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 ⑥

부락산 자락 이정함 선생 묘소
부락산 자락 이정함 선생 묘소

평택 북부지역의 주산인 부락산(높이 143m)은 고려 승장 김윤후, 임진왜란 당시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이정형 형제,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 판소리 근대5명창 이동백, 민족 지도자 민세 안재홍, 가난했던 국민화가 박수근, 기지촌 쑥고개의 삶을 노래한 박석수 시인 등 역사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삼남대로 대백치에서 이충동 동령마을로 내려오는 흔치고개, 흔치휴게소를 지나 소골로 내려가는 고갯마루 서낭당, 400년 전통의 정제와 줄다리기가 남아 있는 동령마을 등 역사문화자산도 풍부하다. 특히 북부지역의 유일한 생태 휴식 공간으로서 부락산과 덕암산을 잇는 생태통로는 주말이면 1000명이 넘는 시민이 이용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부락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꾸준히 고민해온 황우갑 민세아카데미 대표와 부락산의 역사문화자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장소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지에 관한 글을 기획하여 매월 1회 연재한다. 앞서 황우갑 대표는 본지에 국내 공간문화재생 사례, 퇴역 평택함을 활용한 평택시의 장소마케팅 전략, 해외 문화예술 공간 탐방 등의 기획을 게재하며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통찰력 있게 제시해왔다. ‘부락산권의 역사문화자산과 장소정체성 찾기’가 평택의 정체성과 문화 다양성을 확립하는 데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역사인물 재조명에 대한 관심 속에 알게 된 집안 중시조 장무공 황형 장군

1983년 대학 입학과 함께 평택북부 지역 청년문화단체 송암회에서 활동했다. 격변의 80년대를 이런저런 고민속에 마쳤다. 89년 말 군 제대 후 수 년간 사회진출의 고민 속에 방황도 많이 했다. 1993년 민세아카데미 대표를 맡아 현재까지 고향에 뿌리내리며 교육문화 운동을 하고 있다. 그간 지역 역사인물 선양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인물 선양 활동을 하면서 가끔은 필자 선조 가운데 훌륭한 일을 한 분이 있는지 궁금했다. 선친의 고향이 인천이고 모친의 고향은 김포였다. 조부와 조모 산소는 강화도에서 북한땅이 보이는 곳 어디였다. 90년대 초에 집안 내력과 족보를 보면서 창원황씨 장무공파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장무공파의 시조는 황형 장군이다. 인천 큰댁에 가면 큰아버지가 족보를 보여주면서 집안 조상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는데 그때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매년 명절이 되면 강화도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다가 인천 계양산 입구부터 엄청나게 차게 막혀서 성묘를 포기하고 돌아온 일도 많았다. 그 후에 역사인물 관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안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년전 코로나 시기에 장무공 황형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강화도에 묘와 사당도 있고 연미정이라는 정자가 관련 사적으로 소개되었다. 장무공 황형장군기념사업회도 있었다. 판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집안 먼 친척인 황우여 전 교육부장관도 참여하고 있다.

 

황형 장군 집터.
황형 장군 집터.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장무공 황형 장군

창원황씨인 필자 집안의 중시조인 장무공 황형 장군은 1510년 일어난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무장이다. 조선은 건국 후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조정의 명을 어기고 거류민의 수가 2천 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 간에 자주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가하자 일본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3포의 일본인들은 대마도주의 원조를 얻어 5천 명으로 폭동을 일으킨 삼포왜란이 1510년(중종 5년) 발생했다.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중종은 황형 장군을 경상좌도방어사로 임명하여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니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장무공은 육지에서 기마병을 이끌고 당시 무사들이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칼날에 깃털을 단 칼을 사용해 왜군을 제압해 승리할 수 있었다.

 

강화 8경의 하나인 연미정과 황형 장군 집터

휴일에 강화도로 가는 길은 늘 교통이 막혀서 그리 쉽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몇 번 계획했다가 중단했다. 그래서 올해 설 연휴에는 큰마음 먹고 강화 시내에서 하루 자면서 황형 장군 유적지를 돌아봤다. 강화읍에서 동쪽 해안선을 따라 3km 가면 연미정이라는 곳이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지역이고 바로 아래에 해병부대가 있는 곳이라 경비가 삼엄하다. 그 연미정 아래에 황형 장군의 집터가 있다. 여기서 4km 정도 더 가면 평화전망대가 나온다. 북한땅 연백평야와 멀리 개성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242에 있는 정자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8경 중에 하나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1244년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에 중종은 1510년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 현재도 연미정과 주변 땅이 후손인 창원 황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후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1627년 정묘호란때에는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다. 아이들에게 연미정의 유래를 설명하고, 황형 장군의 집터 내력을 소개하면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기회가 되면 황형 장군의 묘소와 사당인 장무사도 방문해보려고 한다.

 

강화도 연미정
강화도 연미정

 

 

도둑이 나타나면 들을 비우고 굳게 지키기를 이정암이 연안을 지키듯 하라

부락산의 역사인물과 관련해서 고려 승장 김윤후,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에 이어 세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1592년 임진왜란기 황해도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과 그 부친, 형제 이야기다. 필자가 부락산 자락 동령마을에 처음 온 것은 벌써 40년 전 효명고 동창이자 외우인 이충우 온샘 대표와 고2때 늦가을에 함께 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 대표는 20년 넘게 6차 산업으로써의 한국농업의 미래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토종 바밤단호박을 개발한 농업법인 대표이다. 그때 이곳 어딘가 땅콩밭에서 함께 땅콩을 캐며 이대표의 자랑스러운 선조인 경주이씨 가문이 부락산 일대와 방혜동 마을에 내려와 정착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락산 자락 일대 상당수 토지가 경주이씨 문중 소유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후에 부락산과 관련한 역사인물 조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방혜동 경주이씨 집안이 임진왜란기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의병장 이정암과 관련이 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연안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8월 28일부터 9월 2일에 걸쳐 이정암이 의병을 이끌고 연안성에서 구로다의 왜군과 싸운 전투이기도 하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연속적인 패배속에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는 데 크게 기여한 한산대첩과 뒤이은 의병장 이정임의 연안대첩은 임란 전쟁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후에 이런 공적이 인정을 받아 이정암은 김시민, 이억기 등과 함께 선무 2등 공신에 오른다. 조정에서는 후에도둑이 나타나면 들을 비우고 굳게 지키기를 이정암이 연안 지키듯 하라고 했다.

 

이정함 선생 묘비명
이정함 선생 묘비명

 

1927년 신간회 지회 설립 순회 강연때 연안대첩비를 답사한 민세 안재홍

평택 출신의 민족운동가 민세 안재홍은 1927년 여름 신간회 해주지회 설립 대회 등을 독려하기 위해 황해도 일대를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연백읍내를 들러 연안대첩비를 답사하기도 했다. 1년전 봄인 1926년 봄에는 영호남 기행을 다녀왔는데 이때도 동래성, 진주성, 운봉성과 남원성 등 주요 임진왜란 사적지를 답사하고 그 감회를 신문에 연재했다. 1927년 기행중 민세의 연안대첩비 답사는 식민지 현실에서 민족의식 고취라는 의도가 깊이 담겨있다.

현충사의 중수한 당우가 해사하게 바짝 솟은 것을 보고 벌써 왔는가 할 사이도 없이 가옥이 즐비한 시가 속으로 들어가니 곧 연백 읍내이다. 자동차가 멈추자 장다름박질로 연안대첩비를 가보고 와서 예정시간보담도 빨리 떠나는 차에 올랐다. 비가 크기 한 길이 넘고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찬(撰)인 것이 눈에 박힌다. 선조 임진에 이정암(李廷馣)이 이조참의로서 이곳에 피란하였다가 400 무사와 수천 주민을 모아서 여러 가지 계책으로 성을 지킨지 3일에 주위를 공격하던 적군이 마침내 패주하였고 그로 인하여 양호(兩湖)로부터 강화·연안을 거쳐서 서쪽으로 의주에 통하게 되었든 것이요 임진에서 패한 이후 첫번째 승첩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27년 7월 23일 자, 1면).

 

부락산 자락에 있는 이정암 부친 오제공 이탕의 사당과 형 이정함의 묘

북한 고고학계는 지난 2008년 12월 개성시에서 서남쪽으로 14km 떨어진 연강리의 야산 중턱에 있는 이정암의 묘를 확인했다. 지리적 특성상 살수대첩이나 귀주대첩이 더 높게 평가되고 있는 북한의 역사학계는 임란 전쟁도 한산대첩보다는 이정암의 연안대첩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연안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정암과 역시 문신으로 전쟁 승리에 기여한 이정형의 공이 커서 그의 부친인 오제공 이탕은 사직서령을 거쳐 방혜동으로 낙향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또한 형인 퇴제공 이정함은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동생인 지퇴당 이정형은 대사헌 등을 역임하는 등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부락산 자락 방혜동에는 이런 자랑스런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주이씨 가문의 귀한 향취가 남아있다. 현재 이곳에는 이탕의 사당이 남아 있다. 이정암의 형 이정함과 그의 부인 묘소는 코오롱 하늘채 아파트 가는 중간 왼쪽 부락산 자락에 있다. 임진왜란기 큰 지혜와 용기로 큰 공적을 세운 것은 이정암이지만 그의 위국헌신 실천의 바탕에는 그 바른 삶의 자세를 심어준 부친 이탕과 큰형으로 정암에게 모범을 보여준 형 이정함의 정신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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