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민신문] 얼마 전부터 ‘평택섶길’에서 하고 있는 평택지역 물길 조사에 동행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평택은 도농 복합으로 도시적인 면과 농촌의 모습이 잘 어우러진 곳이었다. 그래서 계절 감각을 가까이에서 뚜렷이 느끼는 게 매력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렸었다. 그런데 이번 물길 조사 작업을 하면서 과거 평택이 어촌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다. 나는 바다나 어촌에 대한 외경심이 많은 편이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살아 본적도, 사는 친인척도 없기 때문에 그저 낯설고 먼 곳일 뿐이다.

마을어른을 찾아뵙고 그 분들에게 듣는 생활상이나 지형은 어촌에 가까웠다. 지금은 버젓이 마을이 형성된 육지임에도 한 때는 배가 닿는 나루였다고 진술하시는 걸 볼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 마을에 살고 계시는 어른들의 진술은 공통적인 면이 있지만 각자의 기억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같은 정황이라도 기억 장치는 개개인의 몫이라서 정확한 자료 조사가 만만치 않다.

마을 형성에는 환경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 식량이 풍부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어족이 풍부해서 은빛 물결을 이루며 숭어나 강다리 떼가 모여들었다는 걸 회상하는 어르신의 눈빛에 물고기의 선홍빛 아가미 같은 생동감이 넘치기도 한다. 만선의 선박들이 정박한 나루에 주막이 있었다며 그 주막에서의 추억담을 들추는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지기도 하였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어 잡풀더미가 된 곳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수령이 500년 넘은 나무만이 묵묵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100년도 못 사는 우리네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을 하며 생존해 계시는 어른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는 일에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길 조사하며 구술 정리하는 일
지역의 뿌리와 정체성 아는 근거

새우젓으로 바꾸던 물물교환 이야기
몇십년 전 평택의 인정 느끼기에 충분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행되고 있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마을회관이나 노인정이 굳게 잠겨 있고 치매에 걸린 어르신, 안타깝게 세상을 뜨신 어르신 소식에 난관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고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일에 참여하며 발품을 파는 일에 사명감이 생긴 듯 일주일에 두 번씩 조사하는 일에 보람이 느껴져서 다행이다. 또한 만나는 분들마다 진정성 있게 자부심을 갖고 진술하시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함께 보를 쌓으며 그 대가로 담배를 받았다는 이야기, 이동조합을 운영하며 마을 자체 독립적 기반을 다졌다는 이야기, 새우젓과 했던 물물교환 거래 이야기는 그 시절 인정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옛 나루터 자리에 표적이라도 해 놓으면 후대에게 확실하게 전달될 거라고 주장하는 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젊어 보이는 여성 마을이장님이 자기 마을이 더 이상 개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던 바람이 귀에서 떠나질 않는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과 농토를 지키며 꿋꿋이 살아오신 그 분들에게서 근기와 긍지를 엿보며 허약한 내 모습이 자꾸 드러나는 거 같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마을 어르신들의 구술을 잘 기록해 역사 자료로 남겨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할 과제가 우리 세대에게 있다. 어르신들의 진술을 녹음하여 글로 옮긴다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지명에 대한 발음이나 동일한 지점에 대한 의견들도 서로 달라 혼동이 따르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일일이 현장을 확인하고 구술을 받아 기록하는 일은 온고지신으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는 일이 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아는 근거와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물길 조사를 하면서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스스럼없이 객을 안으로 들이시던 동네사람들 모습에서 격의 없이 지내던 고향 마을이 그리웠다. 고사리 같은 손에 호미를 들고 할머니를 따라 흙을 북돋우던 감각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때는 몰랐던 맨흙의 보드라움이 온몸에 퍼지는 듯하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떠나오지 못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프로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방대한 책에서 어린 시절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록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자아를 구축해 나갔으리라. 돌아갈 수 없는 시점이나 장소가 한 사람의 토대가 되고 자양분이 되어 주었기에 꿋꿋이 자신을 지키며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라는 생각에 깊이 빠지는 요즘이다.

박경순 
시인·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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