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이후 평택지역은 미군 영구주둔지로 변모

- 주둔과정 이후 별별 애환들 많아

한국 전쟁이 평택지역에 미친

결정적 영향은 미군기지의 건설이었다.

전쟁 도중에 평택지역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고, 이후 평택은

미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대규모 미군기지가 2개나 들어섰으니,

평택은 동두천, 의정부와 더불어

대표적인 기지촌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한국 전쟁과 평택

 

평택만큼 한국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구증가의 첫 번째 요인은 피난민들이다. 두 번째는 미군기지 건설이었다.

전쟁 발발 후 많은 피난민들이 유입되어 곳곳에 새로이 정착하면서 간석지와 황무지를 간척하고 개간하였다. 그들은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평택의 지형을 바꾸었다. 그러나 피난민들의 간척과 개간이 평택지역의 경제와 문화적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농촌에 정착한 피난민들은 어렵게나마 농업에 종사하며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평택지역에 미친 결정적 영향은 미군기지의 건설이었다. 전쟁 도중에 평택지역에 미군 기지가 들어섰고, 이후 평택은 미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대규모 미군기지가 2개나 들어섰으니, 평택은 동두천, 의정부와 더불어 대표적인 기지촌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 평택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부대찌개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안정리 주변과 송탄 지역에 상업과 서비스 업종들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미군 기지는 평택의 경제 및 사회,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캠프 험프리스(K-6)

▲ 캠프 험프리스(K-6) 미군기지 건설 광경(1952년경)

평택에 두 개의 미군기지가 들어선 데에는 일제 강점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제는 전시체제인 1942년 중국 본토 공격의 후방 보급기지를 안정리, 함정리, 대추리 일대에 건설하였다. 일본 해군 시설대(302부대)의 비행장과 격납고 등을 설치했던 것이 캠프 험프리스(K-6)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곳에 국내에서 차출된 2만여 명의 징용대와 펑택지역에서 차출된 근로보국대를 동원하여 길이 1700미터, 폭 50미터 규모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삽과 곡괭이, 우마차 등 원시적인 장비를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혹사를 당하였다. 이 비행장은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미군이 관리하였으나 군사기지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한 후에는 한국 해병대가 주둔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한창인 1951년 2월 5일 한국 정부는 안정리 기지를 미군에게 제공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구 대추리 일부, 서정자 등의 마을이 집단 이주를 당하였다. 미군은 1952년 활주로 길이를 2400미터로 늘였고, 이 기지에 K-6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K-6는 1961년 오산 상공에서 군사 훈련 중 헬리콥터 사고로 숨진 미 육군 기술 장교인 벤저민 K. 험프리스의 이름을 따 1962년부터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라고 하였다.

캠프 험프리스는 미8군사령부, 서울지역사령부, 제7병참사령부에 배속되었다가, 1964년 미8군에서 캠프 험프리스 지역사령부로 독립하였다. 1974년 19지원단의 발족으로 미 육군 수비대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 23지원단으로 지정되었다. 1996년 6월 미 육군 제3지역지원사령부로 출범하였고, 7월에는 미 육군 제6항공전투부대를 두었다. 현재 이 기지에는 5000명이 주둔하고 있으며, 그중 군인은 3500명이다.

오산 공군기지(Osan Air Base, K-55)

▲ 오산 에어베이스 활주로 공사 장면(1952년)

한국 전쟁 때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이용하여 주요 도로를 따라 남하하였기 때문에 1번 국도에 있는 평택지역도 전쟁에서 비켜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대표적인 전투는 1951년 2월 7일 미군 이지 중대(Easy Company)와 중국군 사이에 일어난 송탄 180고지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큰 승리를 거두고, 격전을 벌인 지역과 그 주변은 1951년 11월 한국의 전투지원단을 지원하는 공군부대 주둔지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넓게 농지가 발달한 야리, 적봉리, 신야리 일대로, 미국은 기지를 ‘오산리 AB(Osan-Ni AB)’로 이름 붙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는 하지만, 왜 이곳에 공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 설만 분분하다. 아마도 서울과의 거리 또는 휴전선 및 중국과의 거리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초 기지를 지원할 시설과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국방공채를 받기는 했으나 생활 근거지를 빼앗기고 집단 이주하거나 흩어졌다. 이들의 상당수는 지금의 장등리에 터를 잡고 살기도 했다. 1952년 7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두 달 반 만에 2740미터의 비행장 활주로가 완성되었다. 그 해 11월 미 공군기지가 본격적으로 운용되면서 원래 서탄면 적봉리에 있던 부대 정문을 현재 위치인 신장동으로 옮겼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에 이어 10월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듬해인 1954년 1월 항공전술본부가 재배치됨으로써 한국 내 미 공군의 주된 허브기지가 되었다. 또한 1956년 9월 기지의 공식 명칭이 ‘오산리 AB(Osan-Ni AB)’에서 ‘오산 AB(Osan AB)’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 시도와 이틀 뒤인 23일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1천여 명의 병력과 650만 파운드의 군수물자를 오산 기지에 증강 배치하였다. 이후 1971년 11월 군산비행장에 있었던 제3전술전투비행단의 36전술전투부대를 오산기지로 옮기고, 1974년 51비행단으로 재편하였다. 1993년 10월 1일 제51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기지에는 군인 5000명을 포함한 7000명이 주둔하고 있다. 태평양 공군 산하의 7공군사령부, 7공군 주력부대인 51전투비행단과 제5정찰단, 제31특수작전항공단, 제303정보단, 제631공수기동지원단, 제33구조단 등이 배치되어 있다.

 

미군기지 확장에 따르는 엇갈린 명암들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기지가 들어선 이후

미군이 일으켜왔던 강도, 강간 등

사회적 문제와 석유 유출, 오폐수로 인한

토양과 하천의 오염, 불법 쓰레기 매립 등

심각한 환경오염에 주목하였다.

1990년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1960~80년대까지 미군기지가 평택지역의 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 당시 이득을 경험했던 상공인들은 용산기지의 이전이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반대쪽에서는 오랜 생활 터전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기지촌이 들어선 이후 불거졌던 여러 가지 부작용들에 주목한 이들이 격렬히 반대를 하였다.

▲ 송탄 미군기지 정문 앞으로 조성된 쇼핑거리(2014년)

안정리와 송탄에 미군기지가 들어선 후 사람들과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미군부대는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곳이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미군부대의 종사원으로 취업하였고, 부대의 정문과 후문 쪽으로는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대 앞으로 유흥가가 형성되고 양복점, 세탁소, 사진관, 식당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한국 경제가 매우 취약했던 당시에 달러가 주는 위력은 대단하였다. 상대적으로 싼값이던 양복 등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미군의 씀씀이가 당시의 상인들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기지 종사원들에 의해 불법으로 빼내진 햄, 소시지, 치즈 등 식료품 중심의 미제 물건들은 죄다 돈이 되는 것들이었다. 송탄이 급격히 성장하여 1986년에 시(市)로 승격된 평택시보다 이른 1981년 송탄시로 승격된 것도 미군부대와 무관하지 않았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모여든 여성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술과 웃음을 팔았고 몸까지 팔았다. 1962년 283개소였던 캬바레가 1965년에는 588개소로 급증하였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송탄에 성매매로 등록된 여성은 전체 등록자의 10% 정도인 2500명이었다고 한다. 기지촌에 돈은 흘렀지만 삶의 질은 나아질게 없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1990년대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비중은 점차 줄어갔고, 평택항을 비롯하여 공단들이 들어서면서 점차 자생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경제력 비중은 점차 줄어들게 되고 미군기지가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도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들은 2016년 미군기지의 이전이 또다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킬 요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군기지의 확장으로 1차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농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와 서탄면 황구지리, 금각리와 신장동의 구장터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 이들은 미군과 정부를 상대로 오랜 반대투쟁을 전개하다 결국 집단으로 이주하고 말았다.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기지가 들어선 이후 미군이 일으켜왔던 강도, 강간 등 사회적 문제와 석유 유출, 오폐수로 인한 토양과 하천의 오염, 불법 쓰레기 매립 등 심각한 환경오염에 주목하였다. 실제로 1996년과 1999년에 건축폐기물을 불법으로 매립하였고, 2000년 1월과 7월 22일 송탄 미군기지에서 항공유가 하천으로 흘러들어 심각한 오염이 유발되기도 했다.

양측의 오랜 대립과 갈등 끝에 결국 2007년 2월 마지막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정부에서는 2004년 제정되었다가 2011년 일부 개정된 평택지원특별법에 의해 2018년까지 18조 8000억 원을 투입하여 지역개발과 대규모 국책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단기간의 투자로 인한 지역 개발이 장기적인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효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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