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

"4월 곡우에 못자리하고 나면 볍씨 자투리도 남지 않아

보리 베는 6월 망종까지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시기 

한도숙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평택시민신문] 오월을 청춘에 비교한 수필이 있다. 가슴이 벌렁거리는 오월, 그리고 청춘, 얼마나 어울리는 말이냐… 온갖 만물이 여린 싹을 밀어 올리는 그 힘찬 기운을 심장 뛰는 박동의 뜨거움으로 대치하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날이 녹음을 더해가는 잎들과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 저 자연의 거친 숨소리를 글로 만들어 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오월은 그렇게 희망에 들떠 왕왕대는 시기만은 아닌 것이 우리가 살아낸 세월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현실의 기억들이 있기 때문 아닌가. 그 현실의 기억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여 뜬금없기도 하고 필연이기도 한 이유로 소환되거나 재현되기도 한다. 알듯 모를 듯 우리에게서 멀어진 듯 느껴지는 오월의 이야기를 다산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 4월조를 읊으면서 시작해보려 한다.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立夏)소만(小滿) 절기로다/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보리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도 방장이라/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면화를 많이 가소 방적의 근본이라.

수수 동부 녹두 참깨 부룩을 적게 하고/갈 꺾어 거름할 제, 풀 베어 섞어 하소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보세/농량(農糧)이 부족하니 환자(還子) 타 보태리라

 

농사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다. 욕심을 부려 소출을 더 내보려고 일직 파종을 하거나 모종을 넣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중부지방 기준으로 서리안전일은 입하이다. 입하 이전이면 서리피해를 볼 수도 있기에 입하 이후에라야 수수나 동부 녹두 참깨 따위를 파종하라고 이른다. 게다가 고랑을 잘게 해서 토지활용을 높이라고도 한다.

요즘 텃밭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어나 이것저것 심어보는데 모종장사들의 농간인지 철없이 모종을 심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왕왕 있다. 농민들은 모종값을 높인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땅의 냉기가 걷히는 시기를 입하로 보는데 입하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365일 만에 도는 궤적을 말하며 이 궤적의 8분지1인 45도에 다다른 시기이다. 오래토록 우리나라는 태음력을 사용하여 바닷물의 들고 남을 알기에는 유리했으나 3년에 29일이 오차가 남으로 농사엔 맞지 않았다. 해서 24절기를 만들어 보완해서 절기를 보고 농사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결과물이 농가월령가라고 봐도 무난할 것이다.

4월령에 고구마, 옥수수등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초에 중부지방에서 고구마재배나 옥수수재배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고구마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들여왔다고 한다. 고구마의 경작법이 일반화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넘게 지나서 완성됐다고 하니 그럴 만도하다. 옥수수도 청나라에 갔던 사신이 들여와서 어쩌면 우리네 할아버지들은 옥수수란 작물을 먹어보지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고구마와 옥수수모종이 모종시장의 대세가 된 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음을 말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5월1일이 되자 본논에 8일모가 꽂히기 시작한다. 모종을 비닐하우스나 보온시설에서 길렀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전에는 소만이 되어야 본논에 모내기를 시작했다. 곡우쯤에 못자리를 논에 만들고 거기에 볍씨를 직접 넣었다. 소만쯤 되면 물을 잡아놓은 논을 써래질해서 이른모를 내라고한다. 양식이 부족할 때이니 환곡을 내서 보태라고 하는 것은 보릿고개임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로 그때그때 농사일을 알려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농사를 지으면 지주에게 빼앗길게 분명하지만 어쨌든 농부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다짐하고 있다. 정학유도 지배계급의 일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이다.

오월은 이렇게 만물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시기이다. 집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는 ‘오뉴월 부지깽이도 뛴다’는 시기이다. 그러나 농가월령가에도 나오듯이 환곡을 먹지 않으면 오월 보릿고개를 넘지 못한다. 환곡이 좋은 제도이긴 하나 아전과 관리들의 횡포로 곱절이 넘는 양을 가을에 갚아야하는 상황에선 독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환곡. ‘과부 땡빚(대동빚)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환곡은 아니한다’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환곡은 곧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높은 보릿고개인들 환곡을 내느니 차라리 초근목피를 하는 것이 맘 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보릿고개… ‘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보릿고개는 높디높은 고개였다. 영조임금이 첫째왕후가 죽자 두 번째 왕후를 간택하는데 경주김씨가문의 16살 규수가 그랬단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는 보릿고개인줄 아뢰오.” 그 규수가 간택되었음은 물론이다. 영조가 66세의 일이니 무려 쉰살이나 차이가 났으나 현명한 대처로 훗날 국모가 되니 그이가 정순왕후다.

조선은 쌀농사가 전부라고해도 무리가 없는 미작 중심의 농경사회다. 언제나 그렇듯이 생산물의 분배가 제대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토지는 양반계급이 독점하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 신세이다. 그러니 소작료를 내고 나면 식솔들이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은 조선후기로 올수록 더욱 심화된다.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삼정이 문란해지기 때문이다. 근대에 와서는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서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명줄을 이어나갔다.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5.5)가 드는 오월. 못자리는 이미 곡우(4.21)에 뿌리고 볍씨 자투리도 남아있지 않다. 보리를 베어 보리밥이라도 먹으려면 망종(6.6)까지 기다려야 한다. 무엇을 먹겠는가. 이것저것 농사일은 부쩍 늘어나는데 힘은 패이고 허리를 졸라매어 보지만 이곳저곳에서 부황기 든 아이들부터 넘어지기 일쑤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었다. 짐승도 먹기 힘든 음식이다. 쌀기울에 쑥을 뜯어다 개떡을 해 먹인다. 오죽하면 개떡일런가. 그래서 초근목피라고 하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졌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들판에 보리 이삭이 올라오지만 풋바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풋바심은 보리알이 채 영글기 전에 이삭을 꺾어다 죽을 끓이는 것을 말한다. 양식을 아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점심은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들이 김치죽으로 연명했다. 김치죽을 장복하면 변비가 발생한다. 왕성한 소화력이지만 김치의 섬유질을 삭이지는 못해 섬유질이 딴딴하게 뭉치면 변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피죽을 끓이기도 했다. 피는 옛날에 곡식으로 쳤으나 미작이 성해지면서 잡초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재배가 쉽기 때문에 산골에선 많이 재배했던 작물이다. 잘 아는 지리산 피아골 이라는 이름은 직전마을(피稷 밭田)에서 유래한다. 피밭골이 피아골이 된 것이다. 그만큼 피는 일부러 재배하는 작물이었다는 말이다. 비실비실하는 사람을 일러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 같다’고 하는 말도 그런 사연들을 안고 있다.

오월은 무더기로 생목숨들이 사라져가는 시기였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그 대상이 되기에 어쩌면 가진 자에 대한 못가진자들의 분노가 오월인지도 모른다. 아무렴 민주화의 길목이 오월이었고 그 오월에 광주의 뿌린 피 또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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