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1-②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 (조선시대~일제강점기)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지닌호에 이어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의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의 후반부 내용으로 조선시대 초기부터 주한미군까지 외국군의 평택주둔 역사가 소개된다.

 

▶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고려시대 몽고와 왜)에서 이어짐

 

일본군 기지에 미군이 주둔하고 비행장 활주로 길이 늘어나면서

서정자마을‧대추리 주민들은 1000년의 역사 깃든 고향을 잃었다

 

4. 정유재란의 소사벌대첩과 명군(明軍)

평택시 소사1동 일대서 소사벌대첩 전개

명과 왜의 여섯 번 회전서 명 군대 승리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일전을 벌인 소사1동의 소사교

정유재란(1597~1598)은 왜란 때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재침한 사건이다. 재침 당시 일본군의 수는 14만1500명이었으며,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으로 삼고, 양호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마귀를 총병관으로 삼아 5만5000명을 파병했다. 조선은 3만의 병력으로 권율을 대구 공산에, 권응수를 경주에, 곽재우를 창녕에, 이복남을 나주에, 이시언을 추풍령에 배치하며 일본군의 북상에 대비했다.

7월초 일본군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부대를 좌‧우군으로 편성하여 하삼도(下三道) 일대를 공격했다. 일본군의 우군(右軍)은 대장 모리(毛利秀元)를 중심으로 휘하에 가토와 구로다를 배치했고, 좌군(左軍)은 대장 우키다를 중심으로 고니시와 시마즈로 편성했다. 남해안을 거쳐 구례를 점령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남원성을 점령한 뒤 좌‧우군이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뒤에는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약탈했고 우군은 삼남대로를 따라 충청도와 경기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일전을 벌인 소사벌

일본군이 북상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조정은 다시 한 번 파천(播遷)을 논의했다. 평양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북상 소식을 접한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는 한양으로 달려와 총병관 마귀에게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양호의 질책을 받은 마귀는 해생, 우백영(牛伯英), 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를 불러 명군(明軍) 기병과 보병 4000명으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해생과 우백영 등이 이끄는 명군(明軍)은 남하하여 소사1동 인근에 진을 쳤고, 일본군 6만 여 명은 천안부근에 진을 친 뒤 흑전장정(黑田長政)에게 기·보병 6천을 주어 명군(明軍)에 맞서도록 했다.

소사벌대첩은 1597년 9월 5일에서 6일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 사건 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도 언급되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 장유의 《계곡집》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1597년 9월 5일 새벽 명군(明軍)은 평택시 소사1동 앞 소사교를 사이에 두고 일본군과 대치했다. 하루 종일 대치만 하다가 날이 어둑해지자 부총병 해생(解生)은 소사교 아래에 철갑기병 4000명을 매복시킨 뒤 갑옷을 입힌 원숭이를 말에 태워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전으로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두 나라의 군대는 모두 여섯 번 회전(會戰)했는데 모두 명군(明軍)이 승리를 거두었고, 다음 날에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달려드는 왜군을 유격장 파새(擺賽)가 2000명의 기병으로 재차 대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왜군의 북상은 좌절되었다. 9월 16일에는 이순신이 진도 명량에서 큰 승리를 거둬 수군의 북상마저 좌절되면서 왜군은 경상도 지역으로 퇴각했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뒤 일본으로 물러갔다. 임진왜란에서 소사벌대첩(직산전투로도 알려짐)은 김시민의 진주성대첩, 이여송의 평양성전투와 함께 전란의 향배를 갈랐던 가장 중요한 전투였으며 《실록》의 기록처럼 일찍이 보지 못했던 큰 승리였다.

 

5. 청일전쟁과 일본군의 주둔

일본, 소사1동 당산에 주둔지 마련

현덕면‧군문동에서는 독립부대 운영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선발대가 몰살당한 성환읍 안궁리 애교(애몰보)

청일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다. 미국의 강압으로 개항했던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으로 근대국가로 성장하자 제국주의 침략에 눈을 돌리었다. 1876년 청나라를 배제하고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1878년 독립왕국이었던 류큐를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을 설치한 것은 그 서막이었다. 하지만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으로 청나라에게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점차 상품시장까지 위협을 받자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은 열세에 놓였던 일본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텐진조약을 빌미로 파병된 일본군은 농민군 진압으로 조선의 속방화를 재확인하려는 청군과 달리 조선의 주도권 재장악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출병했다. 청일양군의 서로 다른 계획은 청나라가 총 2000명의 파병계획을 갖고 1500명의 선발대를 인천항으로 입국시킨 뒤 섭사성(攝士成)의 지휘 하에 910명의 선발대만을 아산만에 상륙시킨 데 비하여, 일본은 총 7000명의 파병할 계획을 갖고 주한일본공사가 직접 육전대 420명과 대포 4문을 선발대로 삼아 한성을 점령한 뒤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고 이후 혼성여단의 선발대와 수송대를 인천항으로 상륙시켜 서울과 인천 사이에 7600여 명을 주둔하게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입구의 풍도해전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한성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경기남부지역의 전략상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삼남대로를 따라 아산방면으로 남하하자 청나라에서도 강경대응론이 대두했다. 이에 따라 청의 리홍장은 아산만을 통해 1200명을 증파하였는데, 일본은 청군의 파병을 저지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전함 15척을 비롯하여 수뢰정 6척, 순양함 3척을 풍도 인근에 숨겨두고 기습적으로 청의 군함을 공격했다. 또 청군 1220명과 12문의 대포를 싣고 고승호를 격침시켜 모두 몰살시켰다.

풍도해전이 전개되던 시기 용산에 주둔했던 오오시마의 일본 보병 제11연대는 과천과 수원을 거쳐 평택시 소사동 방면으로 남하했다. 또 보병 21연대도 용인, 안성을 거쳐 소사동에서 11연대와 합류했다. 당시 일본군은 기병, 포병, 공병으로 구성되었고, 총인원은 4000명이었다. 일본군이 남하할 때 청군은 충청도 직산현의 성환역 인근에 진을 치고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당시 청군은 비록 평양에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아산과 직산, 평택에는 기존의 2400명에 증파된 1200명 등 3600명이 전부였고 무기에서도 일본군에 뒤졌다.

천안시 성환읍 월봉산 고지를 주진지로 삼고 평택시 유천동과 팽성읍 일대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동태를 살피던 청군과, 소사1동 당산 일대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현덕면 계두진과 군문동 일대에 독립부대를 두고 동태를 살피던 일본군이 최초로 격돌한 것은 1894년 7월 28일 밤 12시 경이었다. 일본군 선발대가 청군을 공격하기 위해 안성천을 건너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청군이 성환읍 가룡리 아교 아래에 군대를 매복했다가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싸움은 밤을 새워 29일까지 계속되었다. 청군에게 패배한 일본군은 작전을 바꿔 소사벌에 소수의 병력만으로 진을 치고 허약함을 보인 뒤 새벽어둠을 틈타 성환 일대 청군의 진지를 포위 공격했다. 예기치 않았던 일본군의 공격으로 청군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크게 패하였으며 일본군은 고작 68명의 사상자를 냈다.

안성천과 성환 일대에서 대회전이 치룬 뒤 청‧일 양국은 양력 8월 1일을 기해 선전포고를 했다. 9월 15일의 평양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청군을 격파했고 이후 황해해전 승리와 산뚱반도 웨이하이웨이까지 점령하여 청의 굴복을 받아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었다. 이로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질서가 붕괴되고 일본이 절대강자로 성장했으며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가 인정되었다. 이후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주도권을 장악한 러시아마저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격퇴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6.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비행장건설과 미군

1919년부터 안정리‧함정리에 일본군 주둔

한국정부, 해방 후 일본군기지 미군에 제공

일본군 비행장건설로 쫓겨났다 해방 후 되찾은 함정1리 서원마을

팽성읍에 본격적으로 외국군이 주둔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K-6캠프험프리즈 홈페이지에 따르면 1919년부터 일본군이 안정리, 함정리 일대에 기지를 건설하고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주둔은 1942년에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에게 비행장건설을 지시했다. 이들은 함정1리 주민들과 대추리 일부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뒤 한국인 징용자 2만여 명과 근로보국단을 동원하여 안정리와 함정리, 대추리 일대에 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등을 건설했다. 하지만 전시체제하에서 물자가 부족하고 건설장비도 삽이나 곡괭이, 우마차뿐이어서 건설공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팽성읍 신대2리 뒤쪽의 망해산의 석재가 훼손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공사도중 지하 격납고 건설 도중 천장이 무너져 내려 사람이 죽기도 했으며, 마차를 끄는 나귀나 소에게 먹이를 주지 못해 굶어 죽는 사례도 있었다.

일본군비행장은 해방과 더불어 미군이 관리했지만 본격적인 군사기지로는 사용하지 않았고 거의 방치상태였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한 뒤에는 한국 해병대가 주둔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한국정부는 안정리 일본군기지를 미군에게 제공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또 기지 확장을 위해 안정2리 서정자마을과 구 대추리, 안정리 일부지역을 미군에게 추가 공여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 기지에는 미군이 진주했고, 비행장 활주로의 길이도 2400미터로 늘렸으며, 1000년 넘게 살아온 서정자마을과 대추리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잃고 인근의 송화3리와 안정1리, 곤지나루 부근으로 이주했다.

글: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 평택 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 끝

※다음호부터 ‘평택 미군기지 약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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