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도 날이언 마라난...

한도숙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평택시민신문] 라디오에서 오늘(7월12일)이 24절기 중 초복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복(伏)은 삼복(三伏)으로 24절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중에 바로잡기는 했어도 많은 사람들이 삼복이 24절기에 포함되는 줄 잘못알고 있다. 24절기는 음력이 농사절기와 잘 맞아들지 않기에 태양력으로 보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24절기는 양력으로 매달 두 번 드는데 하나는 초순(6,7,8일)에 들고 하나는 종순(20,21,22일)에 든다. 이렇게 24절기는 양력과 맞아떨어져 계절의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음력은 윤달이 드는 해는 약 한 달간의 차이가 나기에 24절기가 없으면 쉽게 계절 파악을 할 수가 없다.

24절기는 황경(黃經)을 24등분하여 약 15일 마다 절기 이름을 넣은 것이다. 황경 360도는 일 년 365일과 거의 맞먹기에 황경1도는 하루에 해당하는 것이다. 황경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궤적을 말한다.

복은 초복, 중복, 말복으로 삼복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시기를 말한다. 복더위에는 노출을 꺼리는 양반네들도 속살이 비치는 모시나 삼베로 옷을 해 입어도 탓을 하지 않는 계절이다. 삼복은 소서(小暑)(양력 7월 8일경)에서 처서(處暑)(양력 8월 23일경) 사이에 들게 된다. 초복은 본격적인 무더위의 시작을 예고하는 날로, 하지로부터 셋째 경(庚)일을 가리킨다.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立秋) 뒤의 첫째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한다.

초복에서 중복까지는 10일, 중복에서 말복까지는 20일, 초복에서 말복까지는 30일이 걸린다. 만약 초복에서 말복까지 20일 만에 삼복이 들면 매복(埋伏)이라고 한다.

복(伏)은 엎드렸다는 뜻이다. 주군에 충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복날의 복은 계절관계를 말 한다 봄은 목(木)이요 여름은 화(火)이다. 가을은 금(金)이요 겨울은 수(水)이다. 여기서 가을의 금이 여름의 화를 못 이겨 굴복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날은 금에 해당하는 경(庚)일에만 든다고 한다.

복날은 뭐니 뭐니 해도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는 날이다. 그중에서 양반들은 인삼을 넣은 어린닭(영계)을 고아먹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개장국을 즐겨 먹었다. 지금은 동물 애호단체가 주말마다 청와대 앞길을 행진하며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등 그 수요가 줄었지만 여름을 나는데 개장국만한 음식이 없었다.

소설가 천승세가 발표한 황구의 비명은 만해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의의는 70년대 점령군과 그에 빌붙어 먹고사는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세퍼트에 의해 체구 적고 볼품없는 황구가 물어뜯기는 장면을 묘사함으로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황구는 바로 이 땅에 사는 우리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 황구의 비명은 복날에는 어김없이 일어났다.

개장국은 농경민족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농민들은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 경제력도 그렇지만 소는 식구나 마찬가지고 더욱이나 일을 해야 하기에 소는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만만한 게 개뿐이었다. 여름날 지친 몸을 뜨끈한 개장국으로 지지면 다시 힘이 솟는다.

아침이면 들판으로 나갈 힘을 얻는 것이 개장국 말고는 달리 없었다.

“유월이라 계하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대우도 시행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 소리 난다” 농가월령가 6월령이다.

이달은 소서(小暑,7일)날까지 모내기를 끝내고 열흘쯤이면 아시김매기를 한다. 아시김매기는 아직 논바닥이 굳질 않아서 호미가 필요 없다. 달개비나 방동사니 보풀들이 물 밖으로 코를 내밀 때이기에 손으로 바닥을 주물러 펄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두벌매기는 그로부터 보름정도 지나 본격적으로 호미로 펄을 뒤집는다. 그때 큰 호미로 펄을 뒤집고 피를 뽑아내는데 그때가 대서(大暑, 23일)에 이르는 시기라서 호되게 덥다. 벼는 어느 정도 자라서 엎드리면 얼굴을 스치는데 땀은 비 오듯 하고 눈은 볏잎에 찔리고 하니 흙 묻은 손으로 눈을 훔치면 설상가상이 되곤 했다. 마지막 김매기는 백중(伯仲)전 까지 인데 올해는 8월7일에 해당한다. 마지막 김매기는 설렁설렁 하는데 두레패에 선소리꾼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허리를 펴 노동 강도를 조절한다. 마지막 김매기가 끝나면 호미씻이라고 하는 행사를 벌인다. 호미를 이제 쓰지 않을 테니 씻어둔다는 것이다. 떡을 하고 술을 빚어 일꾼들을 위로한다.

‘호미도 날이언 마라난, 낫 같이 들리 없어라.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만,

위 덩더 둥셩, 어머니 같이 괴시리 없어라. 아! 님아, 어머니 같이 괴시리 없어라’

고려시대 민요 사모곡의 도입부이다, 작자미상의 한 시인이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했다. 호미는 어머니 이고 상대적 개념인 낫은 아버지로 묘사했다. 어머니 사랑을 호미라는 농기구로 표현한 것이 우연은 아닐터이다. 어머니의 손에는 늘 호미자루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세계적으로 한류가 유행이다. 한류라 하면 드라마, 영화나 k-pop들이다. 그런데 그 틈을 비집고 한류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미이다. 영주의 한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가 해외시장에 불이 나게 팔린단다. 호미는 땅이 비좁은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농기구라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형태의 소형농기구를 가진 나라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인 농기구로 정평이 나있다.

호미도 제각기 사용하는 작업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지만 그 모양이 변하는 것은 없다. 직삼각형의 날과 구부러진 각도들은 소형농기구이면서도 갖추어야할 강도 등을 세심하게 배치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논을 매는 호미는 호미날이 커서 논을 훔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있고 밭을 매는 호미도 작물에 따라 잡초의 성질에 따라 호미의 모양새가 조금씩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봄부터 이랑을 만들고 파종이나 모종을 심거나 김을 맬 때는 늘 손에 든 것이 호미였다. 어머니가 들고 다니는 호미는 날이 닳아서 뭉툭해지거나 당신의 작업특성을 따라 마모되기에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광주리에 감자나 옥수수 같은 작물과 호미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림이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어쩌면 호미 자체가 평화인지도 모른다. 농기구중에서 가장 비폭력적 모습으로 자신을 고려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호미도 날이언 마라난 낫같이 들리도 없으니.....에서처럼 날이 있기는 하지만 낫같이 베어내거나 자르는데 쓰이지 않으니 폭력적 행동에 동원되지 않는 위치를 고수 하며 평화로운 모습으로 농촌의 고단함속에 수동적이며 순종적 모습의 어머니와 겹치는 모습인 것이다.

매향리 평화박물관을 준비하는 전만규씨에게 수도 없이 세워놓은 폭탄들을 녹여서 호미로 만들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바로 포탄껍질에서 나는 전쟁의 냄새를 모양을 변화시키면 평화로운 호미가 된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물론 일이 시행되진 않았지만 매향리 어머니들이 쓰던 호미라도 모아서 포탄 옆에 전시하면 전쟁과 평화가 같은 재질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는 사람마다 눈치 챌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었다. 호미는 평화 그 자체인 것이다.

호미로 논을 훔치는 일이나 땡볕에 김을 매는 작업은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들은 이런 일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호미 한 가락이 닳고 닳아 조막호미가 될 때까지 땅바닥을 긁어댔다. 근대화가 시작 되는 무렵 도시는 농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처녀총각들이 호미자루를 내던지고 도시로 떠났다. 그래서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는 호미자루 내 던지고 서울로 갔다네” 하는 가요가 유행하기도 했다. 어쨌든 7월은 호미질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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