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이후에도 민족주의자로 평화통일운동에 힘쓴 안재홍

[평택시민신문] 평택 출신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과 관련한 단행본이 현재 100여 권 넘게 출간돼 있다. 한국 근현대 지성사에서 안재홍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 걸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줏대 있게 고민하며 국가비전을 설계하고 실천한 민세 안재홍. 그를 다룬 책들을 찾아 그 의미와 핵심대목, 독서 포인트 등을 소개해 민세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한국전쟁은 민세 개인에게도 동생, 아들, 조카를 잃은 커다란 불행

이 책은 한국전쟁이후 민세 등 납북민족지도자들의 재북평화통일운동을 분석했다. 해방후 민세는 건준 부위원장, 국민당 당수, 좌우합작 추진위원, 미군정 민정장관, 한성일보 사장 등으로 숨가쁘게 통일국가수립에 힘썼다. 민세는 1950년 5월 30일 고향 평택에서 80%에 가까운 군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6월 21일 2대 국회 개원후 불과 4일만에 6.25가 터져 한강다리 폭파로 돈암동 자택에 연금되어있다가 북한군의 모셔가기 공작에 의해 그해 9월 납북됐다.

한국전쟁은 민세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불행이었다. 둘째 아들 민용씨는 전쟁중에 고향에서 지병으로 사망했고, 한국 최초 독일연구소 유학 공학자였던 셋째 동생 재학씨는 형수 김부례씨의 도움으로 군산으로 피난갔다가 급성 페렴으로 사망했다. 초대 외무장관을 지낸 변영태 선생의 딸과 결혼한 큰형 안재봉 선생의 장남이자 조카 안우용씨도 민세와 함께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평화통일 전쟁반대 강조

납북 이후 민세가 공식적인 자리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56년 6월 23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민세는 그해 7월 2일 조소앙, 오하영과 함께 재북평통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재북평통은 평화통일, 전쟁반대, 남북협상을 목표로 통일에 대한 견해와 방법에서 남북당국의 의견 차이를 좁히고자 노력했다. 민세를 비롯한 납북 인사들은 제한된 공간이었지만 평화 통일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바쳤다.

재북 민족주의자들의 현실 정치 참여가 가능했던 두 번 째 이유는 자신들의 평화통일노선과 북조선 당국자들의 평화통일노선에서 일치점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재홍은 자신은 한 번도 공산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서 자신을 개혁적 민족주의자, 즉 신민족주의자라고 규정했다. 그 자신의 오래된 지론을 펼친 것이다( 이신철 지음 / 북한민족주의운동연구 371쪽 / 역사비평사).

민주화이후인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민세를 비롯해서 김규식, 조소앙, 박열 등 납북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공식 복권시켰다. 1991년 11월에는 이분들의 위패를 국립묘지에 안치했다. 2011년 국무총리실 6.25 납북자진상규명위원회는 민세를 6.25 납북인사로 공식 인정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아직도 북한에서의 민세활동에 대해서는 정보가 제한적이지만 신민족주의자로서 평화통일운동에 힘쓴 것은 분명하다. 평화 통일이 꼭 이루어져 기쁜 마음으로 민세 평양묘소에 참배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면 좋겠다.

 

황우갑 본지 시민 전문기자·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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