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②

한효석 화가

1월 13일~2월 27일 웃다리문화촌에서는 평택 출신의 화가 한효석의 전시회 ‘Meditation-Biwako-Mediterranean’가 열렸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모순을 차별화된 독창성으로 비판하며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인간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명상작품 두 점과 기후위기를 주제로 하는 설치작품 한 점을 선보였다.

전시회가 열린 웃다리문화촌은 본래 금각초등학교였다. 해방 직후 서탄면 적봉리에서 개교했지만 K-55오산공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금각2리로 밀려났다가 다시 금각리 쇠뿌리마을에 정착한 서글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미군기지와 함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금각초등학교(금각분교)는 2000년 폐교되었다. 이곳을 평택문화원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2006년 웃다리문화촌으로 개관했고, 2021년에는 그림 전시를 위주로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고덕면 당현리 ‘막금’이 고향
K-55 미군기지와 신장동 문화 
그가 화가로 성장하는 자양분 

신장동 화방에서 그림 그리는 법 배워

화가 한효석은 고덕면 당현리 ‘막금’이 고향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1972년 중앙동 서두물에서 태어나 막금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서두물에서 목장을 운영했다. 1981년 송탄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도시 정비를 하자 서두물에서 밀려나 막금으로 농장을 옮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살았던 막금은 낯설고 불편한 동네였다. 비포장도로였고 동네에는 함께 놀아줄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농장을 옮겼지만 자녀들은 전학시키지 않았다. 한효석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효명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전거 통학했다. 1시간 넘는 거친 진흙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집과 가까운 태광고등학교로 진학했던 것도 미군기지 탄약고 앞으로 난 포장도로를 맘껏 달리고픈 욕망 때문이었다.

당현리 막금에 살면서 미술은 놀이면서 친구였다. 당시 막금에는 신장동 기지촌의 화방에 액자를 공급하는 공방이 있었다. 공방에는 액자값 대신 받아온 유화물감과 화구들이 널려 있었다. 한효석이 유화물감을 무척 신기해하자 공방에서 일하던 형들은 액자를 배달하는 날 신장동 화방에 데려다줬다. 화방에는 밑그림 없이 단번에 그리는 알라프리마 기법으로 미군들의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려서 파는 아마추어 화가가 많았다. 대부분 중·고등학교 미술반 출신이거나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운 사람들이었는데 한효석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도 신기해서 넋을 놓고 바라봤다. 화방을 몇 번 들락거리며 어깨너머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공방에서 돌아와서는 배운 솜씨로 신나게 그림을 그렸다. 덕분에 초중고 시절 교내뿐 아니라 시도와 전국미술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역경을 극복하고 홍익대 미대 입학

부모님은 아들이 화가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와도 고급 취미 정도로 치부했다. 미술대학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는 깜짝 놀라셨지만 그만두게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홍익대 미대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더구나 아버지까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집안 형편도 크게 기울었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후기대학을 진학했지만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군입대를 하면서 대학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미래의 꿈과 희망까지 놓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전역 후에는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아파트 공사장에서 노동일을 했다. 방황할 의욕조차 없던 시절 고등학교 때 그림을 배운 두 분 선생님을 찾아뵀다. 한효석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선생님은 다시 한번 홍익대 미대 진학에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나 여건은 언감생심이었다. 선생님의 권유를 마음에만 담아두고 공사장 노동일에 전념하던 한효석에게 방향전환을 결심하게 만든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공사장 인부들 사이에서 있었던 다툼에 휘말린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이 뺑소니 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었다. 공사장에서의 다툼을 통해서는 젊음을 좀 더 뜻있고 가치 있는 일에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선생님의 사망은 다시 공부할 수 있는 동기와 용기를 갖게 했다. 약 세달간 주경야독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실기시험 때는 함께 입시를 치르던 지원자들까지 부채꼴로 둘러싸고 구경했을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선보이며 합격했다.

 

대학 시절 극사실주의에 몰두
우리 사회의 모순을 차별화된 
독창성으로 비판하는 
직접적·자극적 이미지 형상화

미군기지촌 영향으로 극사실주의 경향

대학교 1,2학년 때 극사실주의 화풍에 매료되었다. 3학년 때 접한 추상미술에서는 재미를 못 느꼈다. 순수미술적 경향이 강한 홍대 미대에서 극사실주의는 인정받지 못하는 장르였다.

한효석의 극사실주의적 경향은 신장동 미군기지촌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 시절 햄버거를 먹으러 친구 손에 이끌려 기지촌에 갔을 때 목격한 미군 병사와 한국 여성 2명의 난투극, 싸우는 어른들 옆에 나뒹굴던 혼혈 아이, 기지촌 골목의 어두운 풍경들은 평등, 인권, 생명, 인간의 도덕적 가치에 관심 갖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기지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동네 누나가 보여준 하이퍼리얼리즘 계통의 화집과, 중·고등학교 때 자주 놀러 갔던 선배 작업실의 사실주의적 그림들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학교 3학년 때 미국 잡지를 활용해 ‘내장이 터진 여성’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극도의 사실적 표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한효석의 작품은 호불호가 갈렸다. 어느 날 학교에 일찍 등교했더니 ‘내장이 터진 여성’을 그린 작품 2점이 사라졌다. 너무 화가 나고 실망해서 두달 동안 뉴질랜드로 날아가 학교 중퇴와 향후 진로를 고민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오면서는 ‘세상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경성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지도교사의 배려로 짬짬이 일찍 퇴근하여 작품을 그렸다. 추상과 부조를 결합하여 그린 ‘21세기에는 없었던 것들’이라는 작품을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하여 대상 없는 우수상을 받았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이나 중앙미술대전에서 대학생이 입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심사위원장은 ‘한참 성장해야 할 대학생이기 때문에 대상을 주고 싶었지만 겸손하게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우수상을 주었다’고 코멘트했다.

 

웃다리문화촌 전시에서는 
인간의 심연과 기후위기 
다룬 영상·설치 작품 전시

표현의 한계 느껴 입체작품으로 확장

‘고깃덩이 시리즈’는 감추고 싶었지만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한 표현이었다. 미군기지촌의 모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 인종과 인권,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그림 속에 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도덕적 가치가 하락했으며 인간이 부속품처럼 되어버린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미지화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것을 개념적으로 ‘언캐니(uncanny)’라고 정의했다.

한동안 ‘고깃덩이 시리즈’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캔버스와 페인팅의 한계를 느꼈다. 철학적 사고와 문제의식, 표현의 욕구를 분출하기에 물감은 확장성의 한계가 뚜렷했다. 근래에 영상과 설치미술을 활용한 입체작품에 몰두하는 이유다.

1월 13일~2월 27일 웃다리문화촌에서 화가 한효석의 전시회 ‘Meditation-Biwako-Mediterranean’이 열렸다.
1월 13일~2월 27일 웃다리문화촌에서 화가 한효석의 전시회 ‘Meditation-Biwako-Mediterranean’이 열렸다.

 

웃다리문화촌에는 세가지 작품을 전시했다. ‘Meditation-Biwako-Mediterranean’는 정보와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온전하고 건강한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는 명상작품이다. ‘Self’에는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포장된 외피가 아니라 내면의 실체를 통해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여타의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설치작품 ‘US’는 기후위기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탐욕이 빚은 기후위기가 결국에는 자연과 인간의 공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작품 속에 담겼다.

 

웃다리문화촌에 전시된 한효석 작가의 작품
웃다리문화촌에 전시된 한효석 작가의 작품

 

문화·예술에 도시를 먹여 살릴 힘 있어

대학원 졸업 후 대학강의를 하며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1년에 한 번씩은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기획전에도 초청되었고, 갤러리 아트사이드 전속작가로도 발탁되었다. 작가정신에 투철한 화가들을 발굴하여 세계 미술시장에 소개했던 갤러리 아트사이드 전속작가로의 발탁은 한효석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갤러리 아트사이드를 소개하면서 대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화가는 후견인의 도움 없이 성장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미술명문가 출신의 갤러리 대표는 화가들이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작업실과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효석도 갤러리 대표의 도움을 받아 작품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중국 베이징의 798미술특구에 개관한 ‘북경 아트사이드’를 통해서는 세계 시장에 이름과 작품을 알릴 기회까지 얻었다. 뉴욕 맨하튼에서 개최된 ‘제1회 뉴욕 아시아 현대미술 박람회’에도 출전했다. 영국 사치갤러리 큐레이터팀 리서치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 34인에 선정됐으며, 덴마크 갤러리 전속작가로 일할 기회도 얻었다. 잇따른 외국전시와 국내 미술관의 기획전 참여로 작가로서 입지가 단단해졌다. 2017년에는 국립인천대학교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한효석의 초기작은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극사실주의 작품을 통해 인본주의에 경각심을 일깨웠다. 근래에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명상작품,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 제기,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나 삶의 방향성을 되묻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에 
기반한 문화예술 발전 중요

한효석은 평택시의 문화·예술 발전에 관심이 많다. 평택지역에서 개최되는 미술전람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을 만큼 열정과 애정이 남다르다. 평택시문화재단 이사로도 활동한다. 한효석은 평택시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서는 지역의 정체성과 고유성에 기반한 문화예술 발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이 문화관광산업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지역예술발전을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를 물었다. 한효석은 수준 높은 ‘시립미술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규모 있고 수준 있는 시립미술관이 건립되어야 수준 높은 전시가 개최될 수 있으며 다른 도시, 외국 작가들과의 교류로 지역 예술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립미술관을 건립할 때는 ‘건축의 차별화’, ‘콘텐츠의 차별화’, ‘지역경제와 상생할 수 있는 방법 모색’ 세 가지를 고려하라고 당부했다.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릴 힘이 ‘문화와 예술’에 있다고 강조했다.

본지는 1월 24일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 소장이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인터뷰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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