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나무는 들판을 보며 꽃 피운다

한도숙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평택시민신문] 청북면에 이강세란 분이 있었다. 이분은 천석꾼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의 간척사업을 보고 자신도 간척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간척이 그리 쉬운 일인가. 조금 둑을 쌓아 놓으면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 삼켜버리길 여러 번, 그러나 이분은 지치지 않고 둑을 막아나갔다고 한다. 결국 이분이 지쳐 갈 때 쯤 일제는 비행기 헌납을 요구했다. 비행기 한 대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내놔야하는 부담 앞에 그는 그만 자결하고 말았다. 그가 만들다 중단된 둑을 ‘강세둑’이라고 하는데 청북신도시 서쪽에 지금도 있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자갈밭이라도 좋겠네”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 농민들에게 땅은 절체절명의 것이었다. 내 소유로 소작료를 내지 않는 그런 땅 말이다. 그런데 농민들은 그런 땅을 갖지 못했다. 돈과 권력이 모두 차지해 버렸기에 고율의 소작료로 농노의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겨우 1950년 유상몰수 유상분배에 의해 땅을 쥐어보기는 했으나 전체농지의 4할이 넘지 않았다. 돈과 권력이 분배의 원칙을 무너뜨려 버렸다. 농민들은 다시 하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 농업문제가 심각해지자 각지자체가 삼농을 정책과제로 삼고 나름대로 시책을 펴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삼농이란 농업, 농촌, 농민을 말함이다. 이 모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농은 다산선생의 주장이다. 원래 삼농이란 편농, 후농, 상농이라고 했다.

편농(便農)은 ‘편할 便’자를 썼으니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고, 후농(厚農)은 ‘두터울 厚’자를 썼으니 소득이 높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가 상농(上農)인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산은 농민해방을 말한 것이다. 가장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조선을 통틀어 농정서를 편찬한 임금은 네 분에 불과하다. 태조는 ‘신편집성마의방’, 태종은 ‘농서집요’와 ‘양잠경험촬요’를, 세종은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정조는 즉위 22년(1798)에 들어‘권농정구농서윤음’을 발포해 전국의 농업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농법이나 농정정책을 작성해 올리라 명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는 1790년에 수원에 ‘축만제’와 ‘만석거’를 축조해 둔전에 활용했던 임금이다. 그러나 윤음에 응한 신하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재차 윤음을 내려 응한 신하는 단 열두 명에 불과했다. 여기엔 다산선생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삼농정책’은 이때 주창한 것이다.

평택은 평택호를 막으면서 비약할만한 농토를 마련했다. 야산지에 고구마나 심었던 땅들이 관개수로를 따라 논으로 변했다. 현덕면 장수리 일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따라 논둑들이 높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물을 담아 모를 내었다. 궁핍한 농민들이 쌀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수입쌀로 인해 쌀농사가 수지를 맞추기 어렵게 됐다. 이제 개발의 열풍으로 이 모습도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이제 우리지역의 모내기는 모두 마쳤다. 망종(芒種)을 전후로 보리를 베어내고 부지런히 모를 내어야 한다고 ‘임원경제지’는 밝히고 있다. 품종에 따라 다르기야 하지만 5월 1일부터 모내기를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한다. 옛날에는 소만이 지나야 모내기를 시작 했다고 한다. 벼가 자라 이삭이 몸 안에 올라오기 시작(수잉기 또는 배동)하는 시기에 기온이 높게 되면 미질이 떨어지고 수확량에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모심는 시기도 조상들의 지혜를 귀띔할 필요가 있다. 모심기가 끝나는 시기는 밤송이를 겨드랑이에 넣어 눌러도 아프지 않을 때까지라 한다. 어느 시기라고 특정하지 않는 것은 그해의 기온, 일조 환경에 따라 조금씩 생육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월은 망종(6월 6일)과 하지(6월 21일)가 드는 달이다. 망종(芒種)은 까끄라기가 달린 모든 종자를 뿌리라는 뜻이다. 이 시기를 넘기면 수확이 어렵다. 이 시기에는 보리가 수확되니 보리개떡이라도 먹을 수 있고 감자를 캐니 감자를 먹을 수 있다. 그동안 주린 배를 졸라매고 보릿고개를 넘어온 것이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많이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해서 이 시기에는 이런저런 채소가 텃밭에 가득하니 그것을 잘 이용하라고 권했다. 그중에서도 상추쌈을 권했다. 상추는 원래 ‘부루’라고 했다. 부루 한 두 잎에 보리밥을 넣고 그 위에 고추장을 듬뿍 발라먹으면 불과 몇 쌈에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망종에서 하지(夏至)까지는 보름이 지나야 한다. 하지까지는 모내기를 마쳐야한다. 하지감자를 캐야하는 하지(夏至)는 태양의 황경이 90도에 이르는 시기로 유월 21일에 든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아 낯의 길이가 가장 길다. 이날이 지나면 다시 낯의 길이가 줄어들지만 이때부터 더워지기 시작해 8월이면 최고조에 달해 삼복더위라 했다. 하지 무렵은 보통 가뭄이 든다. 그래선지 하지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속담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우제’라는 말이 3122건이 등장하는데 농사에서 비는 나라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연려실기술’에 ‘태종우’라는 글이 실려 있다. ‘태종우’도 이 시기에 내리는 비다. 태종이 근정전 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비를 기원하다가 죽었다. 자기가 죽으면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는데서 ‘태종우’라 했단다. 태종은 음력으로 5월 10일에 승하했는데 양력으로는 유월 말에서 칠월 초에 들기도 한다. 이시기는 중부지역에 장마가 시작 되는 시기이다.

태종우를 소재로 시문을 남긴 문인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의 ‘태종우’란 제목의 시를 옮겨본다.

 

聖主乘龍二百年 / 一言憑几信如天/ 至今五月初旬日 / 每沛甘霖潤旱田

임금이 돌아간 지 이백년인데 남기신 유언이 하늘처럼 미덥구나. 지금처럼 5월 10일이면 비를 내리시니 항시 마른땅을 적셔주누나. <추탄집’(楸灘集)권1>

 

조선이 농업이라는 직종을 유난히 중시한 것은 성리학이라는 특정 사상에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다. 농사를 한다는 것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것이며 조선은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국가의 생존을 위한 효율적인 농사를 백성들에게 요구했을 뿐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也)이란 말은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백성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 같이 한계는 명확했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부지런히 농사지어라 라고 했을 뿐 구체적 농사기술이나 기반정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니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이 나온 게다. 태종우나 기다리고 도토리로 배를 채워야 하는 500년 동안 죄 없는 졸참나무는 아랫도리가 움푹 패이도록 메를 맞아야 했다.

메를 맞는 것은 졸참나무뿐이 아니다. 유월은 민중들이 도륙난 달이다. 6.25 한국전쟁이 그렇다. 민주화투쟁과정에서 피를 뿌린 달도 유월이다. 경찰의 몽둥이 찜질을 당하던 유월이 민주화 승리의 달로 기억되는 것도 유월의 또 다른 의미이다.

옛날에 우리지역에는 참나무가 많았던지 숯과 관련한 지명이 남아있다. 송탄(松炭)은 숯고개라 했다. 서탄(西炭)은 동탄(東灘)에 대비되는 지명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동탄은 여울을 말함이고 서탄은 숯을 말함이다. 그렇게 숯은 이 지역의 특산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참나무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우리네 삶에서 참나무는 참으로 쓸모 많은 나무였다. 그래서 참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참나무류는 도토리가 열리는데 봄 가뭄이 심하게 들면 모내기에 차질이 생겨 흉년이 들 수밖에 없다. 반대로 참나무는 봄 가뭄에 꽃이 피고 수분이 잘 되기에 도토리를 잔뜩 매달 수 있다. 그러니 흉년이 들면 도토리라도 먹으라고 도토리가 많이 달린다고 한다. “참나무는 들을 내려다보고 도토리를 매단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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