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주년 기념 미니콘서트 및 붓글 전시회 열어

정태춘이 200여명의 팬들 앞에서 미니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평택시민신문] 한국 대중음악사의 거장 정태춘이 고향 평택에서 40주년 기념 전시회를 개최했다.

지난 29일 정태춘은 40주년 기념 전시회 '정태춘 박은옥 스페이스 40 @평택-들 가운데서'를 개최하기 위해 평택을 방문했다.

배다리 도서관이 후원하고 미듬영농조합법인, 정태춘 박은옥 40프로젝트 사업단이 주최한 이번 전시회는 1차 공연 및 전시와 2차 네트워크 파티로 구성됐다.

평택 시립 배다리 도서관에서 열린 1차 공연 및 전시는 정장선 평택시장, 미듬영농조합법인 전대경 대표를 비롯해 200여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1차 공연은 정태춘의 기타연주와 함께 초기 앨범 수록곡 ‘촛불’로 막을 열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평택에서 공연하는 것이 부끄럽고 낯설다”는 정태춘의 인사 멘트를 시작으로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등이 연이어 펼쳐졌다. 이어 깜짝 등장한 박은옥 씨는 ‘꿈꾸는 여행자’와 ‘사랑하는 이에게’ 듀엣 공연을 선보였고, 정태춘의 서사적이고 힘찬 보컬이 느껴지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끝으로 1차 공연이 마무리됐다.

정태춘은 이날 공연에서 “10년 정도 노래를 만들지 않으면서 내 이야기를 붓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며 붓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죽을 때 까지 글로 내 이야기를 표현하겠다고 다짐했고, 데뷔 4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말했다.

2차 네트워크 파티는 미듬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푸른 바람을 만나는 곳’에서 진행됐다. 파티에는 권영화 의장, 이종한, 유승영 시의원을 비롯해 김해규 평택문화연구소 소장, 최치선 평택향토사연구소 상임위원 등 60여명이 참석해 전시를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는 △일어나라, 바람이분다 △들 가운데서 △오서오담 등 시인 정태춘의 붓글 작품과 더불어 △최초의 심장(정정엽 작가) △꿈꾸는 여행자 (유진숙 작가) △동박새와 동백(강종열 작가)등 정태춘 박은옥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는 이들의 헌정 작품들로 채워졌다.

미듬영농조합법인 전대경 대표는 “오랜 팬이었던 장태춘 선배님의 공연을 개최할 수 있게 돼 영광스럽다”며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 평택에서 시민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김준기 감독은 “정태춘 선생님이야말로 1970년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 삶의 모습과 정서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아티스트”라며 “이번 전시회를 통해 평택을 고향으로 한 정태춘이라는 예술가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태춘의 친구이자 공연 진행을 맡은 최치선 평택향토사연구소 상임위원은 “정태춘은 60~80년대 치열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40년 동안 변함없이 예술가로서, 시인으로서 일관된 목소리로 세상에 메시지를 보낸 친구”라며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현대사회에서 정태춘이라는 아티스트는 시간이 갈수록 평가되고, 연구되고,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고향에서의 공연 쑥스럽지만 그만큼 감회 남달라”

평택중학교 현악반에서 배운 바이올린, 음악활동에 큰 영향
노래와 시는 표현방식 달라도 꾸준히 나의 이야기를 한 것

가수/시인 정태춘

■ 평택에서 공연과 전시회를 개최한 소감은?

도두리라는 시골동네에서 기타를 처음 알고 연습하게 됐는데 조금 재능이 있었나 보다. 평택중학교 현악반에서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것을 넷째 형님이 알게 돼 바이올린 수업을 등록을 하게 됐다. 그렇게 바이올린을 5년 정도 배운 것이 음악활동을 하는데 토대가 됐고 큰 영향을 미쳤다.

몇 년 전에 평택에서 콘서트를 한 적이 있는데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러면서 고향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구나라고 느꼈다. 오늘도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는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놀랐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고향에 오면 쑥스러워서 공연하는 것이 늘 조심스럽다. 공연이 끝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데 그만큼 감회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 가수 정태춘에서 시인 정태춘이 된 이유는?

시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노래를 그만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시 집 두 권 분량의 시를 썼다. 노래로 표현해 오던 것들을 글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도 굉장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사람이라 노래는 하지 않았지만 한시도 쓰고 사진전도 열면서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표현해 왔던 것 같다.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꾸준히 나의 이야기를 해왔고 여전히 하는 중이다.

■ 최근 활동을 재개하면서 주목받는 것에 대해

지난 10여년 동안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언론 노출을 꺼려 왔다. 스스로도 이렇게 조용히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40주년을 맞아 콘서트, 전시회, 책 출판 등 여러 가지를 진행하다보니 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과한 관심과 반응에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우리 부부의 40주년을 축하하는 환대가 감사하지만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나는 사실 우리사회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고향에 살 때에도 늘 떠날 생각을 했고 그런 노래들을 불렀다. 군대에서도 결혼을 해서도 시인의 마을, 서해에서, 북한강에서 같은 떠나는 이야기만을 노래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떠나려는 자세에서 현실을 바꾸자는 쪽으로 생각이 변했다.

내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거나 박수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때때로 ‘대중음악 판에 저런 사람 하나 정도 있을법하다’고 동의하는 분들이 주의 깊게 봐주시는 것 같다.

사진=안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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