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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 (고려시대 몽고와 왜)주한미군과 평택 ①-1
평택시민신문 | 승인 2018.07.11 09:28|(920호)

도로·수로 교통 발달…전쟁 잦고 외국군 주둔 많아

고려 후기부터 몽고, 왜구, 명군 대표적

[평택시민신문] 지난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주에는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의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의 전반부 내용을 전한다. 글에는 평택의 지리적 배경 소개와 함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외국군의 평택주둔 역사가 소개된다.

 

 

1. 외국군 주둔의 지리적 배경

육로‧수로 교통이 발달됐던 평택지역

교통 발달, 과거에는 지역의 불이익 요소

조선시대 삼남대로 소사원이 있었던 소사1동

근대 이전 평택지역은 한양과 가깝고 해양에 인접했으며 도로와 수로교통이 발달하여 전쟁이 잦고 외국군의 주둔이 많았다. 조선시대 구 평택과 송탄을 아울렀던 진위현은 한양까지 118리였으며, 팽성읍에 해당되는 평택현은 124리, 서평택지역은 150리 내외였다. 이 거리는 장정 1사람이 하루 반나절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육로교통으로는 삼남대로(6대로)와 충청수영로(8대로)가 지났으며, 서평택지역은 충청도 내포지역에서 수원과 한양으로 올라가는 육로가 발달했다.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의주로, 영남대로와 함께 주요 4대로 가운데 하나로 수원과 평택, 천안, 공주, 남원, 통영과 한양을 연결했다. 충청수영로는 진위현의 갈원이나 소사원에서 갈라져 충청도 온양과 예산을 거쳐 보령의 충청수영까지 연결된 도로로 온양온천을 오갔던 왕의 어로(御路)로도 역할 했다.

수로교통은 아산만과 안성천, 진위천 수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아산만은 고려시대부터 조운과 수로교통, 어업의 중심이었다. 고려시대 안성천 하류이며 둔포천 하구였던 팽성읍 노양1리에는 13조창 가운데 하나였던 하양창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이었던 경양창이 설치되었다. 평택시 현덕면 아산만방조제 건너편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는 조선시대 공진창이 설치되어 충청도 40여 고을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반했으며, 고덕면 해창리에는 진위현의 해창이 설치되었고, 청북읍 삼계2리 옹포에는 양성현의 해창이 있었다. 이밖에 둔포천 수로의 경양포(팽성읍 노양1리), 안성천 하류의 당포진(현덕면 신왕리), 계두진(현덕면 권관리), 아산만 해로의 대진(만호리)은 충청도 평택현과 아산현, 당진과 면천군, 서산과 태안현과 경기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수로교통의 관문이었다. 충청도 내포지역의 과객들과 상인들은 이들 수로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거나 안중장, 발안장 등에서 교역을 했다.

교통의 발달은 근대 이전사회에서는 이익보다 손해가 많았다. 평화 시에는 왕과 사신, 고관대작들의 행차가 잦았고, 전쟁 시에는 갑절의 고통을 겪었다. 본디 전쟁이라는 것이 도로와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어서 대로변의 고을들은 마을이 불에 타고 전답이 황폐화되며 사람들은 적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거나 끌려가기 일쑤였다.

평택지역에 언제부터 외국군이 주둔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던 AD 5세기 후반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안성천 이북지역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사실이나 6세기 중반 신라의 지배는 외국군의 주둔이라고 볼 수 없고, 고려 후기 몽고군의 일시적 주둔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 왜란 중 명군의 주둔 그리고 청일전쟁 때 청일양군의 주둔 정도를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2. 고려 후기 몽고군의 침입과 평택주둔

고려사에 현 팽성읍 일대에 몽고군 주둔 기록

고려시대 하양창이 있었던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계양)

몽고의 3차 침입은 고려 고종 22년(1235)부터 시작되었다. 앞서 1232년에 있었던 2차 침입에서 김윤후가 용인의 처인부곡에서 적장 살레타를 사살하고 북계병마사 민희가 최우의 가병(家兵) 3000명으로 서경을 공격하여 몽고에 투항하여 향도가 되었던 홍복원 일당을 몰아낸 바 있던 고려는 몽고의 대대적인 3차 침입을 받았다. 3차 침입은 몽고장수 당고가 홍복원을 향도 삼아 침입했다. 몽고가 침입하자 강화도에 천도했던 고려는 중앙군을 5군으로 편성하여 강화의 연안방에 주력하고 각 지방에는 방호별감을 보내 산성이나 섬에 입보하여 싸우도록 조처했다.

1235년(고종22)에 침입한 몽고군은 평안도, 황해도지역과 함경도지역으로 나눠 공격하는 한편 제1대를 경상도 안동과 경주까지 내려 보내 휩쓸고 지나갔다. 1236년(고종 23)에는 앞서 침입한 것보다 증원된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8월 말에는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내려왔다. 9월에는 안성과 온양, 10월에는 전라도 지역까지 진입했다.

고려사에는 “고종 병신 23년(1236) 무신일에 몽고군이 남경, 평택(平澤), 아주(牙州), 하양창(河陽倉) 등지에 각각 진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남경은 서울이고, 평택은 팽성읍, 아주는 아산시, 하양창은 팽성읍 노양리, 본정리 일대를 말한다. 이 기록은 3차 침입 때 일시적으로나마 몽고군이 평택지역에 주둔했음을 말해준다. 일시적으로 주둔했던 몽고군은 남하하던 중 9월 정사일에 온주군(온양)에서 아전 현려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반격을 받아 패하였고, 대흥군(예산)에서도 패하였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전라도 전주를 거쳐 신안군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3.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평택지역

서평택지역, 팽성읍, 동삭동에 왜구 침략 많아

고려시대 용성현 지역이었던 안중읍 용성1리

역사적으로 왜구들이 우리나라 변경을 침입하고 노략질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기록에는 신라 내물왕 때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고 하며, 문무왕이 동해 바닷가에 무덤을 만들라고 유언한 것도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호국의지였다. 왜구의 노략질이 가장 기승을 부렸던 시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다. 고려 말 일본은 막부교체로 57년 동안 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하급무사들과 전란과 기근으로 농토를 상실하고 유랑하던 농민들, 막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던 변방의 영주들과 백성들이 왜구(倭寇)가 되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변방을 침입했다. 왜구의 규모는 작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 천 명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다. 예컨대 1380년 왜장 아지발도가 이끌었던 왜구는 전함만도 500 척이 넘었고, 기병 1600명에 보병 4000~5000명에 이를 만큼 대부대였다. 1377년에는 개경 근처 교동도까지 침입하였으며, 삼남지방은 물론 경기도와 황해도 일부까지 약탈을 자행했다.

왜구가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었다. 그 뒤로도 1349년(충정왕 23)에도 12차례의 침입이 있었지만 주로 삼남지방을 침입하였고 피해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 말 42년 동안에는 무려 506회나 침입했고, 그 가운데 공민왕 때 74회, 우왕 때는 378회나 침입하였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가장 심했던 우왕 때에는 연평균 27회나 침입하였으며, 우왕 9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50회나 침입하여 국가운영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평택지역에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지역은 서평택지역과 팽성읍 그리고 동삭동 일대였다. 이들 지역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팽성읍 노양리에 13조창 가운데 하양창이 있었고 어소리에 설창, 고덕면 동청리, 두릉리에는 종덕창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가 평택지역을 침입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7년(1358)에 면주(당진군 면천읍)를 약탈한 왜구가 용성현(안중읍 용성리)에 침입하자 고려가 군대를 내려 보내 적선 2척을 빼앗았다고 기록하였다. 또 공민왕 9년(1360) 5월에는 양광도 평택현과 아주현(아산) 신평에 침입한 왜구가 용성현(안중읍 용성리 일대)까지 올라가 10여 현을 불태우고 약탈했다고 하였다. 공민왕 21년에는 양광도 도순무사 조천보가 용성현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우왕 3년(1377)에는 평택현과 경양현(팽성읍 본정리, 노양리 일대)을 침입하여 양광도 부원수 인해가 싸웠지만 이기지 못했다. 그 뒤에도 종덕장, 송장부곡, 영신현 등 평택지역 여러 고을에 침입하여 약탈과 방화를 했다. 왜구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양광도 부원수가 이끄는 관군이 패한 것을 보면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구의 침입으로 평택지역은 황폐화되었다. 국가적으로는 조운(漕運)이 어려워 국가재정이 바닥났으며 연안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을을 폐할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 퇴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과 세종 때 성곽과 병선을 수리하고 거북선, 화포, 신기전 같은 신무기를 개발한 것도 4군 6진개척이나 왜구격퇴와 관련이 있다. 태종 8년(1408)에는 경기도에도 수군절도사를 파견했고, 왜구의 침탈을 많이 겪었던 포승읍 만호리 대진(大津)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종3품 무관직으로 수군절도사 아래 단계의 직책)를 파견했다. 이것은 그만큼 서평택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다는 반증이다. 왜구의 침입은 세종 원년 쓰시마섬을 정벌하고 정부가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면서 수그러졌다. 이에 따라 포승읍 만호리의 수군첨절제사도 수군만호로 격하되었으며, 세조3년(1457)에는 이마져도 폐하여 아산만 하구 난지도의 수군만호로 통합하였다.

▶ 다음호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과 미군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로 이어짐

 

글: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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