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고개를 흔들며 춤을 춘다. 다양한 색을 입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따라서 춤을 추고, 고요한 수면은 그들의 모습을 비출 뿐 말이 없다. 가끔씩 바람의 짓궂은 장난에 잔물결로 출렁이지만 연못의 고요는 깨지 못한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탓일까.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달리 한산하다. 여름에 갔을 때는 꼬맹이들이 깔깔대며 물장난, 흙장난을 하던 놀이터도 지금은 텅 비어 있다.

소풍정원, 미소바람이 머무는 정원이라는 말답게 바람은 선선하지만 조용하고 부드럽다. 캠핑장도 공원 한켠에 있어 불멍 물멍 (불을 바라보며 멍하니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불멍이라고 한다. 물멍 역시 물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것을 뜻한다. ) 캠핑을 하기에도 딱 좋다. 항상 예약이 밀려있기로 유명한 이곳도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서자 한산하기 그지없다. 굳이 날 잡고 캠핑하지 않아도, 돗자리 하나 들고 잠시 반나절 정도 앉아서 물멍하다 가도 괜찮다.

고개를 들어 연못너머 둑쪽을 바라보자 자전거가 씽씽 소리를 내며 달린다. 저 둑길은 자전거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자전거 애호가들에게는 나름 자전거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둑길로 올라서면 한쪽으로는 시민들이 조용히 거니는 공원의 전체 조망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넓은 습지가 보인다.

개발되기 전 옛 평택의 원시 습지의 모습을 간직한 습지에는 철새들이 한가로이 거닌다. 우거진 수풀너머 해오라기인지 두루미인지 모르지만 제법 날렵해 보이는 새가 긴 다리를 뽐내며 우아하게 걸어간다. 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어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제법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있어 탐조가들이 새를 관찰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지난여름에는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후투티새를 본 적도 있다. 길을 잘못 든 나그네새였는지, 아니면 그냥 살기 좋은 평택에 눌러 살기로 결심한 새였는지는 모르지만 무심히 연못 옆 잔디밭을 거닐다가 훌쩍 나무로 옮겨가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죽백동에 있는 배다리생태공원도 꽤 알려져 있는데, 잘 조성된 나무데크길에 너른 잔디밭, 저수지에 설치된 분수 등이 유명하다. 걷다가 지루해지면 근처 배다리도서관에 들어가 풍경을 보며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금개구리 서식지라고 적힌 팻말과 달리 도심에 있는 탓일까.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아파트와 차들이 눈에 밟힌다.

그에 비해 소풍정원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논밭이 보인다. 야트막한 언덕에는 억새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특히나 수확을 끝내고 그루터기만 남은 논밭은 차마 깨트릴 수 없는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저 멀리 아파트가 하나 보이긴 하지만 제법 거리가 있다. 카페와 음식점조차도 어느 정도 공원과 거리를 두고 있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했다는 소풍정원의 취지답게 자연은 이용당하거나 착취당하는 대상이 아닌 나름의 주체로서 인간과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소풍정원을 나서면 바람새마을의 핑크뮬리 밭이 보인다. 바로 앞에 작은 규모의 카페가 있어 그 안에서 차를 마시며 핑크뮬리를 감상할 수도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가는 것은 소정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원산지가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특이한 색감에 이국적인 풍취가 어울려 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몰려든다. 생각보다 소규모라 살짝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핑크뮬리를 보니 문득 올해 추석연휴를 맞아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 수목원인 카밀리아힐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동백과 수국이 유명한 곳이지만, 이미 철이 지났기에 가서 그저 나무만 보고 오겠거니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설립자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제주도 전통가옥을 통째로 옮겨와 대문과 마당을 꾸며 전시한 곳에서는 제주도의 전통문화와 관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나무빗장 세 개만 덩그러니 놓은 대문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 집주인이 부재중인지 아닌지 부재중이라면 언제 올 수 있는지 등을 알 수 있게 해놓았다. 어떻게 보면 원시적인 디지털 신호랄까.

무엇보다 계절마다 하나의 테마를 두고 꾸민 것이 인상 깊었다. 가족여행을 떠났던 시기가 가을이었기에 때마침 수목원 한곳이 가을테마로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절로 탄성이 나왔는데, 들어서자마자 억새와 핑크뮬리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혹은 친구끼리 모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때로는 서로 손을 잡고 말없이 걷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을 테마로 꾸며진 또 다른 공간은 구리거울을 배치하여 사람들이 거울을 통해 풍경과 함께 사진을 찍도록 배려한 곳도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거울을 이용해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의 경우 아버지가 사진 찍는 담당을 맡아 정작 아버지만 쏙 빠진 가족사진만 남기도 하는데, 이렇게 거울이 설치된 곳은 그럴 일이 없겠다 싶었다. 혹은 혼자 여행 온 사람도 누군가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할 필요 없이 멋진 연출로 독사진을 완성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또 한편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동선마다 보이는 카페와 휴식공간이었다. 수목원의 오솔길을 따라가다보면 전구가 늘어선 길이 보인다 싶으면 카페가 나타나고, 또 어딘가 소규모의 온실이 있다 싶으면 또 카페가 나왔다. 어떻게 걷다가 슬슬 지칠만한 즈음에 카페와 기념품가게들이 나타나는지 신기했다. 아마도 사람들의 동선을 파악해서 배치한 것이 아닐까.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소비를 끌어내기 위해서 다양하고 치밀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반면 소풍정원 내에는 편의점을 제외한 다른 상업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관광지인 카멜리아힐과 달리 소풍정원은 휴식과 습지보전을 중심으로 한 곳이다 보니 당연한 일이다.

 

미소바람 머무는 가을날 소풍정원
불멍 물멍하기 너무 좋은 곳

 

도심 속 배다리생태공원은 주위
차들과 아파트들이 눈에 밟히지만
소풍정원은 어디로 눈 돌려도 논밭
이고, 야튼막한 언덕에는 억새들이다

 

추석 연휴때 다녀온 제주 수목원 
카밀리아힐처럼, 소풍정원도
계절별 테마 공간과 작은 편의점이나
기념품점 있었으면 

 

평택만큼 역동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가진 지역이 있을까, 언젠가는 인천
사는 친구와 함께 김네집 부대찌개를
먹고 미스리 햄버거를 싸가지고
소풍정원에 방문하고 싶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자연은 계절마다 아름답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다만,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간에는 계절마다 다른 테마를 두고 꾸미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가족단위로 캠핑이나 나들이 온 사람들이 기념 삼을만한 특색 있는 기념품이나 마스코트 하나 정도 편의점에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이 살짝 남는다.

사실 평택에서 계절별 테마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평택농업생태원이 그렇다. 봄에는 나비를 체험할 수 있는 온실이 있고, 가을에는 억새로 꾸며진 언덕을 오르내릴 수 있다. 코스모스에 파묻혀 한껏 연출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만약 봄가을 축제에 맞춰 방문하면 농업생태원의 너른 잔디밭에서 다양한 행사를 체험할 수 있다. 저번 가을에는 세계음식축제가 열려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가격은 대략 3000원 선으로 요새 물의를 빚고 있는 지역축제 바가지와도 거리가 멀었다. 한 구석에는 닭과 공작을 키우는 사육장이 있으며, 이곳저곳 다람쥐들의 통로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도토리 하나 물고 쏜살같이 통로를 달려가는 다람쥐를 보며 신나 하는 아이들도 눈에 띈다.

농업생태원 입구에는 농산물직판매장이 있어, 평택의 신선한 농산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합리적인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사진 외에는 이곳에서의 경험이나 체험을 추억할만한 기념품이 없다는 점 정도랄까. 가족끼리 온 사람들도 이곳에서 아이들과 가벼운 산책을 하지만,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농업생태원이 있는 동네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농업생태원 입구에는 근처 맛집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담긴 현수막을 걸어놓아 참고할 수 있게 했다. 투박하긴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지역방문객을 지역경제 소비로 연결하려는 농업생태원만의 노력이랄까.

지난 9월 제주도 카멜리아힐을 들르고 돌아오는 길에 갈치구이 음식점을 찾았었다. 생각보다 센 가격이었지만, 항상 미소로 대하는 직원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운 갈치의 속살 덕분에 갈치구이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맛이 좋아도 제주도의 향토음식이 아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제주를 떠나는 날, 아쉬웠던 우리 가족은 공항의 향토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엄마는 성게미역국을, 나는 고사리해장국을 선택했다. 공항 안에 있는 음식점이니 큰 기대는 없었지만 한 숟갈 떠서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는 순간 너무 맛이 있어서 바닥까지 긁어먹고 말았다. 사실 아침을 거르고 먹었던 점심이어서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맛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던 것은 공항 화장실 안에서였다. 핸드워시가 감귤향이었던 것이다. 제주도를 처음 접하는 곳도 공항이고, 떠날 때 마지막으로 접하는 곳도 공항이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니 정말 놀라웠다.

사실 우리 평택만큼 역동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가진 곳이 또 있을까. 반도체 공장 외에도 미군부대 및 평택항 등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그뿐인가. 평택의 슈퍼오닝 쌀이 생산되는 너른 들판도 있고, 잔잔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자연을 품은 공원도 있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친구들에게 평택을 소개할 때 이런저런 점을 이야기하지만, 다들 평택의 매력을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 평택을 말할 때 이런저런 미사여구 외에 그저 보는 순간, ‘아, 맞아. 평택이 이런 곳이지’ 할만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비자림 향수를 통해서 제주도를 떠올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공항에 비치되었던 감귤향 핸드워시를 떠올릴 것이다.

억새가 흔들리고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연못가를 걷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공원을 빠져나간다. 나 역시 외투를 여미고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저편에서 철새가 끼룩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소풍정원은 다시금 바람의 미소와 함께 고요한 잠에 빠져들고 있다.

언젠가는 인천에 사는 친구와 함께 김네집 부대찌게를 먹고 미스리 햄버거를 싸가지고 소풍정원에 방문하고 싶다. 철새도 관찰하고 어디선가 대여받은 자전거로 자전거길을 달려보고 캠핑장에서 별을 헤아린 다음, 그 모든 것을 추억할 수 있는 평택의 향기가 담긴 작은 기념품 하나 친구 손에 들려 보내고 싶다. 그리고 그 추억을 따라 또다른 친구나 또 다른 가족들이 소풍정원을, 혹은 고덕의 반도체공장을, 평택항을, 평택호를 찾아왔으면 좋겠다.

나만 알기에 이 평택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곳이니까.


글쓴이
임소정 평생학습센터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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