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흥 락 평택농민회

반세기를 훌쩍 넘은 분단의 시간 속에 살아왔건만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평택농민 방북대표단은 출발 하루 전날 7월 16일 평택을 떠나 속초로 향했다. 가뭄으로 두 번이나 연기되었던 방북이 기다리는 시간동안 또 연기될까봐 하는 걱정과 혹시라도 늦으면 갈 수가 없다는 노파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전체 681명의 대표단 중 평택지역 농민은 10명이었다. 회원들은 모두 최소한의 짐과 간편한 복장으로 속초항에 모였다. 긴장과 걱정으로 지샌 그 전까지의 시간들과는 다르게 북쪽에서 가슴 가득 통일의 열정을 담아오려는 듯 마음들이 넉넉해 보였다. 생각보다는 까다로운 통관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설봉호의 뱃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고 바닷길을 만들며 출발함과 동시에 그 동안의 어려움은 모두 지워지고 말았다. 통일이란 이런 것일까? 수구보수세력의 갖은 탄압과 시련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야만 될 그런 것일까? 통일이 되면 지금의 이런 고통과 서러움은 모두 없어지고 앞으로 건설될 한민족의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는 희망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말 못하는 바다도 남북농민들의 통일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랬는지 북으로 달려가는 뱃머리에 몸을 부딪혀 무지개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세시간 북쪽으로만 향하던 배가 육지로 방향을 틀었다. 아! 북녘 땅이구나! 고성항에 도착한 우리는 차례차례 통관절차를 밟았고 전혀 낯설지 않은 북녘의 땅 우리의 조국에서의 첫 날을 맞았다. 밤 9시가 넘어서 도착해서인지 많이 어두웠다. 고성군 온정리에 있어서 인지 따뜻한 정을 나누라는 뜻으로 온정각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인지 모르지만 온정각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숙소는 설봉호가 아닌 5km떨어진 현대직원의 숙소였다. 간간이 버스불빛사이로 북쪽의 군인들이 서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은 많이 흘렀고 우린 간단한 평가와 계획을 짜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18일 아침이 밝았다. 창문사이로 맑은 공기가 들어왔고 전날에 밤이라 몰랐던 금강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버스를 이용해 온정각으로 갔다. 군데군데 마을이 보였고 학교 가는 어린아이들과 출근하는 어른들을 볼 수가 있었다.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설봉호에서 첫날밤을 보낸 일행과 함께 우린 남북농민통일대회장으로 가기 위해 대열을 정비했다. 우리는 두팀으로 나누어 입장을 했다. 경기도와 전북,경북,제주도가 자주팀이었고 나머지가 단결팀이었다. 행사장은 김정숙 휴양소의 운동장이었다. 김정숙 휴양소는 북쪽의 존경을 받는 김정숙의 업적을 기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휴양소라 했다.

우리가 입장을 할 때 북쪽의 농근맹 사람들이 함께 우리대열로 자연스럽게 합류하였고 같이 뒤섞여 의자에 앉아 행사를 기다렸다. 행사는 '민족의 시원한 지맥으로 잇닿은 그 땅에서 근면성과 땀을 바쳐가듯이 조국통일의 위업을 위해 땀을 바치자'는 성상섭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성상섭 위원장과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통일 국가를 건설하자'라는 정광훈 전농의장의 연설로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여성위원회 허덕범위원장은 '높은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반외세,반통일세력에 맞서 싸우자'라고 발언을 했고 전여농 윤금순 부의장과 농근맹 김수영 부장의 연설이 이어졌다. 잠시 우리의 개회식 같아 보이는 통일연단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었고 같이 섞여 있던 북쪽의 농근맹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가뭄피해는 없습니까?'라는 일상적 대화와 함께 6·15공동선언이 우리를 만나게 했다 더욱더 통일을 위해 매진하자라는 대화가 오고갔다.

정말 이렇게 열려진 공간에서 남북의 농민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어서 남북 예술단들의 문예공연을 보았다. 너무나 많이 빠르게 미국식으로 변하는 우리의 문화와는 다르게 북쪽의 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승화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우리는 근처의 솔밭으로가 북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전통 된장이라는 토장이었다. 우리의 된장과 비슷한데 된장보다는 더 탁한 색이었고 맛은 더 깊은 듯 했다. 경기도는 황해남도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했고 식사 후 흥겨운 노래자랑 시간도 가졌다. 정말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다. 이후 자주팀과 단결팀으로 나누어 민속경기를 하였다. 진행자의 재미있는 입담에 함께 웃고 즐기며 씨름경기부터 대동놀이까지 옆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동네 체육대회를 하듯 우린 더 이상 적도 원수도 아닌 그저 옆집 형님과 아우였다. 같은 민족이라서 일까? 아무런 긴장과 부담없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정겨운 행사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헤어지고 우린 남의 소주와 북의 용성맥주를 섞어서 통일주를 만들어 간단히 그날을 평가하고 잠을 청했다.

19일은 금강산을 등반하고 남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날이다.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운 천하절승이었다. 하지만 남북농민들의 통일열기 그 빛을 다 발휘하진 못한 것 같다. 이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금강산을 다시 한번 찾아가고 싶다. 우린 목란각에서 점심을 먹고 폐막식에 참가했다. '안녕히 다시마나자'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나자' 참아도 참아도 눈물은 계속 흘러 가슴까지 닿아 있었다. 2박3일의 만남. 아니 하루의 만남에 이리도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무엇 때문일까?
내가 본 북은 자본주의에서 물질적 풍요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우리와는 다르게 미국의 간섭에서 당당하고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남북의 농민들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대를 할 것을 결의했다. 우리도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자. 이 시대 최고의 애국은 통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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