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가 보기에 대동법시행기념비는 국보급 문화재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0호인 ‘대동법시행기념비(조선국영의정김육공대동균역 만세불망비)’ 뒤편에 상가(2종 근린생활시설) 신축이 이뤄지는 것을 두고 기념비를 보존하라는 지역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보존방안으로는 기념비가 위치한 소사동 일대를 평택시가 매입해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7월 기념비가 위치한 소사동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두고 평택시가 연구용역을 진행한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기념비가 국보급의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기념비 보존과 역사문화공원 조성 의견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주장을 제기한 이는 백승종(64) 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백 교수에 따르면 기념비는 대동법의 역사적 중요성과 비문의 예술적 측면에서 국보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히려 문화재로서 과소평가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택시민신문>은 세교동의 한 카페에서 기념비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백 교수는 서강대학교에서 문학석사,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뒤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훔대학교와 베를린자유대학교의 한국학과장,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와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등을 맡았다. 현재는 평택에 거주하면서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 각각 ‘금요칼럼’과 ‘역사와 현실’이란 칼럼을 연재하며 역사를 통해 오늘날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도시로 보는 유럽사>,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조선의 아버지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생태주의 역사강의>, <신사와 선비>, <금서, 시대를 읽다>, <역설> 등 여러 책을 썼다.
대동법시행기념비 재평가 필요
“역사가의 관점에서 대동법시행기념비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대동법은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환영받은 성공한 개혁이자 조선 후기에 단행한 사실상 유일한 개혁입니다.”
백 교수는 대동법의 역사적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현재 경기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당시 기념비를 평가한 사람들과 시민들이 비석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과소평가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대동법은 조세 부담을 낮추기 위해 백성들에게 부과된 각종 세금을 모두 쌀로 내도록 한 제도다. 대동법 실시 이후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은 징수한 쌀을 지불해 민간으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거나 인력을 사역했다. 결과적으로 현물·노역 등 백성들에게 부과된 각종 세금을 줄이고 관청의 물품 구매로 조선의 유통 발전과 시장경제 활성화를 불러왔다는 평가다.
이 대동법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효종 5년(1654년) 영의정 김육이 충청도 지방에서 대동법(호서 대동법)을 시행하고 성과를 거두면서다. 백교수는 기념비가 본격적인 조선 후기의 조세개혁을 후세에 알리는 이정표라고 설명했다. 호서 대동법의 시행과 성과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호서지방에서 성공했기에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도 백성들의 압도적인 환영 속에서 대동법을 도입할 수 있었다”며 “게다가 기념비는 정부나 김육의 후손이 아니라 대동법 시행으로 시혜를 본 충청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비석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기념비는 시대를 넘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민에게 필요한 개혁이 있다면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며 현실과 미래의 등불 역할을 한다”며 “기념비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평택시장은 기념비의 의미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사원터와 삼남대로 복원해야
백 교수는 기념비를 둘러싼 현 상황이 유일한 선택이었는지 고민된다고 한탄했다. 문화재심의위원회가 신축 조건으로 높이에 제한을 둔 것은 옳은 선택이나 가설 울타리로 둘러싸인 현재 기념비 일대를 생각하면 더 신경 써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개발허가가 난 것은 차치하더라도 제대로 된 안내 표지나 설명도 부족한데 주변에 가설 울타리까지 둘렀으니 누가 기념비를 중요한 문화재라고 인식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기념비가 주민들에게 골칫덩이로 천대받는 점도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기념비가 마을에 있는 것을 환영하기보다 지역발전과 재산권 행사에 지장을 줄까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대로 가면 평택에서도 문화재가 있는 것을 환영하기보다 두려워해 문화재를 발견해도 이를 숨기거나 파괴하려 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우선 주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재산권과 이익을 침해받는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문화재를 지키려고 들겠는가”라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면 지역민을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이를 위해 기념비 보존방안으로 소사원 복원을 제안했다. 역사공원을 추진한다면 옛 관리들이나 여행객의 숙소였던 소사원터를 매입한 뒤 경기옛길과 연계해 삼남대로의 일정 구간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그는 “삼남대로는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길 중 하나다. 소사원은 바로 이 삼남대로 중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던 중요한 호텔이자 역인 셈”이라며 “기념비도 본래는 이 소사원터에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헌과 유물·유적이 얼마나 뒷받침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참에 소사원을 복원해 문화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며 “삼남대로 일부 구간을 복원하고 소사원터를 학습과 전시 공간으로 만든다면 대동법 시행기념비도 본래 자리로 옮겨올 수 있고 주민들도 일방적으로 재산권을 침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물로 승격된 순천 팔마비 사례 참고해야
백 교수는 문화재를 지키려는 사람과 문화재 주변 주민들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순천 팔마비를 사례로 들었다. 팔마비는 고려 말 청백리 최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그는 “과거 순천시가 주관한 행사에서 팔마비를 국보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았다”며 “2019년 11월엔 팔마비를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고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순천에선 팔마비를 국보로 승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시와 시민이 공감대를 형성한 끝에 올해 3월 국가지정문화재 중 보물 2122호로 지정받았다”며 “대동법시행기념비는 팔마비보다 큰 의미가 있는데 정작 평택에선 공무원과 시민 모두 관심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아울러 “지자체장이라면 모름지기 주민들이 기념비를 원망하지 않도록 재산권을 보호하면서 문화재관리에 앞장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파면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국제도시로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평택은 기념비를 비롯해 문화자원을 적극 보존·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미군들이 평택을 술집 외에는 볼 것 없는 동네라고 기억하면 안 된다. 한국은 미군의 점령지가 아니다”라며 “평택은 그들이 서울 경복궁이나 경주에 가지 않아도 한국을 알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서울이나 경주에 가야만 한국문화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말로만 문화 행정, 국제도시라고 할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한국에 대한 미군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친구가 될 준비를 마쳤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평택이 가진 자산을 미군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지역사회 구성원인 그들도 다양한 문화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평택의 문화자원을 활용한다면 기지촌과 군사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동법시행기념비는 효종 1659년(효종 10년) 충청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설치한 비석이다. 1651년 영의정 김육이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다. 본래 김육 사후 충청도 백성들은 뜻을 모아 조의금을 내고자 했으나 김육의 집안에서 이를 받기 거부해 대신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기념비는 대동법 시행 목적, 성과, 김육의 공을 담고 있다. 비문은 지봉 이수광의 아들인 홍문관부제학 이민구가 짓고 당대 명필로 꼽히는 의정부우참찬 오준이 썼다.
기념비는 “무인년(1638년) 김 상국(김육)이 관찰사로 부임해 장부를 꺼내보고 백성을 살릴 방법이 다른 데 있지 않다고 탄식했다”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연구해 잠자는 것과 먹는 일까지 잊어가며 이 법을 실시하기 위한 세밀한 계획안을 마련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동법 시행 효과에 대해선 “각 군의 대소를 막론하고 오직 토지의 실결수에 따라 한 결에 쌀 열 말씩을 징수하고 산간벽지와 먼바다의 오지는 쌀에 준하는 만큼 베로 징수했다”며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내게 되니 백성들이 편안히 땅에서 농사에 힘쓰게 돼 시골 마을에 성치라는 노랫소리가 퍼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김육은) 많은 사람의 반대와 비난이 있었으나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더욱 치밀한 계획과 확고한 신념으로 백성들의 시급한 고통을 풀어주고 한 지역의 안정된 정책을 수립했다”며 “풍비를 길가에 세워 상국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자 하니 이것은 호서 백성들의 뜻”이라고 명시했다.
당초 기념비는 경기도에서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삼남대로 길목인 소사원에 세워졌다. 소사원과 기념비는 현재 자리에서 남동쪽으로 50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나 1970년대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