 확인되면 국립묘지에 안장할 계획이며, 북한군이나 중국군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북한군 묘지에 안장하거나 북으로 송환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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