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4-① 미군 위안부의 역사 _ 국내 기지촌과 미군아내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의 '미군 위안부의 역사'를 싣는다.

 

 

양색시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달러의 양이 많았고

우리 누이들의 몸값으로 지불된 돈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

                        한인 미군아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분단시기
                        가난‧소외‧천시‧자기검열 등을 어깨에 지고 살았다

 

[평택시민신문]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가난으로 생긴 상처는 그 규모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그 상처와 흔적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운 개인, 가족은 없다. 더욱이 ‘미군 위안부’(그리고 그 가족)은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발효되자 미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대개 경기도 북부지역과 평택인근 지역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지역사회의 경관과 문화가 변화되었고, 무엇보다도 미군의 범죄가 증가했다. 한국전쟁 동안에 이 땅에 주둔한 16개국의 해외 군인들은 1953년부터 1957년까지에 대부분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인원 190만 명이 참전했던 미군은 계속 이 땅에 남았다. 미군기지가 있는 곳에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부대 밖의 한국인과 부대 안의 한국인 종업원들이 미군들과 공존하면서 많은 부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한미협정이 조속히 체결되어야 한다는 거국적 여론은 이미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동의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혁명 이후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연맹(5.16 이후에 외기노조로 명칭 변경)은 ‘노무협정’을 포함한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요구하는 100만 명 가두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 9월 20일 서울에서 통행인들과 관공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약 5000여명의 찬성을 받았고, 미군이 주둔해 있는 인천, 부산, 파주, 의정부, 부평 등 지역으로 서명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5.16혁명으로 운동이 더 발전하지는 못했다. 결국 이른바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는 대한민국에서의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협정으로 1953년 10월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1966년 7월 9일 체결되었다.

 

1. 대한민국 기지촌의 역사와 현황

1945년 부평에 첫 기지촌 탄생

60~70년대 기지촌 상권 황금기

닉슨독트린 이후부터는 쇠퇴

이 땅에 생긴 첫 기지촌은 경기도 부평이었다. 부평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주둔해 있던 곳으로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가을부터 기지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신문이 1979년 6월에 발간한 <주한미군30년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인천에서 서울 쪽으로 십사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부평. 부평이 미군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45년 9월 8일 주한미군사의 첫 장이 열리면서부터였다. 이곳은 한국에 배치되는 모든 미군정 요원들이 주둔에 앞서 한국 실정을 배우는 교육 장소로 활용되었고 신병 보충대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미군정시기에 시작된 부평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2년 미군군수지원사령부가 100만평 규모로 들어서면서 기지촌으로 더 활성화되었다. 이른바 기지촌은 여자 곧 양색시를 구심점으로 해서 구색이 갖추어진다. 술집, 외제물품 장수, 암달러 장수, 포주, 펨프가 그 구심점이 되고 그 외곽으로 세탁소, 미장원, 양복점, 양품점, 사진관, 기념품관 초상화점 당구장 오피스라고 불리는 국제결혼의 중개업이 생긴다. 구심점 외곽의 원은 구심점이 되는 첫째 원이 그려진 뒤에 생긴다.

부평과 같은 무렵에 부산 서면에도 기지촌이 생겼다. 부평과 부산이 후방이었다면 서울 북쪽의 전방 지대인 파주, 포천 등 휴전 이후 기지촌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기도 파주 용주골, 문산읍 선유4리 등에 기지촌이 생기고 1955년부터 활성화되었다. 파주보다는 안정이 좀 더 빨랐던 포천 동두천도 리틀 시카고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기지촌이 생겨났다. 포천 운천리에도 기지촌이 생겼다.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는 용산의 미 8군부대를 에워싼 후암동과 이태원동에 서울 남쪽에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와 안정리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그 밖에도 대구, 군산, 진해를 포함한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기지촌이 생겨 주둔 부대와 운명을 같이 했다. 1979년 서울신문이 펴낸 <주한미군 30년사>에 의하면 1955년부터 형성된 기지촌들은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걸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황금기를 누렸다. 1960년대 중반 동두천 한 곳에 모인 양색시의 수효만해도 7000명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양색시의 수효는 그대로 기지촌의 경기 상태를 말해준다. 양색시의 수효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달러의 양이 많았고 우리 누이들이 몸값(정조)으로 지불한 돈이 많았으며 그와 더불어 미군물자의 유통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중반 양색시들이 받은 몸값의 평균은 하룻밤을 함께 자는데 20달러, 잠깐 시간 ‘숏타임’을 즐기는데 5달러였다. 동거 생활은 한 달에 200~300달러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0년과 1971년부터 기지촌이 변화되었다. 1969년 7월 25일에 발표되었던 닉슨대통령의 괌 독트린으로 주한미군이 철수를 시작했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70년 11월 15일 경기도 포천군 운천에 있던 미 제7사단 제1연대 사령부가 캠프 카이저라고 불렸던 부대 자리를 한국군에게 넘기면서 가시화되었다. 주한미군의 철수는 1971년 문산에 있던 미제2사단 사령부가 동두천의 미 제7사단 자리로 이동하고 제 7사단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휴전 뒤 미군의 수효가 대략 6만4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그 삼분의 일이 미국으로 돌아 간 것이다. 1969년까지 3000명이 훨씬 넘는 양색시와 33개의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이 있던 운천은 하루아침에 빈터가 되었다. 1977년 9월 주한미군의 수는 4만491명이라고 미국방부가 발표했다. 1978년 3400명의 미군이 더 돌아갔다. 1979년 하반기 주한미군의 수효는 3만8000명쯤 추산된다. 그 후로도 기지촌으로 유지되는 곳은 경기도 평택, 동두천, 전북 군산, 경북 왜관정도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3만7000여명 수준이던 미군이 2004년 5000명, 2005년~2006년 5000명 등 1만여 명이 감소하여 2만7000여명 수준으로 추정되고 2007년~2008년에 2500명이 추가 감축하여 2만5000여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평택의 경우’ 같은 군에 소속된 송탄읍 신장리일대와 팽성면 안정리 일대에 기지촌이 형성되어 있다. 송탄읍 신장리는 아직도 기지촌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송탄읍과 석탄면에 걸쳐 180여만 평이나 되는 땅위에 미공군기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산비행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1952년부터 미공군이 자리잡았다. 육군과 달리 부대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직도 미 3800여명쯤과 그 군속 및 그들의 가족 3000명쯤에 직‧간접적으로 엮인 주민 8만여 명이 함께 경제를 공유하고 있다.

 

2. 미군아내(military bride)라는 사회적 기호

미군아내의 미국이민 이후 가족초청
… 미국 거대 한인사회의 출현 배경

한국에서나 미군 한인사회에서나
기피대상이자 수치의 존재로 낙인

양색시들은 미군을 만나 동거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미군과 정식으로 혼인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애쓴다. 양색시를 양갈보라 부르며 뜯어 먹기만 하는 한국 남자일망정 그래도 그들과 결혼하는 꿈을 이룰 수 없기에,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픈 마음에서 더욱 그렇다. 여기서 미군아내란 한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1945년 미군이 처음 남한에 주둔한 이래 한국전쟁 이후에도 약 4만 명가량의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해 있었고 대부분 젊은 독신 남성인 주한 미군은 한국의 젊은 여성들과 교제했다. 이들 중 결혼에 이르는 경우가 생겨났고,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423명(이시기 한인 이민자의 45% 차지)의 한인 여성들이 미군아내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이후부터 1975년까지 2만8205명의 한인 여성이 미군 아내의 신분으로 미국에 이주하였다. 이 숫자는 1970년 미국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재미 한인인구수 (6만9150명)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결코 작다 할 수 없는 수라고 하겠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미군아내’가 미주한인 이민사에서 차지하는 수적 의미는 1965년 개정된 미국국적법에 의해 가족 초청이 가능해진 이후 그녀들이 해낸 역할이었다. 그녀들의 초청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이주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미국 내 한인의 40~50% 정도가 이들 미군아내들의 가족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유형의 이민은 1965년 이전과 이후 미국에 이민 온 한인 특히 미군아내들의 가족 초청으로 시작되어 연차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1980년 한 해 동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의 69.1%가 이러한 가족 초청으로 인한 것이었고, 3%가 직업 이민, 16.6%가 타 국적 배우자, 11%가 입양아들이었다. 가족 초청 이민은 1980년에 절정에 달하였고 그 이후 점차 감소되는 추세에 있지만 그래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 전체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이민을 통한 대규모의 한인 이민(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5배나 증가하여 1965년에 2165명에 불과하던 이민의 수가 1981년에는 3만2663명으로 증가하여 미국 이민수 중 4위를 기록하였다)은 한인사회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미주한인의 이민사 및 한인사회 형성과 그들의 다양한 삶의 생활사는 1965년 전후에서 1975년 사이 미국으로 이주한 미군아내들과 그녀들의 가족사 자료들을 통해 살펴볼 때 그 역사적 기원과 형태가 잘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미군아내라는 지위는 한국에 있는 한국인들에게나 미국에 있는 한인들에게나 그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기지촌 출신의 여성(양공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며 요조숙녀와는 구별된 천한 출신의 오염된 여성이라는 그늘을 암시했다. 한국에서나 미군의 한인사회에서나 그녀들은 기피의 대상, 수치의 존재로 여겨졌다. 자신들의 친척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게조차 배척당하고 경멸 받았다. 따라서 한번 미군아내이면 영원히 미군아내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실동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7만 명쯤의 한국 여성들이 1946년 이후 특히 1968년 이민 문이 열린 이후 미군과 결혼하여 미군아내로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국제 혼인을 한 미국 속의 한국 여자의 실태 연구). 이 중 90%정도가 양색시의 이력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 많은 여성들이 미국사회와 동화하는데 실패하거나 적어도 이들 중 30%가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즉 한인 미군아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시기 가난, 교육으로부터의 소외, 사회적 천시, 여성으로서 자기검열과 욕망의 억제 등을 자신의 무거운 어깨에 지고 살았다. 이것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궁극적인 탈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안으로 삼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인 남편과 시집식구, 나아가 미국사회 전체가 그녀들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한 ‘미국화’의 압력을 견뎌내야 했다. 여지연(2007)은 그의 연구에서 그녀들이 언어와 인종 그리고 계급의 장벽 앞에서 그냥 좌절하고 피해자 의식에만 젖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했다고 말하고 있다.

 

글: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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