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살아보세’하며 농촌농업을 ‘근대화(?)’시켰지만

…정신없이 자본주의·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린 40년 산업화 과정

새마을운동의 뿌리는 일제 농촌진흥운동

“자조하는 마을은 빨리 발전하지만 그렇지 못한 마을은 5천 년이 지나도 가난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이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70년 4월 22일 가뭄대책을 위한 지방장관회의가 열렸다. 단상에 오른 대통령 박정희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였다. 사전에 깊숙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에는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새마을 예시사업을 실시하라며 시멘트 335포대를 균일하게 지원하였다. 335포의 시멘트로 마을진입로 만들기, 소하천살리기와 소류지정비, 공동우물과 공동빨래터 만들기, 퇴비장 설치 등을 하라는 대략적인 지시는 있었지만 구체성은 떨어졌다.

이듬해 정부는 새마을사업에 성공한 마을을 선별하여 2차 지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1972년에는 1차 사업에 성과를 낸 1만6600여 개 마을을 선정,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씩 지원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뛰어난 지도자의 발굴에 있다는 판단 하에 성공사례를 발굴하고 대통령 앞에서 직접 발표하게 한 뒤 사례집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초기에 발굴된 새마을지도자 8명에게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칭호와 함께 산업훈장이 수여되었고 당시에는 쉽지 않았던 일본과 대만 해외시찰까지 시켜주었다.

농촌근대화운동은 1970년대에 처음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는 1932년부터 이른 바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식량생산의 충실, 춘궁(春窮)의 근절, 현금수지의 균형과 농가부채 정리 등을 목표로 내세웠던 일종의 농촌근대화운동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 중견인물 양성, 근로정신의 발양, 여성노동의 장려, 생활양식 개선, 부업장려, 소비절약 및 고리대정리와 같은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1958년에서 1961년 사이에 개최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서도 ‘지역사회개발사업’이라는 명칭의 농촌근대화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농촌사회 안정을 통해 미국의 경제원조 부담을 줄이고 국가가 지향하는 정책에 부합하는 농촌사회를 건설하여 반공체제를 굳건히 하려는 정책이었다. 1966년에는 ‘부락민자조개발 6개년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부락민의 힘으로 농촌의 자력갱생을 도모한다는 취지였고, 균형발전을 위해 전국 3만3000여 개 마을에서 동시에 실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국가의 자본과 기술지원 미비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농촌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실력양성운동과 생활개선운동, 농민조합운동의 경험, 농촌마을에 존재했던 대동계와 연반계, 청년회 같은 자치조직, 해방 후의 4H운동, 이동협동조합운동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농촌근대화운동은 시기와 목적은 조금씩 달랐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꾸준히 추진되었던 농촌 내 자조·자립적 근대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한 근면(勤勉)·자조(自助)·협동(協同)이라는 구호

 

매일 아침마다 동네 스피커를 통해

‘잘 살아보세’에 이어 ‘새마을 노래’가

방송되고 나면 컬컬한 목소리의 이장과

새마을지도자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정부 지원으로

신축된 새마을회관 담벼락에는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새마을운동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 농촌진흥운동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업적 아이디어는 1969년 8월 4일 경북 청도군 신도1리 수해복구사업에서 얻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수해복구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했는데, 신도1리가 다른 마을과는 다르게 김봉영이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근대화사업을 실시하여 마을길이 넓게 확장되었고 지붕과 담장이 개량되었으며 소득증대가 이뤄져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점에 놀랐다. 이것을 이듬 해 가뭄대책을 위한 지방장관 회의에서 말하게 되었고 농민들의 적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새마을운동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국책사업이 국가 지도자의 한 순간의 감동과 판단으로 수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연구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김영미는 새마을운동의 원인을 1960년대 경제개발에서 찾는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도시와 농촌 사이의 소득격차를 가져왔고, 이것이 제3공화국이 표방한 조국근대화의 걸림돌이 되자 농촌중심의 근대화전략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어째든 제3공화국의 새마을운동은 ‘근대화’를 통해 잘살고 싶어 하는 농민들의 욕망과 맞아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내무부 주관으로 전국 읍·면장들에게 새마을 가꾸기 교육을 실시하였고, ‘새마을지도자’ 발굴에 앞장섰으며, 농민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정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동네 스피커를 통해 ‘잘 살아보세’에 이어 ‘새마을 노래’가 방송되고 나면 컬컬한 목소리의 이장과 새마을지도자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정부 지원으로 신축된 새마을회관 담벼락에는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주민들은 초록색 새마을 모자를 쓰고 경쟁적으로 부역에 나서서 마을길을 넓혔고, 일부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가지붕이나 기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나 양철지붕이 올려졌다. 멀쩡하던 돌담을 헐어버리고 벽돌담이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으며 새마을주택도 건설되었다. 소득증대사업으로 퇴비증산과, 통일벼를 비롯한 다수확 품종재배, 논보리재배가 추진되었고, 각종 작목반이 마을마다 조직되었다. 부녀자들, 청년들, 아이들도 꽃길 가꾸기나 마을길 청소 등을 추진하였다. 공무원들은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각 마을마다 뛰어다니며 지도 독려를 하였다.

말이 지도 독려이지 때론 성과를 내기 위해 억지로 초가지붕을 걷어내다가 주민들과 싸우고, 농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못자리에 심어 놓은 추청벼를 뽑아내기도 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전통민속문화를 없애는 데도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전통적 삶과 문화는 근대화에 저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전국 곳곳에는 정부가 바라는 형태의 ‘새마을’이 건설되었다.

▲ 오성면길음리 내탑마을 옛 공판장 건물(2007)

새마을운동으로 정말 잘 살게 되었을까?

 

실제로 많은 마을들이 정부의 시책에

발맞추어 새마을사업을 실시한 결과

주택이 개량되고 마을길이 넓혀져서

땔감확보가 수월해지고 농기계가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전기가설,

간이상수도 설치, 화장실이나

하수구 설치와 같은 숙원사업 달성으로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심이었던 칠원1동(2008)

평택지역은 새마을사업의 성공지역으로 꼽힌다. 평택시 칠원1동, 현덕면 신왕리를 비롯하여 새마을사업 시범마을도 여럿이었고 새마을훈장을 받은 인사들도 칠원1동의 고(故) 김기호 씨를 비롯하여 6명이나 된다. 칠원1동의 경우는 새마을운동 전국 시범마을로 지정되어 나카소네 일본수상을 비롯하여 해외 시찰단들의 단골 답사코스가 되었다.

▲ 새마을운동 당시에 건립된 오성면 당거리 탑고개 옛 새마을 회관-창조, 기술개발이란 구호가 선명하다(2005)

평택지역에서 새마을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마을들은 대체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거나 피난민촌, 간척지 등 변화와 발전에 대한 욕구가 컸던 마을이었다. 실제로 많은 마을들이 정부의 시책에 발맞추어 새마을사업을 실시한 결과 주택이 개량되고 마을길이 넓혀져서 땔감확보가 수월해지고 농기계가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전기가설, 간이상수도 설치, 화장실이나 하수구 설치와 같은 숙원사업 달성으로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 자조 자립 협동이라는 구호가 선명한 송북동 우곡마을 새마을공동창고(2013)

1974년 이후 추진된 공동퇴비사와 마을창고 설치, 공동축사 신축, 보(洑) 설치, 소교량 건설, 마을길 넓히기, 마을회관 신축, 공동우물과 빨래터 설치, 간이상수도 설치, 메탄가스 시설 설치는 삶의 환경을 바꿔 놓았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소득증대와 문화, 복지시설 확충에 역점을 둔 사업들이 추진되어 축산업과 특용작물재배가 발달하고, 새마을공장 유치, 취락구조 개선, 새마을금고나 새마을문고가 설치되면서 생산력과 주민복지가 향상되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40년도 더 지난 오늘 필자는 감히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근대화되었고 잘 살게 되었는지’ 묻고 싶다. 1970년대 이후 이촌향도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농촌이 황폐화되는 이유가 단지 도시화와 공업화의 영향 때문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근대화되고 잘 사는 농촌이 되었다면 소신껏 농촌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 농촌마을에서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필자는 오늘도 1970년대 각광을 받았던 새마을운동 시범마을을 지나가 본다. 단란했던 농촌마을의 온기는 간데없고 경관도 크게 변해서 옛 풍광을 추억할 수조차 없는 건조한 마을에서 ‘농촌근대화’란 단어를 다시 곱씹는다.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한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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