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재홍 항일수난 100주년 기념 기획

일평생 3.1운동 정신 가슴에 담고 항일운동에 참여

아홉 번 옥고 치르고 3월1일에 서거하신 민족지도자 안재홍 선생
 

[평택시민신문]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그 결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의 정신을 현장에서 실천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사건으로 평택 출신의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이 첫 옥고를 치른 지 100년이 된다. 안재홍은 3.1운동의 기억과 정신 관련해서 이 시기 자신의 옥고 경험 등을 담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안재홍에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의미였으며, 우리는 오늘날 그 정신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승해야할까 생각해본다.

 

황우갑
민세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본지 시민전문기자

3.1운동은 민족정기를 웅대하게 표현한 기념일

안재홍은 “3·1 운동은 일제 침략에 넘어진 한민족이 전민족적 최대 역량을 기울이어 정의·인도·생존·존영을 목표로 공명정대한 태도에 의하여 비폭력적 항일투쟁으로 민족정기를 웅대하게 표현한 기념일이다. 오천년 역사에서 1910년 경술국치에서 커다란 오점을 찍었는데, 3.1 투쟁으로 다시 밝게 빛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자주독립국의 선포와 식민지 현실의 위대한 거부 거족적 실천

안재홍은 3.1운동이 3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독립국, 자주민의 선포였다. 단일민족으로 수천년 항쟁을 통하여 단련된 한민족의 생생한 역사는 자주독립이 가장 급선무였다. 둘째, 동양의 진정한 평화와 인류 안전한 생활을 위해 한민족 의 자주독립은 절대적 요건이라는 것을 밝힌 점에 있다. 셋째, 어느 민족이 다른 어느 민족과의 사이에 지배 착취되는 부자연한 관계로 지속되는 것은 저절로 원한을 쌓는 일이니 식민지 현실은 문화민족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독립운동단체 동제사 가입과 고향에서 2년간 칩거

안재홍은 1917년 봄 황성기독교청년회 간사 일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해 5월 안재홍의 삶에 큰 버팀목이었던 아버지 안윤섭의 부음 소식을 접한다. 그가 28세이던 1918년 5월 차남 민용이 태어났다.

안재홍의 삶에서 아마 1917년∼1919년 초 고향에서의 2년간은 가장 우울한 시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 그는 평택 부락산, 안성 고성산 답사 등 지역답사와 역사서 읽기에 몰두한다. 민세는 1913년 와세다대 재학중 중국 여행을 하면서 상해에서 신규식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가입, 일찍이 독립운동에 큰 뜻을 두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평택에서 일어난 3.1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회고하고 있다.

“3․1운동 때에 나는 그 선두에 나서기를 아꼈다. 나는 당시 29세이었는데...직장에서 방축되어 실의(失意) 중에 부단히 시국대책을 연구하는 끝이었으므로, 아무것도 못하고 상심만 하던 내가, 나서면서 징역살이를 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가엾어…제2선에서 약간의 잠행(潛行) 운동을 한 것이 발각되어,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3년 역을 살았다.”
 

3.1운동은 민족항쟁이요 민중투쟁

그러나 민세는 평택 현덕면 계두봉에서 3월 9일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4월까지 계속된 평택 3.1운동의 감격을 훗날 백성항쟁, 민족항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 내가 3월 1일이 훨씬 지난 그믐경 어느 날 밤, 어느 농촌 높다란 봉우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바라본즉, 원근 수백리높고 낮은 봉과 봉, 넓고도 아득한 평원과 하천지대까지, 점점이 피어오르는 화톳불과, 천지도 들썩거리는 듯한 독립항쟁의 웅성궂은 아우성은, 문자 그대로 백성항쟁이요 민족항쟁이었다.”

 

1919년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사건으로 1차 옥고

고향 평택에서의 3.1운동 목도는 민세에게 삶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였다. 안재홍은 3․1만세시위운동의 초기 과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임시정부의 외교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청년외교단에 참여․활동함으로써 3․1민족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평택지역 만세시위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향리에서 서울을 오가며 국내외 동향은 물론, 3․1만세운동이 조직화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파악했다.

전민족이 일어나 자주독립을 외친 3.1운동의 자극을 받은 안재홍은 서울로 올라왔다. 중앙학교 교장 유근집에 머물면서 연병호, 송내호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1919년 5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조직 총무로 활동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안창호 내무총장 하에서 임시정부의 단결을 촉구하고, 해외 주요국가에 외교관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고 군자금 모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11월 발각 체포되어 이병철, 조용주, 연병호, 김마리아, 황에스더와 함께 1차 옥고를 치른다. 안재홍은 징역 3년형에 처해진다.

 

1919년 첫투옥에서 심한 고문으로 평생 고질병 얻어

안재홍은 첫 옥고에서 평생 고질이 되어버린 병을 얻었다. 그는 대구로 압송된 뒤 치고 짓밟고 때리는 포악한 고문을 당하여 등뼈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또 이때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날이 좀 추우면 무릎이 시리다고 주먹으로 다리를 쳤으며, 원고를 쓰다가도 생각이 막히면 버럭 소리를 질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도 감옥에서 얻은 울화증의 결과였다.

안재홍의 표현에 의하면 “3.1운동은 온 민족이 하나되어 마음과 마음 넋과 넋 정열과 정열이 서로 사랑하고 믿고 아껴주고 도와주고 감춰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일러주고 돈 주고 옷 주고하면서 일체가 정화 성화 단일화했던 감격스런 민족공동체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3.1운동 100주년 맞아 그 의미 성찰하고 후대에 계승해야

올해 3.1운동, 임시정부수립, 안재홍 항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적어도 세 가지를 다시 성찰하고 후대에 계승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3.1운동을 각 지역단위의 활동에 국한해서 평가하는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그 이전 신민회에서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조선학운동 등 국내항일운동과 임시정부와 광복군 활동, 항일의거 등 여러 해외항일운동을 일관된 절대독립을 위한 한민족의 투쟁이라는 연속성상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로 평택의 항일운동을 전국적 시각과 지역적 시각에서 균형 있게 평가하기 위해 향토사에 매몰되지 않고 독립운동사 전문연구자들과의 꾸준한 교류를 통해 평택의 항일운동사가 평택정신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자료정리와 발간, 시민청소년교육 실천, 참신하고 창의적인 상징물 제작 등 상징화 사업추진 등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3.1운동에서 보여준 민족화합, 민족통합의 정신을 현재에 실천하여 남북통일의 강력한 에너지로 승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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