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기준 없는 인사

바로잡고자 노조 결성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지난 2005년 해임됐던 우흥덕씨가 지난 6월 29일 평택시청 6급 공무원으로 다시 임용됐다. 2005년 1월 4일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해임된 지 17년여 만에 다시 평택시청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 주무관은 지난 2004년 11월 전국 공무원들이 노조 설립을 위해 벌인 총파업에 참여했다가 해임을 당했다. 이후 지난해 12월 9일 ‘공무원 노동조합 관련 해직공무원등의 복직 등에 관한 특별법’(해직공무원복직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올해 4월 13일부터 시행되면서 회복이 이뤄졌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일터로 돌아온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17년 만에 현장으로 다시 출근
공직사회 개선 노력하다 해임돼
복직법 개정 투쟁 지속해나가야

 

복직 선례 남기게 돼 기뻐

“특별법 제정과 복직을 계기로 앞으로 후배 공무원들이 노조 활동 중 혹시라도 신분상 불이익을 받아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다는 점이 기쁩니다.”

평택시청 공무원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우 주무관은 이같이 복직소감을 밝혔다. 그가 본격적으로 공무원노조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2년 3월 전국공무원노조 창립대회 이후다. 이를 기점으로 평택시공무원직장협의회도 노조 창립 준비에 들어갔다. 2003년 12월 11일 313명이 투표해 66.6%의 투표율로 그가 제1대 지부장으로 당선됐다.

이어 2004년 2월 10일 “부정부패로 얼룩진 공직사회의 내부를 혁신함으로써 상식과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드는 주체가 될 것”을 선포하며 평택시 공무원노조가 출범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11월 정부가 단결권·단체교섭권을 부분적으로만 허용한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데 항의한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임 징계를 받았다.

그가 다시 시청으로 돌아온 것은 17여 년이 지난 2021년 6월. 현재 그는 관광과 소속이다. 근무하는 곳은 평택호 관광안내사무소. 그는 “조용히 남은 임기를 마치고 정년퇴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사 전횡 막기 위해 노조 시작

“가장 큰 문제는 인사였습니다. 당시 노조에 가입한 이유는 다 같았을 겁니다. 아내가 시장 관사에서 집안일을 해주는 대가로 승진한 사람, 시장 부인이 행사에 참여할 때 동행하면서 김밥을 싸서 챙겨주는 대가로 과장을 단 사람, 비 내리는 날 자신은 비를 쫄딱 맞아도 시장과 시장 부인은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씌워주고 다닌 대가로 승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노조가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로 시장의 인사 전횡을 꼽았다. 기준 없는 인사로 불만이 높았고 인사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았다. 인사위원회도 문제였다. 특히 다면평가는 볼펜이 아닌 연필로 작성했다. 명백히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기 위해 평가 결과를 수정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는 “재임 동안 6급 이상 승진 대상자 심사에는 노조에서 추천한 인사위원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물론 노조의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당직비를 5000원에서 6만원으로 올렸다. 복지포인트도 전국최초로 1000포인트 이상 지급하게 됐다. 시청에 기자실을 폐쇄한 것도 노조 운동의 성과다. 당시 언론사 기자들은 시청 직원들에게 사적 심부름을 시킬 정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당시 노조는 항의의 표시를 신문 절독 운동과 함께 기자실 폐쇄를 이끌었다.

그는 “당시 기자들은 공무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로 보복성 기사를 쓰기도 했다”며 “노조의 첫 번째 존재 이유는 조합원 보호”라고 강조했다.

 

지프에 짐짝처럼 밀어넣기도

“공무원이 노조를 만든다니 학교 등 모이는 곳에서 경찰에 두들겨 맞고 길거리에서 이유도 없이 현행범으로 체포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시절 자체가 그렇습니다.”

노조 활동 과정도 순탄치는 못했다. 항상 집이 감시당하고 아내는 협박을 받았다. 근무 도중 경찰에 체포당하기도 했다.

그는 “팽성읍에서 근무하던 당시 경찰이 난입해 지프에 짐짝처럼 밀어넣으며 협박을 했다. 목격한 동료들도 많은데 아무도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입막음 당했다”며 “인권위에서 경찰에 권고까지 했는데 해당 형사는 징계도 받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노조 창립 이후에는 탄압이 심해졌다. 국정원과 정보과에서 시청에 직원을 상주시키고 방해공작을 펼칠 정도였다. 그가 해고된 것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 연차를 썼고 계장 결재까지 받은 것을 보고 자리를 떴는데 본청에서 반려시키라고 지시가 내려왔다”며 “인사 규정상 3일 이상 무단결근 시 해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부당하다고 생각해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시장이 탄원서까지 법원에 보냈지만 결국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며 “공안검사들과 판사들은 꽉 막혀있었다. 전국에서 시장이 탄원서까지 보낸 공무원 해직자 가운데 복직하지 못한 유일한 사례”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직 기간 중 5년만 인정받아

특별법에 따른 복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해직 기간 전체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발의한 ‘해직공무원복직법’은 해직 기간 전체를 인정하는 내용과 사망자, 정년 경과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법외노조 기간은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안이 통과됐다.

이 법에 따라 우 주무관은 17년여 기간 가운데 공무원노조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5년 3개월여 기간만 인정받았다.

그는 “나머지 11년 6개월여의 기간이 날아갔다”며 “생각보다 호봉이 많이 삭감됐고 연금도 영향을 받은 점은 아쉽다”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제주도 같은 경우 복직을 축하하지 말라며 삭발한 사람도 있었다”며 “해직 기간 전체 인정뿐만 아니라 사망자나 정년 경과자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 사망자 처우 등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선 계속 투쟁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작권자 © 평택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