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 2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결합해 ‘신중현록’ 탄생
평택 매개로 한 지영희·신중현 만남은 운명적
평택은 한국 대중음악 세계화 선도할 토양있어

2. 한국 대중음악의 발상지, 평택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 평택,

미군들과 조화로운 동거, 과제 떠안다

우리고장 ‘평택’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평택하면 미군기지’, ‘미군기지하면 평택’,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8년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가 평택에 생긴다. 무려 잠실운동장의 10배 크기다. 한국국방연구원은 평택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으로 인해 경제유발 18조원, 고용유발 11만 명, 평택 소비(2020년 기준) 연 5천억 원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그려주었다. 하지만 미군기지이전이 우리에게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를 위해 평택시민이 양보하는 부분이란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주한미군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당장 올해 여름 미8군 사령부가 온다. 미군들과의 조화로운 동거, 그 해답의 일부를 한국대중음악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미8군쇼, 한국대중음악의 요람이 되다.

1953년 7월 휴전과 동시에 ‘미8군쇼’가 등록된다. 주한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 때문이다. 전국에 미8군 산하 클럽수가 자그마치 264개였다. 그 때 미8군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연 120만 달러였다. 당시 우리 국민들이 힘들여 벌어들인 외화가 연 100만 달러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전쟁을 막 끝낸 뒤라 모두가 배고팠고 아팠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음악인들이 설 자리가 오죽했으랴. 음악에 대한 꿈과 열정을 표출하고 싶었던 음악인들은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미8군쇼는 전국 각지 미군캠프에서 음악, 춤, 코미디, 마술 등 그야말로 버라이어티쇼를 선보였다. 전국의 실력 있는 우리 음악인들이 바로 이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해주고 미군에게 위스키를 대가로 받기도 했다. 노랫값으로 햄버거, 콜라, 캔맥주를 대신 받기도 했다. 어느 뮤지션은 미군이 주는 콜라를 굶는 처자식에게 주려고 자신도 먹지 않고 호주머니에 몰래 챙겨 넣기도 했다. 속 모르는 미군들은 콜라를 그 자리에서 병따개로 따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뮤지션들의 배고픈 실상이었다. 그런 허기를 견디며 작곡가 길옥윤, 김희갑, 가수 조용필, 윤복희, 패티김, 현미, 나미, 박인수 등 한국대중음악의 기라성들이 미8군쇼를 거쳐 유명해졌다. 미8군쇼를 계기로 한국 대중음악의 거대한 흐름이 바뀌었고 제2 대중음악 르네상스가 꽃 피었다. ‘미8군쇼’는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의 산물이지만 한편으론 한국대중음악의 꽃을 피우게 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탄생하다.

미8군쇼는 전국 각지로 찾아가 공연했다. 동두천, 문산, 파주, 평택, 오산, 부산 등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1964년 팽성의 K6(캠프 험프리스)는 미8군의 파견주둔사령부였다. 그래서 팽성, 송탄 기지촌에는 음악클럽이 많았다. 평택에 활동하던 뮤지션으로는 신중현, 윤복희, 윤향기, 함중아 등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뮤지션이 있다. 미국 현지 뮤지션도 그 실력을 인정해 ‘동양의 기타 신’이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미8군쇼의 황태자’라 칭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그를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라 부른다. 바로 신중현이다.

 

“동두천이나 오산의 기지촌 근처에서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옛 미8군 시절 동료들로부터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대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기꺼이 그들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 신중현 「신중현에세이」

 

모두 신중현의 히트곡이자 그가 만든 스타들이다. 그는 미8군에서 접한 서양 팝 장르들을 우리음악과 접목해 한국대중음악의 새 뼈대를 구축한다.

신중현, 음악으로 치유 받고

다시 태어나다.

신중현은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 사업차 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꽤 부유하게 잘 살았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귀향하는 도중 전 재산을 중공군에게 뺏기고 무일푼이 됐다. 고향으로 돌아와 화병을 얻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고아가 됐다. 하는 수 없이 친척집에 더부살이로 갔다. 친척 할머니는 어린 신중현을 보자마자 소금을 뿌렸다고 했다. 재수 없는 업보를 가진 애가 집에 왔다며 신중현은 누구의 신세도 지고 싶지 않아 닥치는 대로 일했다. 운명이었을까? 그 때 신중현이 공장일을 끝내고 음악이 즐비한 영등포시장을 지나갔다. 미군용 무전기의 전파를 훔쳐 잡은 낡은 라디오 속에서 음악이 들렸다. 그 음악들은 신중현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삶은 그저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신중현에게 음악은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움츠러든 자신이 마치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그 뒤 버려진 기타를 수리해 밤낮으로 연습했다. 그렇게 그는 운명처럼 흘러 흘러 미8군쇼로 가 지금으로 치면 억대 연봉을 받고 대스타가 되었다.

 

신중현,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대중음악을 만들다.

미8군들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한 신중현은 생각했다. 우리가 서양음악을 이제 따라 해봤자 그들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우리 음악만으로 요즘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릴 적 흔히 듣던 우리 전통음악에서 느꼈던 ‘신나는 흥’ 그것에 해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국악의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서양의 록과 접목해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신중현표 한국 록이었고 동시에 한국 최초의 록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곡 『미인』 이란 곡을 예로 들어보자. 미인 노래 중에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라는 부분에서 들려주는 꺾는 목은 판소리조다. 전반적 선율 역시 각설이 타령이라 불리는 ‘장타령’과 유사한 선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반주 중 전기기타 부분은 가야금과 같은 느낌의 연주법을 썼다. (꼭 한 번 들어보시고 직접 확인해 보시길) 신중현의 창작곡을 듣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친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8군 활동을 통해 록 앤 롤, 포크, 소울, 블루스, 재즈, 댄스음악, 헤비메탈 등 다양한 장르를 전통음악과 접목해 한국적 대중음악을 만들었다. 이것은 국악과 서양악이 한데 어우러져 현대화된 우리 음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 지영희 선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내가 가장 의욕을 갖고 있었던 게 '록'이라는 세계 공통적인 음악에다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얹어서 전 세계와 교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래에 우리 선조들이 갖고 있던 음계를 사용했어요. 서양음악은 화음 위주로, 멜로디를 쌓아서 펼쳐내는 평면적인 음악입니다. 반면 우리 음악은 하나의 선율로 깊이를 만들어내는 입체적인 음악이지요. 음의 깊이를 통해 우주를 넘나드는 공간까지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정신'을 이어 가고 싶었습니다.”

-신중현 회고담 중

 

신중현, 음악의 도시 평택에서 노래하다.

천재 기타리스트로 시작해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가 된 신중현. 수많은 한국 가수들을 가르쳐 대스타로 캐워낸 ‘스타제조기’이기도 하다. 김상희, 김추자, 펄시스터즈, 임희숙, 양희은, 박인수, 장현, 이남이, 바니걸스, 조영남, 서유석 등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인기 절정의 순간, 다시 한 번 그에게 큰 시련이 온다. 유신정권의 탄압과 마약복용혐의까지 더해 그는 음악 활동 길이 막히게 된다. 그래도 신중현의 음악 열정은 식지 않는다. 음악을 할 수 있는 곳, 평택으로 찾아든다. 송탄기지촌에 있는 미8군 동료들이 그에게 노래 부를 자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송탄의 OB하우스라는 클럽에서 그는 끊임없이 음악 활동을 한다.

 

신중현과 김완선, 한성준, 지영희

그리고 평택

1990년대 서태지보다 앞서 가요계에 댄스음악 열풍을 일으킨 가수가 김완선이다. 그녀 또한 신중현의 애제자였다. 신중현은 김완선에게 ‘리듬 속에 그 춤을’이라는 댄스 음악을 만들어줬고 대스타가 되게 했다. 김완선은 ‘한국의 마돈나’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춤 실력파다. 그의 외증조부가 조선 춤의 대부 한성준이다. 그녀의 이모 한백희 또한 미8군 가수 출신이다. 한성준이 지영희의 큰 스승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중현, 김완선, 한성준, 지영희 이렇게 네 사람은 모두 평택이라는 접점을 두고 커다란 인연의 고리가 있다. 사람과 물자가 편리하게 드나들던 교통의 요지, 평택. 그래서 미군들이 둥지를 틀었던 곳. 평택에서 우리 전통음악의 꽃이 만개하고 서양음악이 들어와 우리스타일의 대중음악이 울려 퍼진 까닭,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2018 평택, 더 크고 새로운 한류의 발상지가 되자.

미군이라는 벌새가 평택이라는 꽃에 날아와 서양음악이라는 화분을 옮겨 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만의 대중음악 꽃을 피웠다. 그 영향인지 평택에는 유독 음악동아리가 많다. 송사모, 통기타동아리, 색소폰동아리 등 프로에서 아마추어까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 대중음악축제도 매년 많이 열린다. 특히 한·미 두 양국 간의 우호와 교류를 위한 축제에 꼭 록 음악이 들어간다. 기지촌 주변에서 생겨난 클럽음악도 한국대중음악사의 일부이며 평택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음악 콘텐츠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록, 록의 대부 신중현, 서양음악 전도사인 미8군. 그들을 한데 품어준 곳이 평택이다. 2018년 말이면 모든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온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는 그들을 동반자로 보고 또 훌륭한 관광객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이 우리 음악의 전도사로 세계 널리 벌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다. 미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기회로 삼자. 평택은 한국적 대중음악의 세계화를 선도할 수 있다. 더 크고 새로운 개념의 한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평택시민의 정체성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대하는 우리의 지혜일 것이다.

글 경기관광공사 오민아 작가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 제3편 ‘실크로드의 악기 해금의 고장, 평택’ 이란 제목으로 다음 호에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연재순서
1편 한국 민속음악의 성지, 평택             
2편 한국 대중음악의 발상지, 평택
3편 실크로드의 악기 해금의 고장, 평택    
4편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위하여

 

2013년 가을부터 평택시와 충청남도 아산시가 공동 추진하고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하는 ‘평택·아산 창조관광 활성화 사업’이 2015년까지 평택호와 충청남도 아산 인근에서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이 사업의 성과 가운데 하나인 지영희국악관을 매개로 경기관광공사와 1년간 ‘콘텐츠 개발’ 중심으로 사업이 더 진행되었다. 이 사업의 경기관광공사 평택아산연계사업단 과장으로 근무했던 오민아 경기관광공사 작가가 지난 3년간의 사업을 통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라는 주제의 글을 본지에 기고해 왔다. 본지는 평택출신의 지영희 명인 등 소리 거장들과 평택호와 평택이라는 장소적 자원을 바탕으로 평택을 ‘민속음악과 소리’의 국제적 명소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취지의 이 기고를 평택시민과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평택의 미래상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에 이 글이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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