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 1
지영희 관련 도서 6권 3월 라이프치히 국제도서박람회 전시된다

Ⅰ. 한국 민속음악의 성지, 평택
2017 바흐와 지영희, 두 음악의 아버지가 만나다.
2017 두 음악의 아버지가 만난다. 세계가 아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한국 민속음악의 아버지 지영희다. 지영희는 우리 음악사에서 민속악을 지켜낸 김구와 같은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그의 업적이 매장을 당한 비운의 드라마 같은 삶이 이제는 밝혀질 것인가. 세계 가장 오래된 도서 축제인 ‘2017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박람회’에서 지영희 관련 서적이 6권이나 전시된다. 한 인물을 주제로 이렇게 많은 도서가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천 년의 도시 독일 라이프치히는 1632년 독일 최초 도서전을 연 곳이다. 이곳에 전 세계 42개국 이상이 자국의 문화적 역량을 자랑하기 위해 매년 봄 모여든다. 엄밀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각국의 대표 도서들만 전시되는데도 총 2,263개의 부스에 달한다. 명실상부 세계적 도서 축제이다. 2017년은 ‘음악’이라는 주제로 3월 23일에서 26일까지 열린다.

민속음악의 성지, 평택의 숙명
라이프치히는 우리나라와 오래된 인연이 있는 도시다. 1883년 11월 26일 독일과 조약체결을 맺고 축하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함대(SMS Leipzig) 군악대가 서울에 왔다. 이들의 연주는 우리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음악인들을 접한 계기가 된다. 또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살았던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 깊은 곳에 우리 고장 평택이 낳은 민속음악의 아버지 지영희가 간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쓴 소리를 듣는 평택이 장차 전국 지자체들이 부러워할 ‘국제음악도시, 평택’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좋은 전조이다. 이것은 평택 문화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방향 제시가 아니다. 그것은 평택의 숙명이다. 평택은 예로부터 모든 물자가 드나들고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자연스레 음악이 발달했고 특히 경기음악의 중심지였다. 평택이 한국 민속음악의 성지가 되고 국제음악도시가 되는 것은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이기 때문이다.
“경기음악은 나라의 중심지역 음악”
“경기도가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백두대간의 이서以西의 중심부에 있었음이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은 예성강음악권, 임진강음악권, 한강음악권, 경기아산만음악권이 모아들어 다양성이 주어지고 사회정치적 중심이었던 서울을 에워 쌓았으며, 서해의 북과 남, 그리고 중국과 해로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데서 그 풍요로움이 한국음악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지역이다.” ... “경기도당굿의 중심은 평택·오산·수원·안산·인천 등이었다면 평택출신의 도당굿 문화는 경기아산만음악권의 도당굿 중심으로 자리매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자리매김을 근대 지영희의 활동영역에서도 확인된다.”_ 노동은 「경기음악」 中
걸출한 민속음악 거장들을 낳은 곳, 평택
“이제 경기음악이 번성 하겠어” 2016년에 안타깝게 타계한 한국음악이론의 거장 노동은 교수가 타계 2년 전에 한 말이다. 평택호에 지영희국악관을 만든다는 소식에 감동하며 한 말이다. 그의 논지는 이랬다. 지영희는 경기음악의 대가이다. 경기음악은 우리 전통음악의 중심으로 우리음악을 이끈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영희가 제대로 조명된다는 것은 이제 경기음악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경기아산만음악권의 중심지인 평택에는 실로 많은 음악인이 있었다. 기름진 평야와 물의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 평택답게 걸출한 음악 거장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가장 먼저 지영희가 있다. 조선 8명창 모흥갑, 근대 5명창 이동백뿐만 아니라 해금·대금시나위의 거장으로 지영희와 김광식, 이충선 등 국보급 민속악인을 많이 길러낸 방용현, 전국 5대 남사당 진위패를 결성한 유세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꼽히는 평택농악의 최은창과 이돌천, 김용래도 있다. 유일하게 경기남부의 어로요를 보존 전승한 평택민요의 이민조와 이종구, 박용철, 어영애 등 그야말로 평택 위인들을 제외하고는 전통음악을 논할 수 없을 지경이다. 평택은 한국 민속음악의 중심지로써 손색이 없다.
지영희, 당신은 누구십니까?
2014년 평택시와 경기관광공사가 손을 잡고 평택시 관광활성화사업을 추진했다. 평택의 대표 관광지인 평택호에 평택 대표 위인의 정신을 심어 문화관광의 메카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밋밋하고 일회적인 관광지에 지역의 위대한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지역 정체성을 고취하면서 동시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함이었다. 오랜 시간의 연구와 조사 끝에 지영희가 선정되었다. 지영희는 한국 음악의 근대화를 앞당긴 인물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우리 음악을 7년간 직접 팔도를 돌며 수집 정리하였다. 후대가 우리전통음악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정리한 음악들을 최초로 오선보에 옮겨 적었다. 지금 우리가 국악악보를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지영희의 한 평생 노고였다. 그는 또한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살았다. 온 국민이 국악의 흥을 알고 그것으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현대 음악과 잘 어울리도록 많은 창작곡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악관현악단을 국내 최초로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꼭두각시무용곡도 지영희가 만든 곡이다. 나아가 지영희는 우리 음악이 세계로 뻗어나가길 희망했다. 국악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1962년 파리 민속예술대제전에서 우리나라 대표로 연주한 지영희를 보고 협회 측에서 극찬을 했다고 한다. 지영희에게 너희 민속악단은 우리 파리보다 일세기를 앞섰다고. 또 우리나라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 연주를 한 음악인도 지영희였다. 이에 고무된 지영희는 세계로 나아가 우리 음악의 정수를 마음껏 보여주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의 꿈이 완숙기에 이를 즈음 운명은 가혹했다. 지영희의 세가 커질 것을 염려한 당시 국악계 기득권들이 지영희를 제명하기 이른다. 국악을 위해 혼신을 태울 줄만 알았지 정치적 야망이나 잔꾀가 없었던 지영희는 이내 매장되어 버린다. 그의 많은 악보와 업적들 또한 검은 손에 넘어가 주인이 바뀌어버린다. 그의 말년 비화는 평택호 지영희국악관에 스토리텔링화 되어 있다.
지영희, 위대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실지 지영희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업적을 훔쳐간 사람들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열정과 억울한 삶을 모두 보고 자란 유족들도 또한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평택시의 지영희 위인에 대한 순수한 연구 목적과 자세에 얼어 있는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지영희 유물들을 평택시에 기증하였다. 또한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도 평생 힘들게 모은 많은 유물들을 지영희의 위대함을 조명할 수 있도록 무상 기증하였다. 그렇게 수집한 유물 400여 점과 그의 비운의 스토리가 2014년 지영희특별전을 통해 세상에 최초 공개되었다. 평택 국제대학교 건축과 학생들이 힘을 모았으며 지영희 후학인 내기초등학교 지영희국악관현악단 학생들이 지영희 음악을 연주하며 함께 했다. 그렇게 지영희특별전은 성황리에 잘 끝났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 뿐만 아니라 YTN, 아리랑TV에서도 평택시의 전통음악사업을 주목하며 다큐와 뉴스로 제작해 언론에 공개 했다. 그렇게 지영희특별전을 접한 평택 시민들이 지영희의 인생에 감동했다. 시민들은 지영희 상설 전시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우성 쳤다. 평택시 문화관광해설사 네 분이(김연숙, 노명희, 이경희, 이용중) 힘을 모아 시민청원서를 받았고 마침내 2015년 8월 26일 평택호 한국소리터에 지영희국악관이 만들어졌다. 위대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지영희국악관은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지영희국악관, 1년에 2만 명이 찾아와
한국소리터 어울림동 1층 30여 평의 공간 ‘지영희국악관’에는 지영희와 평택농악, 평택민요 관련 유물이 265점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초등 및 중학생들의 직업체험장으로도 인기다. 평택호에 설치된 국내최초 소리의자를 견학하면서 지영희국악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들의 쉬운 해설을 통해 우리 음악 공부도 하고 직접 해금과 장구 체험도 할 수 있는 입체적인 체험학습이다. 지영희국악관에 마련된 우리 옛 사랑방의 모양을 한 공연장에서는 국악 공연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 마련된 스크린은 문화 소외계층인 평택시 요양원 어르신들을 위해 전통 영화도 상영된다. 문화해설사의 쉽고 편한 인문해설을 겸해 어르신들과 함께 생각하며 보는 영화상영 프로그램이다. 아울러 국내 해금 일인자의 해설이 있는 콘서트도 무상으로 누구에게나 제공되었다. 국악교육강좌인 ‘풍류아카데미’도 상설로 제공되어 시민의 교육 커뮤니티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한 번 지영희국악관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지영희의 업적과 인생 스토리에 감동하고 또 국악콘서트가 즐거워 다음에 꼭 지인들을 데리고 온다고 한다. 그렇게 크지 않은 지영희국악관에 연간 2만여 명이 다녀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모두 지영희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 싶었던 국악 대중화 업적의 후광이다.
한국 민속음악의 성지, 평택이다.
민속음악의 아버지 지영희의 고향이며 그의 영혼이 머무는 곳 평택. 그의 무한 애정이 담긴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대부분 현재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끄는 거목들이 되었다. 사물놀이로 한국을 알린 김덕수와 최종실, 88올림픽 음악을 지휘했던 박범훈, 피리의 일인자 최경만,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김영재 등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이뿐인가, 앞서 언급한 수많은 거장들이 모두 평택 출신이다. 우리 전통음악의 중심인 경기음악, 그 경기음악을 이끄는 고장이 또 평택이다. 평택은 예부터 한국 민속음악의 성지였다. 지금 우리는 정치적 문제로 매우 혼란스럽고 경제적인 문제로 매우 아픈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 이런 혼돈과 고통 속에서 전통음악이라는 해묵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송구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고통을 결국 희망으로 재창조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그런 자랑스러운 우리의 본성과 원형이 담긴 것이 바로 우리 전통음악이다. 이제 우리는 돈과 재화가 삶의 기준인 시절을 지나 문화가 새로운 삶의 힘인 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비록 당장의 아픈 현실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우리의 혼인 국악을 지키는 일,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정체성을 굳건히 세우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현재를 위한 것이고 미래를 위한 훌륭한 대비이다. 평택이 낳은 지영희의 서적들이 국제도서전에서 자랑스럽게 전시된 것은 고단한 우리들에게 주는 선물은 아닐까. 그 것은 지영희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평택은 민속악의 성지였으며 우리가 평택을 가꾸어야할 방향이기도 하다고.
오민아 경기관광공사 작가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 제2편은 ‘한국 대중음악의 발상지, 평택’ 이란 제목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신중현과 평택 미8군의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2013년 가을부터 평택시와 충청남도 아산시가 공동 추진하고 경기관광공사가 주관하는 ‘평택·아산 창조관광 활성화 사업’이 2015년까지 평택호와 충청남도 아산 인근에서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이 사업의 성과 가운데 하나인 지영희국악관을 매개로 경기관광공사와 1년간 ‘콘텐츠 개발’ 중심으로 사업이 더 진행되었다. 이 사업의 경기관광공사 평택아산연계사업단 과장으로 근무했던 오민아 경기관광공사 작가가 지난 3년간의 사업을 통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음악도시 평택을 꿈꾸며’라는 주제의 글을 본지에 기고해 왔다. 본지는 평택출신의 지영희 명인 등 소리 거장들과 평택호와 평택이라는 장소적 자원을 바탕으로 평택을 ‘민속음악과 소리’의 국제적 명소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취지의 이 기고를 평택시민과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평택의 미래상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에 이 글이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