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③-1 두 겹의 철조망 속에서의 외로운 증언(박석수론) _ 시인등단부터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우대식 시인의 '박석수론'을 싣는다.

 

“생존을 위해 넘나들어야하는 기지촌의 철조망은

기지촌 사람들에게 또 다른 절망의 상징이 되었다”

박석수

[평택시민신문] 한국의 현대사 100년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속성들로 가득 차 있다. 주변국들과의 역학관계와 그에 따른 모순이 거시적으로는 정치사회적 모순으로 드러났다면, 미시적으로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도처에 남겨 놓았다.

더욱이 해방과 전쟁 그리고 휴전으로 이어지는 10년 동안의 혼란 이후 남겨진 문제 가운데 아직도 우리 사회 깊숙한 곳에서 묘한 힘으로 작동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기지촌이다. 기지촌은 전쟁 혹은 점령이라는 조건 아래 태생하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분단이라는 역사적 조건 아래 그 부산물로 생겨나게 되었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남북 분단은 남북 갈등을 오늘의 문제로 남겨놓았으며 그 갈등이 첨예할수록 군사적 대결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이후 파주와 포천, 동두천 그리고 평택, 송탄 일대에 주요 미군기지가 건설된 이유도 군사적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요 미군기지는 결과적으로 미군기지 주변에 상업도시를 형성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고, 매춘을 위시한 군납업 혹은 소비적인 서비스업이 주종을 이루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분단에서 비롯된 기지촌의 문제에 대해 문학은 치열한 응전력을 보여주었지만 이는 대개 소설에 국한된 것이었다. 시의 경우 드물게 기지촌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분단문학 혹은 통일문학이라는 명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층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지촌 문제야말로 분단에서 파생된 개인의 상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심도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박석수는 한국 전쟁이후 한반도에 상처처럼 남겨진 기지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대표적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동두천, 의정부, 파주, 문산 등 경기 북부와는 달리 평택, 송탄의 기지촌 문제는 최근 평택의 대추리가 미군 부대 이전으로 인해 쟁점화 되기 전까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면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다. 동시대에 한 자아가 역사적 문제를 짚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송탄의 기지촌 문제를 깊이 있게 끝까지 천착한 작가가 박석수이다. 박석수가 보여준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시각에서 미군기지 이전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장해주는 선제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러한 이면에 위치한 쑥고개라고 하는 공간은 박석수 문학의 젖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석수의 고향, 송탄
박석수의 고향은 첫 시집 『술래의 노래』 「암실시사회」 3부에 실린 바와 같이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지산리 805번지’이다. 현재의 송탄터미널 건너편이 그의 생가가 있던 자리다. 박석수는 ‘내 주소를 염불처럼 외어댄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에게 고향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 의식의 저류에 흐르면서 온전히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한 생은 말 그대로 콩나물을 기르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식구들이 매달려 콩나물 사업에 전념하였다.

아버지 말씀처럼 콩나물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땀과 정성이라고 한다면, 별을 기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 아름다운 새벽별들을 키우는 것일까. 파란 콩알을 콩나물통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의 펌프물을 주면 일주일 만에 예쁜 콩나물이 되듯이, 조그만 말들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땀과 정성을 기울여 물주고 자꾸 눈물을 주면, 저렇게 예쁜 별, 저렇게 빛나는 새벽별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펌프질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라도 펌프질을 멈추기만 하면 곧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공장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쉴 사이 없이 별을 쳐다보며 쓰려오는 손바닥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소설 「동거인」 부분)
                                                    
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콩나물을 기르는 가업을 그가 가끔 시간을 내어 돕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투신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위의 소설에서 보듯이 그는 콩나물에 물을 주면서도 별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그를 끝없이 괴롭혔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콩나물을 배달하던 지굴시장과 새벽시장 그리고 부대 주변의 기지촌에 대해 무한정의 애정을 쏟았던 것이다.

 

박석수 시인 등단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이 당선되어 그는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 이 때 심사위원이 박목월 시인과 박재삼 시인이었다.

 

일곱 살의 골목에는 야도를 찍어내는
두려움이 와아 와아 햇살처럼 쏟아지고
스물살 이후의 도시는 대패날이 되어
나를 문지르고 있었다.

귓속을 웅웅대는 우수(憂愁)의 빛깔을 끌어내
내자 완전(完全)한 자유를 깁고 있을 때,
내 생애(生涯)는 난(蘭)이와 눈맞추고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무궁화
꽃이……
찾는다-
환각(幻ㅋ)에 물구나무선 나의 일곱 살,
호주머니에서 쏟아지는 천진한 기침을
숨었던 이마들은 변명(辨明)하고
나는 자꾸 목이 말랐다.

                                          -「술래의 잠」부분


신춘문예 당선작의 일부다. ‘야도’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치 않다. 숨은 자가 술래를 피해 술래가 있던 자리에 손을 대면서 ‘야도’를 외치면 술래를 면하는 놀이다. 어린 시절 놀이에서 느끼는 스릴감과 스무 살이 넘어 도시에서 느끼는 살벌함이 서로 교직되어 시를 이루고 있다. ‘찾는다’는 시어는 박석수 시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절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방황과 불안이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데 일찍이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어린 아이들을 통해 보여준 근대의 불안한 풍경을 다시 만나게 된다. 스물을 갓 지난 나이에 그는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을 하게 되었다.

박석수 시인이 지면 여러 곳에서 누누이 밝혔듯 그의 당선 소감문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편지 형식으로 쓰인 당선 소감문이 실지지 못하게 된 자세한 경위야 알 길이 없다. 1월 1일자 신문에 시와 사진이 실리고 심사평은 보름이 지난 후 발표되었다. 당시 심사평은 아래와 같았다.

 

그러나 그 청신한 감응력을 높이 샀으며 그것이 헝클어지지 않는 질서 아래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그 역량을 인정키로 한 것이다.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면서 밝은 가락으로 엮어간 솜씨에 그의 신인으로서의 能(능)과 長(장)을 손꼽은 것이다.

 

위의 심사평은 일반적인 신춘문예 심사평의 그것으로서 당선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점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론키 쉽지 않다. 당선 소감이 아무런 설명 없이 신문에서 누락되었던 것이 그 자신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1974년경 서울에 터를 잡은 그는 장시 「암실시사회」를 『현대문학』에 발표하였으나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고 ‘두고보자’는 마음을 품고 변두리 잡지사에 입사하게 된다. 1976년 첫 시집 『술래의 노래』를 시문학사에서 발간하게 된다.  「암실시사회」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을 놀라게 해 주겠다는 야심찬 기대가 수포로 돌아갔듯이 첫 시집에 대한 문단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양우당과 종로서적에 20부씩 위탁판매형식으로 보내놓고 960부는 방에 쌓아두었다 좋은 시를 썼던 몇 분들에게 기증본을 보내고 모두 태워버렸다. 이 사건에 대하여 김대규는 “이 박석수의 분서갱유야말로 그의 천의 무봉스러운 인성(人性)과 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외곬스러운 시인기질을 만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집이 희귀본이 되어 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6년 5월 10자에 동아일보에 『술래의 노래』가 신간으로 소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절시인 시전집 시리즈 8편으로 출간된 박석수 시인의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
1부 술래의 노래, 2부 방화, 3부 쑥고개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소설가 박석수, 기지촌의 참혹한 현실을 이야기하다

1981년 『월간문학』 34회 신인상에 소설 「당신은 이제 푹 쉬어야 합니다」가 당선되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다. 1982년 단편 「철조망 속의 휘파람」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 작품은 박석수 문학세계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을 시점으로 소설은 물론 시에서 본격적인 쑥고개의 수난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1988년에  첫 창작집 『철조망 속 휘파람』을 출간되었을 때 한 달 만에 재판, 3판에 들어가는 이변을 보이며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첫 소설집 발간에 따른 신문 기사는 간단한 신간 소개를 넘어 그의 문학세계를 짚어주고 있다.

 

朴씨는 지난 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詩 『술래의 잠』으로 데뷔한 이래 시를 써오다 지난 82년 월간문학에 단편 「신라의 달밤」으로 소설가로 재데뷔했는데 韓 ·美관계 마찰과 왜곡, 이로 인한 소외의 문제를 과감하게 다루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제 그는 한국의 문제적 상황을 가장 예리하게 집어내는 소설가로 인정되고 있었다. 다른 신문도 『철조망 속 휘파람』을 “거의가 그의 고향 쑥고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이제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철조망 속의 휘파람』의 모티브는 이미 시로 쓴 「개보초-쑥고개·9」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송아지만한 개와 함께
미군 부대 철조망을 지키던
말없는 돼지형을
우리는 개보초라고 불렀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쉿소리를 숨기며
미군 부대 철조망을 배회하는
쑥고개의 헛된 젊음들을 지키면서
돼지형은 스스로가
철조망이 되어갔다.
                  
「개보초-쑥고개·9」 부분

 

글 = 우대식 시인

일명 개보초는 야간에 미군들이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간인이 미군을 대신해 개와 함께 보초를 서는 것을 말한다. 미군들은 지형지물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곳은 개보초를 세웠다. 이 시에서도 개보초 ‘돼지형’은 죽는다.
소설 「철조망 속 휘파람」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돼지형’의 죽음은 미군 부사관인 스미스의 농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스미스와 살갖이라는 건달의 PX를 둘러 싼 거래로 ‘돼지형’은 죽었던 것이다.

물론 스미스에 의해 살갖이가 살해됨으로써 철조망을 둘러싼 쑥고개 민중들의 수난사를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스미스를 양아버지로 따르며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꼬임에 빠져 두 사람의 죽음을 방조한 하우스 보이 쪽배가 스미스에 의해 배반을 당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는 단순히 쑥고개라는 공간을 넘어 우리 민족의 수난사라는 보편적 의미로 읽혀진다. 분단국가에 살면서 누구나 목도하는 철조망이 휴전선으로 그어져 있다면 기지촌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철조망이 기지촌과 미군부대 사이를 가르고 있다. 생존을 위해 넘나들어야하는 기지촌의 철조망은 기지촌 사람들에게 또 다른 절망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호 ‘두 겹의 철조망 속에서의 외로운 증언(박석수론) 중_다시 시인이 되어 기지촌을 말하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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