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난민정착사업으로 이주하여 개간·간척하며 정착

-자료정리나 연구 필요

전쟁은 근본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기는 악(惡)한 것

역사에 선(善)한 전쟁이 있고 악(惡)한 전쟁도 있다. 불의(不義)에 항거하여 싸우는 것은 선(善)이고, 탐욕(貪慾)이나 아집(我執)과 집착(執着)에 사로잡혀 싸우는 전쟁은 악(惡)하다.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이 악한 것은 제국주의자들이나 파시즘의 탐욕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 무장독립투쟁이 아름다운 것은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빼앗긴 조국과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戰爭)은 근본적으로 악(惡)하다. 전쟁만으로 많게는 수백 만, 수천 만 명의 인명이 살상되며, 경제기반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실종된다. 동족이나 형제끼리 싸웠을 경우에는 다시 치유되거나 융화될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수백 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며, 부모와 형제가 이별하고, 타의에 의해 고향을 등지고 평생 나그네 생활을 할 수도 있다.

▲ 연백사업장 피난민들에 의해 간척된 연백사업장들과 마장앞뜰(2005)

팽성읍은 남산3,4리와 신대2,3,4리,

함정2리, 석봉리, 대사2리, 안정6리 등에

난민정착사업소가 건설되었고,

서평택지역은 포승읍 원정6리, 홍원1리,

청북면 지역은 고잔6리, 삼계3리 일대,

고덕면은 문곡4리, 서탄면은 마두2리

그리고 평택시내에서는

합정동 돼박산과 비전2동 문화촌에

사업소가 건설되었다.

한국전쟁은 동족(同族) 간에 이념(理念)전쟁이다. 동족이 이념적 차이로 싸웠고 상처와 후유증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피해규모를 보면 전쟁이 얼마나 격렬하고 잔혹했는지 알 수 있다. 국군(國軍)은 전사, 부상, 실종, 포로를 포함하여 31만9759명이 죽거나 다쳤고, 연합군은 실종 및 포로 6944명을 포함하여 15만9583명의 손실이 있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피해는 더욱 커서 북한군의 경우 52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중공군은 약 90만 명의 손실을 봤다고 한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했다. 전쟁 중 사망하였거나 학살당한 민간인은 남한만 37만599명이나 되었고, 부상자는 22만9625명, 납치된 사람은 8만4532명, 행방불명은 30만3212명, 전쟁 피난민은 240만 명이 넘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죽거나 피란 중에 사망하여 홀몸이 된 전쟁미망인도 20만 명이 넘었으며, 전쟁고아만도 10만 명을 헤아렸다. 물적 피해는 더욱 심해서 민가(民家) 61만2000호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으며, 학교시설은 4023개 학교 1만5427동이 파괴되었다. 무엇보다 큰 피해는 남북한 민중들의 가슴에 새겨진 분단의 상처였다. 지금도 금강산에서 이뤄지고 있는 피눈물 나는 드라마는 한국전쟁과 분단이 만들어낸 또 다른 아픈 상처다.

▲ 팽성읍 신대2, 3리 주민들의 도두리들 간척광경(사진제공:박성복)

평택 피난민수용소들

현재 평택지역에는

한국전쟁 피난민에 대한 통계자료나

인터뷰 자료가 거의 없다.

전쟁피난민 연구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택지역에 정착한

피난민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정착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평택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휴전을 전후하여 남한사회는 전쟁피해복구와 식량난 해결, 수백만 명의 전쟁피난민 문제해결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전쟁 중에는 UN한국재건단과 미국의 국제원조처, 한국민간구호단체 등을 중심으로 국제적 지원이 이뤄지는 가운데, 제1공화국 정부 산하에 중앙구호위원회가, 각 지방에는 지방구호위원회가 조직되어 피난민을 구호하였다. 남북분단이 확실시되던 1952년 3월부터는 한미합동으로 난민정착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난민정착사업은 피난민을 동원 10개년 동안 농지를 개간하고 난민들의 경제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평택지역에도 많은 전쟁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평택지역은 두 개의 미군기지가 있었고 광활한 간석지와 황무지가 많아서 피난민 정착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평택지역으로 들어온 전쟁 피난민들은 대부분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지역 출신이 많았다. 난민정착촌은 간석지와 황무지가 많던 서평택과 팽성읍, 서탄면, 고덕면, 청북면에 건설되었다. 팽성읍은 남산3,4리와 신대2,3,4리, 함정2리, 석봉리, 대사2리, 안정6리 등에 난민정착사업소가 건설되었고, 서평택지역은 포승읍 원정6리, 홍원1리, 청북면 지역은 고잔6리, 삼계3리 일대, 고덕면은 문곡4리, 서탄면은 마두2리 그리고 평택시내에서는 합정동 돼박산과 비전2동 문화촌에 사업소가 건설되었다.

▲ 포승읍 원정6리 피난민들이 간척한 화성염전들(2012)

신장동과 서정동 신흥마을(황해도촌)과 복창동 일대, 팽성읍 안정리, 두정2리, 본정2리는 난민정착사업소가 설치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들 다수가 거주하던 지역도 있었다. 이들은 미군기지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했고 기지촌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간척(干拓)에 참여한 난민들은 사업소를 조직한 뒤 UN한국재건단이나 기독교민간구호단체로부터 구호식량을 지급받으며 간척을 진행하였다. 사업 중에는 현물로 급료를 지급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완료되면 일정 면적의 토지를 분급 받을 수 있었다.

경제재건과 난민정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시작된 난민정착사업은 실행과정에 비리도 많았다. 충남 서산군 근흥정착사업소는 1964년 정부로부터 7200 포대의 사업용 옥수수를 배정받아 간척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소장으로 있던 심 씨가 현물지급 규정을 어기고 양곡을 모두 시장에 매도한 뒤 난민들에게는 현금으로 하루 1~2백 원의 낮은 임금만 지급하여 문제가 되었다. 충남 아산(온양)에서는 정착사업소 간부들이 입주자와 세대 수를 속여 배급물자를 지급받은 뒤 사욕을 채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간척사업에 성공하여 토지를 분급 받은 뒤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본래 개간농지는 보건사회부나 도(道)의 지시를 받아 각 읍(邑)·면(面)에서 제공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국·공유지인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팽성읍 신대리의 경우처럼 권력의 압력으로 사전승낙이나 기부와 같은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간한 사유지에서는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다.

다른 수 없어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던 피난민들의 삶

휴전 초기 난민정착촌에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정부 양곡으로 끼니는 때웠지만 토막집에 살다보니 전염병이나 각종 질병에 취약하였다. 간척이 성공한 뒤에도 곧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피난민은 가난하고 더럽다는 생각에 토착민들의 괄시와 차별도 많이 받았다. 피난민들의 정착과정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청북면 고잔6리는 황해도 옹진·장연·송화지역 피난민촌이다. 이 마을은 5·16군사정변을 기념하여‘혁명촌’이 되었다. 혁명촌과 삼계리 신영촌이 형성된 것은 1956년이다. 당시 고잔리에는 고잔난민정착사업소, 삼계리에는 삼계난민정착사업소가 설치되어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정부에서는 임시 거처로 천막을 쳐주고 구호물품인 옥수수가루(강냉이)와 밀가루를 배급해 삼계사업장들과 고잔사업장들을 간척하였다. 간척 후 고잔사업장들은 염전(鹽田)으로 운영되었고 삼계사업장들은 벼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염전은 1972년 태풍 베티의 영향으로 폐허가 되었고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74년 남양만방조제가 준공된 뒤 재 개간되어 경작지로 바뀌었다.

▲ 황해도 연백피난민들 정착촌 홍원1리 외원마을(2005)

고 씨(81세, 1934년 생)는 옹진군 서면이 고향이다. 1·4후퇴 때 인민군이 다시 내려오면 다 죽인다는 소문에 아버지와 둘이서 피난을 나왔다. 피난 초기 제1공화국 정부는 피난민들을 지역별로 할당해 분배하였다. 고 씨 부자(父子)는 전라도 장흥으로 보내졌다가 그래도 고향 가까운 곳에서 살겠다며 옹진반도 아래의 작은 섬으로 이주했으나, 휴전 뒤에는 군사분계선 안쪽에 들어가게 돼 전북 부안으로 재이주 당했다. 청북면 고잔리에는 난민정착사업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듣고 1956년에 정착하였다. 피난민들은 파도와 싸워가며 고잔6리 앞 갯벌을 지게와 삽으로만 간척하여 55정보의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간척의 대가로 1호(戶)에 3500평 내외를 분급 받아 농사를 지으며 지금껏 살아왔다.

포승읍 홍원리에서 청북면 옥길리 사이 연백사업장들을 간척한 것도 피난민들이었다. 본래 이곳은 일제 강점기 초에 일본인이 간척하려다 실패하였고, 일제 말에는 안중읍 덕우리 이강세 씨가 재 간척에 실패하였던 것을 5·16군사정변 뒤 황해도 연백 피난민들이 성공하였다. 간척에 성공하면서 분배받은 토지는 약 1정보 내외였다. 팽성읍 함정2리 피난민들은 1인당 300평씩 분배받기도 하였다.

현재 평택지역에는 한국전쟁 피난민에 대한 통계자료나 인터뷰 자료가 거의 없다. 전쟁피난민 연구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택지역에 정착한 피난민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정착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평택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주민들에 의한 저습지 개간은 1990년대 이전까지 평택지역 발전사의 핵심 키워드였으며 그 가운데 피난민정착사업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제 피난민 1세대들도 대부분 고령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시점이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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