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규의 문화살롱

대금연주자 최덕희
대금연주자 최덕희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머리맡에 라디오를 두고 살았다. 아버지가 즐겨들었던 프로그램은 ‘민요백일장’이다. 송창식과 산울림에 익숙했던 나에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는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내가 민요를 흥얼거린다. 어제도 저녁밥을 지으면서 창부타령과 육자배기를 흥얼거렸다. 노들강변도 심심찮게 흥얼거리는 레퍼토리다.

 

최초의 국악관현악단 창단 등

국악 현대화에 앞장 선

지영희선생의 영향으로 평택은 국악

현대화의 메카로 성장 중

국악은 익숙하면서도 귀에 설은 음악이다. 분명 가슴 깊숙이 박혀있는 정서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아주 오래전 국악인 김덕수가 ‘사물놀이’라는 장르를 들고나왔을 때도 그랬다. 마을과 들에서 연주하던 농악을 실내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이 특이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사물놀이’를 어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국악의 세계화가 김덕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해도 시비를 걸 사람이 없게 되었다.

문화는 다양해야 재미있다. 개성이 중시되는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창의적이고 다양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클래식 음악도였던 김호중은 성악 발성으로 트로트를 불러 ‘트바로티’라는 애칭을 얻었다. 국악인 송가인이 부른 트로트는 기존 가수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깊은 울림으로 인기 상승이다. 퓨전국악 밴드계의 아이돌 ‘이날치’는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 한 곡으로 MZ세대까지 국악공연장으로 끌어들였다.

평택 출신의 지영희(본명 지천만)는 국악현대화의 선각자다. 구음으로 전승되던 국악을 오선보에 옮겼으며, 궁중음악이나 농악을 제외하고는 협연이 어려웠던 국악을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국립국악오케스트라, 이날치의 퓨전국악, 송가인의 국악 트로트도 뿌리는 지영희에게서 비롯되었다. 김덕수도 지영희의 제자이며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원에서는 지영희의 제자와 후학들이 국악을 연마하고 있다. 지영희의 영향으로 젊은 국악도들이 평택으로 몰려든다. 젊은 국악도들이 조직한 국악그룹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퓨전국악그룹 ‘더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우연한 기회에 대금을 접했다

퓨전국악그룹 ‘더키’의 리더 최덕희(1991년생)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부산에서 태어나 고덕면 동고리와 방축리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학원에 다녔고 틈만 나면 PC방에서 게임을 즐겼다. 정월대보름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오곡밥을 얻어 먹었으며 논바닥에서 쥐불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시골에서 성장하다 보니 음악이나 예술을 접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사춘기도 심하게 앓았다. 한동안 공부에 흥미를 잃고 방황했다. 성적이 좋지 않으니 적당히 공부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장에 취직할 생각만 했다.

부모님의 강요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공부가 재미없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프로골퍼’가 되라며 골프를 시켰지만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답답했던 부모님은 ‘네 앞길을 스스로 찾아봐’라며 손을 놓았다. 비록 자유는 얻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게임방에서 신나게 게임을 하다가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걱정되었다. 게임을 하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걸그룹 멤버 가운데 국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 그것이다.

국악을 열심히 하면 예쁜 걸그룹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국악기를 찾아 나섰다. 그때 눈에 띈 악기가 대금이었다. 대금은 악기도 크고 소리도 중후해서 남성답고 멋있었다. 부모님께 국악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찬성했고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어머니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무 생각도 없던 아들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자 우선 기뻤던 것으로 생각된다. 며칠 뒤에는 천안에 출장갔다가 대금을 가르칠 선생님까지 구해왔다.

제대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던 문외한이 전문 교육을 받으려니 무척 힘들었다. 처음에는 오선보를 읽을 줄도 몰라 헤맸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재미가 있었다. 열심히 궁중음악과 산조, 현대국악까지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천안의 충남예고 편입시험에 합격했다.

 

사물놀이 김덕수도 지영희 제자이며

국립전통예고와 중앙대 국악대학원

에서는 지영희 제자와 후학들이 국악

연마 중, ‘더키’는 평택으로 몰려든

젊은 국악도들이 만든 퓨전국악그룹

젊은 국악인들과 퓨전국악그룹 ‘더키’ 조직

예술고등학교에 편입해서는 한동안 구설에 시달렸다. 어려서부터 전문적으로 배운 친구들보다 실력도 부족했다. 모든 조건은 힘들었지만 ‘재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실력으로 모든 구설수를 잠재우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연습했다. 실력도 쑥쑥 성장해서 졸업 직전 ‘충남예고 국악의 밤’ 행사에서는 ‘대금 독주’를 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출중한 실력과 대금독주회를 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동국대 한국음악과에 합격했다. 입학 초기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1학년 1학기 때 교양과목에서 F학점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1학년 2학기 때부터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3학년을 마치고 국방부 군악대로 입대하면서부터는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다른 친구들은 총을 들고 훈련받는 동안 군악대에서는 종일 연습만 했다. 야간연습 후 라면을 끓여 먹는 재미도 연습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복학 후 1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시카코의 불타사라는 사찰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어학연수생을 모집하는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위치와 향후 진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한국의 현실에서 국악 연주자로만 살아가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대금연주자보다는 예술경영 쪽으로 방향전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귀국하여 악기도 내려놓고 예술경영도 접어둔 채 어머니 사업만 도왔다. 3년 동안 카페에서만 일하다 보니 국악은 먼 추억이 되었다. 그를 다시 국악계로 끌어들인 사람은 중앙대 송선원 교수다. 송 교수는 부친을 통해 예술교육 활성화학교인 내기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내기초등학교에서 대금을 가르치다 보니 몇몇 초등학교에서도 초빙했다. 초등학교 국악수업을 하면서 장원진(피리), 이영찬(피아노)을 비롯한 일련의 음악인들과 만났다. 이들과 의기투합하여 2019년 ‘더키’라는 퓨전국악그룹을 만들었다.

 

 

코로나19로 좌절했지만 다시 일어서

국악그룹 ‘더키’는 국악연주와 교육, 공모사업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단체가 결성되자 공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20년 1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모든 공연과 교육이 중단되었다. 생존의 위기 속에서 단체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단원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시 뭉치자는 약속만 남긴 채 각자도생의 길로 나섰다. 최덕희는 평택민요보존회 기획팀장이 되었고 장원진은 평택농악 청년연수단원으로 입단했다.

평택시문화재단의 설립은 죽어가던 ‘더키’를 소생시켰다. 최덕희는 국악을 매개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2021년 ‘더키’는 평택시문화재단 공모사업에 지원했다. 급속히 변화 발전하는 평택시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문화 정체성 확립’이라고 판단했다. 평택지역의 ‘보호수’를 조사하여 국악이라는 언어로 문제 제기하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보호수를 주제로 서도민요를 작곡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민세 안재홍 생가에서 사진과 국악연주 영상, 안재홍이 여유당전서를 발간하는 과정을 담은 AR을 제작하여 전시회를 개최했다. 2021~2023년 성균관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하며 관심을 가졌던 ‘폐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 거점 공간 조성사업’에 참여했다. 몇 년 동안 방치되었던 고덕면 방축리의 폐공장을 리모델링하여 공연·전시·공방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음악회와 다도 교실, 공예작가 전시, 사진 전시, 바리스타 교육을 진행했다.

‘더키’의 콘텐츠는 매우 신선했지만 대중 반응은 건조했다. 문화 마케팅이나 문화 유통을 모르는 상태에서 ‘열심히 활동하면 언제인가는 알아주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지난해 최덕희가 결혼하고, 삶의 공간인 집과 문화예술 거점 공간이 지제역세권 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향후 진로가 모호해졌다.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국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연주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경기아트센터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기획실에 취업한 것도 생활고와 막연한 미래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올해 창단을 앞둔 평택시국악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연주자로서 생명을 잇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최덕희는 평생 국악인으로 남고 싶다. 하지만 국악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후배들에게 국악을 전공하라고 권유하고 싶어도 막연한 현실 때문에 주저된다. 평택의 국악예술이 발전하려면 지역대학에 국악과를 설치하고 국악 창작을 지원해야 한다. 지자체가 국악의 대중화와 풀뿌리 국악인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할 필요도 있다. 예로부터 예술가들이 부유했던 적은 없긴 했어도 생존권까지 위협당하는 현실에서 앞길이 막막하다.

 

올해부터 매월 넷째 주에 ‘김해규의 문화살롱’을 싣습니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이 만난 다양한 문화예술인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의 평택 문화를 향한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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