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현실 바뀌길 원했던 성리학자의 넋이 깃든

▲ 도두1리 마을 전경
땅 한평 없는
농민들에게
도두리 갯벌은
그들의 희망이었다


허허벌판에서
땔감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따기라
딸 시집보내기 꺼려


■ 민중들의 엘도라도

올 여름은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3, 4일 동안 지겹게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던 날 가방을 챙겨들고 답사를 나섰다.

오늘 답사는 함정리와 도두리다.

함정리 말랭이 마을 노인정에서 20여 명의 노인들과 인터뷰를 하다가 도망치듯 빠져 나와 도두리에 들어섰다.

무더운 날씨 탓인지 노인정에는 아무도 없고 마을 앞 느티나무 평상에만 베잠방이를 걸친 노인 한 분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자신을 송서환(75세)라고 소개한 이 분은 부친 때 화성군 팔탄면에서 도두리로 입향한 후 4대 째 마을을 지키는 토박이였다.

도두리는 국민가수 정태춘의 고향이다.

그의 “에고 도솔천아”라든가 “탁발승의 새벽노래”와 같은 명곡들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본래 “돛대머리”라고 불렸다.

100여 년 전 만해도 마을의 모양이 도당산에서부터 돛대처럼 길게 뻗어있었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도당산 아래 돈두암까지 들어왔다. 돈두암 옆에는 나루(뱃터)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들판뿐인 이곳을 노인들은 “뱃터”라고 부른다.

도두리의 역사는 민중들의 역사, 간척의 역사다. 이곳의 간척은 조선 말기에 조금씩 진행되다가 일제강점기 산미증식계획과 6.25전쟁 후에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처음 간척된 곳은 뱃터부근 구원들과 보미사논이었다. “구원들”이란 아홉 개의 작은 간척지를 말한다. “원”이란 소규모 간척지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미사논”이라는 지명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서 송서환 옹에게 물었더니 “봄에 제방을 쌓아 만든 논”이라고 하였다.

농경지가 형성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향에서 살 수 없는 이유를 하나 쯤은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이주한 것은 마을 서남쪽 구릉지대에 살고 있던 “도두리마을” 사람들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도둑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이주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고향이라는 것은 호주머니의 휴지처럼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척지는 무산계급에게 희망을 꿈꿔 볼 만한 땅이었다.

간척사업이 아무리 어렵다고는 해도, 송곳 하나 꼿을 만한 땅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희망의 엘도라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일제 말경에는 100여 호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갯벌은 점점 농토로 변해갔다.


■ 돈두암에 얽힌 사연

돈두암은 마을의 상징이면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절벽 중앙에 바다를 향하여 돌출한 모양이 흡사 노스님 대머리 같기도 하였고, 바다를 사모하는 처녀의 젓가슴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돈두암이 있는 도당산 정상에 돈두정이라는 누정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누정은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천하의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끌었고, 화성군의 당항성으로 가는 나그네의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중세로 접어들며 해상교통이 막히자 돈두정은 끈 떨어진 연이었다.

사물도 사람의 관심과 사랑에서 멀어지면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큰 바위에는 신령이 깃들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풍광이 수려한 절벽에 달마대사의 대머리처럼 불쑥 솟은 바위이고 보니 사람들의 정성이 비껴갈 수 없었다.

마음이 깃든 곳에는 전설도 한 개쯤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돈두암에는 장수발자국 전설이 전해온다.

어지러운 시절에 세상을 구하려고 힘세고 용맹한 장수가 나타나 이곳에서 훈련하다가 바위에 남긴 발자국이란다.

이같은 전설은 안중읍 용성리 비파산성이나, 현덕면 권관리 왕좌봉, 청북면 토진리 고좌마을에도 전해온다.

이들 지역은 바다가 가까워 집도 절도 없는 민중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고 해양을 옆에 두고 있어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가장 큰 염원은 배고픔과 생명의 안전이었다. 이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애기)장수전설”에는 이 지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새시대를 향한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팽성지에는 돈두정에 관한 가슴 아픈 사연이 전해온다. 16세기의 이름 높은 처사 우남양에 관한 이야기다.

우남양은 당대의 혁명가 조광조나 최수성 등과 교유하였던 학자였다.

그는 부패하고 노회한 훈구파의 기득권에 맞서 성리학의 원칙에 따라 세상을 바꾸려던 조광조 등과 뜻을 같이하였고, 실생활에서 경(經)과 예(禮)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그랬던 우남양은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개혁이 실패하자 실의에 빠졌다.

그러다가 돈두암 바위에 머리를 부딛쳐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

원칙에 충실했고 부패한 현실이 바뀌기를 바랐던 성리학자의 죽음이었다.

역사적으로 수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돈두암은 이제 길 옆의 작은 바위에 불과하다. 도당산 주변이 간척되면서 흙을 돋아 지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6.25전쟁 전만해도 도당산 정상에는 커다란 엄나무가 그늘을 드리워 마을 사람들의 정자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엄나무 정자 주변에는 널찍한 공터도 있어서 정월 대보름에는 씨름대회도 열렸다. 하지만 6.25전쟁 중에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들이 군복을 위장하기 위해 가지를 자르면서 시들어 죽어버렸다.


■ 딸을 낳으면 도두리로 시집보내지 않는다

도두리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았던 마을이다.

초기 흑무개들이나 구원들, 보미사논을 간척하였던 사람들이나, 일제 말과 1960년대 전후 온통 갯벌뿐이었던 도두리들에 제방을 쌓고 희망을 씨앗을 뿌렸던 사람들은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낮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질퍽한 갯벌에 집을 짓고 논을 만들었지만 그 땅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물이 귀해서 웅덩이 물에 백반을 갈아 넣어 먹다가, 도당산의 신령함에 기대어 돈두암 옆에 우물을 팠지만 오래지 않아 말라버렸다.

물이 나빠 호열자 같은 전염병이 돌면 수 십 명씩 죽어가기도 하였다.

염분 때문에 애써 심은 나무도 말라죽었다. 조금만 비가와도 질퍽대서 걸어 다닐 수조차 없었다. 농업용수 얻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벼들이 익기 시작하는 8월의 백중사리가 되면 간만의 차가 9미터나 되는 아산만의 거센 밀물은 해일을 일으켜 제방을 무너뜨리고 애써 지은 농작물을 폐허로 만들었다.

사방이 갯벌뿐인 허허벌판에서 땔감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바닷물에 밀려오는 나뭇가지(쇠비)를 말려 때는 것은 물론이었고, 30리가 넘는 아산의 영인까지 나무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정말 도둑질 말고는 안 해본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래서 주변 동리에서는 “딸을 낳으면 도두리로 시집보내지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내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고 ‘그럼 이 마을 총각들은 장가가기 힘들었겠네요?’라고 농담을 하자, “그래도 장가 못가 총각귀신으로 늙어 죽었다는 사람은 없었지”라며 껄걸 웃었다.

이렇게 척박하고 고단한 땅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본래 간척이라는 것이 대규모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라서 국가나 권세가들의 힘이 아니면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드넓은 흑무개들이나 도두리들이 그러했다.

도두리 주변 농지의 대지주는 대추리의 방준용 씨였다. 해방 전후만 해도 대지주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소작농들은 신년에 소고기라도 한 근씩 바쳐야 소작권이 유지되었다.

한 번은 송서환 옹도 새 해가 되어 소고기 세근을 들고 방준용 씨 집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소고기를 넣어두려 광에 들어갔다가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광에는 소갈비와 소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썩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두리 마을의 가난을 벗겨낸 것은 1973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다.

방조제 건설로 마을을 괴롭혔던 수해, 염해, 농업용수 부족, 만성적 가뭄 등 어두운 그늘이 한꺼번에 걷혔다.

그리고 사람들은 꿈에 그리던 부자가 되었다.

<지명이야기 designtimesp=21998>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