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정묵평택신재생에너지 협동조합이사장
조정묵
평택신재생에너지협동조합 이사장

전남 목포공생원을 지난해 연말에 두 번 다녀왔다. 평택시민신문은 2023년 11월 29일 자 지면에 실린 제14회 민세상 사회통합 부문 수상자 ‘윤기’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회장의 수상 소감을 읽고, 부끄러워서 처음으로 방문했다. 15년 전에 일본 에히메현 의회 의장이던 일본인 친구 모리따까 야스유키씨가 목포공생원에 다녀왔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 에히메현 반대쪽 고치현 출신 일본인 여사를 이야기하는데 일본 종교단체 정도로 알고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이 나 몹시 부끄럽고 죄지은 심정이었다.
목포역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1번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로 20분 정도 가면 공생원이다.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이 있는데 공생복지재단 이일행 사무국장이 멀리 평택에서 왔다고 안내하고 해설도 해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공생원전경 뒤로 유달산이보인다
공생원전경 뒤로 유달산이보인다

윤치호 전도사는 1909년 전남 함평 옥동에서 태어나 젊어서 줄리아 마틴 선교사를 만나 피어선성경학원(현재 평택대학교)을 졸업하고 노방전도를 하던 중 세상 어디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만나 1928년 목포에 공생원을 세웠다. 1938년 일본인 여성 다우치 지즈꼬(한국명 윤학자)와 결혼하여 어려운 가운데 고아들을 보살피는 데 전념했다. 1951년 6.25 전쟁 당시 전남 광주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목포에서 평생 고아 3000명 돌본

일본인 윤학자 여사와

그의 아들 윤기씨의

국경 넘는 사랑 실천에 감사하며

새해 새 출발 위해 마음 가다듬어

윤학자 여사는 1912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났고 7세 때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서 살았으며 목포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공생원에서 음악선생으로 봉사하다가 윤치호 원장을 만나 1938년 결혼한다. 남편이 행방불명된 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 고아 3000명을 돌보았다. 그 공로로 1962년 한국 정부의 문화훈장을, 1965년 제1회 목포시민상을 1968년 일본 황실에서 남수포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서 한일 간 가교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목포시민들은 ‘목포회’를 조직하여 공생원을 도왔다. 그의 무한한 헌신과 봉사에 따른 선물이다. 

공생원 구건물
공생원 구건물

 

윤학자 여사는 1968년 58세에 돌아가셨다. 목포역 광장에서 최초의 목포시민장으로 장례식을 열었는데 목포시민 3만여 명이 모인 눈물의 장례식이었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이일행 사무국장에게 책을 4권 선물 받았다. 제목이 <깡통인생> <김치와 우레보시> <진주의 노래> <아름다운 유산>이다. 감사를 전한다. 
공생원 본관(구관)으로 가다 보면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비(碑)가 서 있다. ‘목포시민 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간략하면서도 울림이 있었다. 알고 보니 윤학자 여사 탄생 111주년을 맞아 11월 1일 한국과 일본의 많은 분 특히 목포시민이 참석하여 감사비 제막식이 성대하게 열렸다고 한다. 윤치호 전도사의 장남 윤기 회장이 윤학자 여사를 대신해 목포시민에게 감사하는 감사비다. 한일 간 우호교류와 어머니가 실천했던 국경을 초월한 고아·장애인·노약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사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유달산이 공생원을 감싸 안아주듯이 듬직해 보였다.

윤치호 선생과 윤학자 여사의 흉상

 

두 번째 방문은 선물 받은 책 중에 윤기 회장이 자서전 식으로 쓴 <깡통인생>을 읽고 나서인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윤기 회장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공생복지재단 단지를 둘러보고 윤기 회장이 어렸을 때 걸어 다녔던 대반동 고갯길을 걸어 노적봉을 거쳐 유달산 정상에서 공생원을 내려다보았다. 소쿠리처럼 아늑하게 자리 잡은 저곳에서 고아 4000명을 길러내 사회인으로 자립시켰고 지금은 종합복지재단으로 일본까지 영역을 넓힌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다.
“반세기동안 계속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서 달려왔습니다. 그 가운데 우선 감사를 배웠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남을 돕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였습니다. 부모님이 고생하신 걸 생각하면 저는 감히 고생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사전에는 고생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너무나 고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감성에 감사했습니다. 고아들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주려고 음악선생을 찾으신 것은 아버지의 고아 사랑 감성이었습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이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 이건 감성입니다. 아버지의 고아 사랑 감성이 어머니 윤학자에게 감동을 줬고 윤학자는 윤치호를 사랑함으로써 공생원 역사가 가능했습니다.”
    - 윤기 회장이 쓴 <깡통 인생> 서문에서 인용

 

감사비뒤로 유달산이 보인다.

 

윤기 회장의 ‘목포시민 감사합니다’ 감사비의 제막은 한일 화해와 국경을 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목포시민에 대한 감사, 아니 우리 모두의 감사였다. 민세 안재홍 선생의 ‘다사리’ 정신은 공생(共生)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늦게나마 윤기 회장님의 민세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공생원을 내려다보면서 2024년도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마음을 되잡고 간다.  목포시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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