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곤거리면 혼사가 오갔고, 두런거리면 세상이 변했다.

서탄사무소나 절골마을에는 3.1운동을 기념할 만한

표석하나 없어 100주년을 기해 표석이라도 세워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

[평택시민신문] 매봉을 내려서면 통관사라는 이름의 절이 나온다,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이 절골(사리)이다. 사리 또는 사하리 사하촌들이 모두 절 땅을 부쳐 먹고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정한의 ‘사하촌’은 절 땅을 부쳐 먹는 가난한 농민들의 소작투쟁을 소설로 만든 이야기다. 지금은 부자동네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사리도 살기가 넉넉한 마을은 아니었을 것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오산천 주변의 땅에서 서울 태고종이 소작료를 거두어 갔다고 하니 통관사가 소작을 관리하던 말사가 아니였나 짐작해본다.

 

절골당집

절골당집

사리는 오산역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진위역이 가깝지만 진위역이 들어서기 전 오산역과 오산장은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영역이었다. 일제가 바로 코앞을 지나는 경부선 철길을 놓고 이어서 신작로를 깔았다. 신작로는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규모의 큰길이다. 그래서 행길(한길,큰길)이다. 새로 만들었기에 신작로(新作路)다. 삼남대로가 지나가던 길은 청호역을 통해 봉남리로 들어섰을 테지만 그 길은 겨우 사람 두엇이 비켜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나그네 들은 그 길을 지나다녔다. 그 길에서 점심때가 되면 영락없이 점심을 나누었다. 없는 살림에 들밥이지만 지나가는 객도 한 숟갈 들고 가게 하는 것이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소곤소곤 거리면 틀림없는 혼사가 오고 갔다. 장가못간 웃녘 총각은 아랫녘색시를 그래서 맞았다. 지금도 마을마다 호남댁이라는 택호가 붙은 이들이 살고 있다. 배를 불린 주인네가 어디서 오느냐 어디로 가느냐 미주알 고주알 헤이다 보면 두런두런 하게 되는 법. 모일 모시 모처로 세상은 변화하는 것.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 사람들의 세상읽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 길이다. 지금은 차량으로 이동하니 그럴일도 없지만 지난시절 우리들의 삶은 길에서 이루어졌다. 오죽하면 “다리밑에서 주어온놈”이 있을까.

사리 사람들은 보통 공부를 많이 한 동네라고 자랑한다. 지금도 사리동네는 공무원이나 농협등 공직진출자가 보통마을 보다 웃돈다. 그래선지 이 마을은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근간이 되는 이동조합설립이 빠르게 일어나 1954년도에 설립이 되었다. 이동조합은 쌀한말 보리한가마씩을 출자금으로 내고 순전히 농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지자 이후 면단위 단위조합으로 합병되고 지금은 지역단위로 합병돼 송탄단위농협협동조합이 되었다. 4H운동도 다른 곳보다 일찍 받아들여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이 마을의 자랑이라면 공동체가 오래도록 유지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두레는 물론이고 동제를 지내는 제당이 보존되고 있는 것만 봐도 눈치 챌 수 있다.

사리제당은 보전상태가 양호하다. 느티나무고목이 쓰러지고 후계목이 제당을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도 일 년에 한번 제를 지내는 것처럼 잘 보존되어있다. 그러나 신은 마을 사람들을 떠난지 오래됐다. 당제를 지내려면 마을이 모두 정갈해야하고 제주는 부부행위도 금지된다. 신을 받드는 행위는 엄숙하고 정갈해야 부정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의 당제는 산신을 모시는 것인데 이제 산신령은 마을 사람들에게 별다른 효혐도 없고 흥미도 사라졌다. 박제가 되어버린 산신령 얼굴이라도 보려했는데 철망과 문짝에 걸려 확인하지 못했다. 산신령은 아직 저기에 있는가?

제당 앞에 평택섶길 추진위원회가 짐대를 세웠는데 바로 앞에 사는 전에 이장을 지냈다는 분이 슬슬 욕심을 내길래 마당앞에 세우라고 세대를 주었더니 멋지게 세워두었다.

짐대는 보통들 솟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이름인 것 같다. 오리를 올려두는 것이라 오릿대라고도 하는데 이는 풍년을 소원하는데서 비롯된다. 이곳 오산천변도 염기가 있어 수확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오리는 바로 물을 의미한다. 물은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물싸움이 나면 에미 애비도 모를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맘속에는 늘 비가 많이 오길 바라고 물이 풍족하길 바라는 맘을 오리에 기대하는 것이다.

사리는 국도와 경부선 철로를 빤히 보이는 곳에 두었지만 오산천이 가로막혀 쉽게 건널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산천 고랑에 섶다리를 두었을 것이지만 장마면 쓸려가는 섶다리는 불편하기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이다. 7,80년대에는 전봇대 같은 기둥에 까만 타르를 묻혀 다리를 놓아서 까막다리라고도 했는데 이 다리도 수해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기차길이 가까우니 서울 소식도 먼저 듣게 되는지 1919년 3.1운동도 이 마을에서 먼저 시작 했다.

물론 3.1운동 이전에도 진위공립보통학교 설립이나 국채보상운동에 기부금을 낸 적은 있었지만 이 운동만큼 전 주민이 참여한 사건은 없었다. 절골의 3.1운동을 이끈 사람은 조선 말 시종원 시종을 지냈으며 당시 서탄면장이었던 윤기선씨였다. 윤기선씨가 만세운동을 하려는 사실을 알고 일본인 야먀다(山田)라는 지주가 말렸으나 오히려 야마다를 설득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는데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윤기선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은 4월 2일이었다. 4월 2일은 이웃한 야막리나 양성, 평택역 등 전국의 농촌지역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던 이후였다. 그래도 서탄면내에서는 가장 빨리 움직였고 특히 총독보 말단관료가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은 주목 할 만한 일이다. 추측을 하자면 3.1운동이후 자신의 신변문제를 고민했던 것으로 본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국내상황과 관련한 나름대로의 분석이 있었을 것이다. 군중들에게 “세계의 대세를 볼 때 조선의 독립이 목전에 있다”라고 했다는 것은 그가 분명 조선독립을 확신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윤씨네 동족들과 면서기들의 힘으로 면사무소앞에서 12시를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는 이후 금암리 사람들과 회화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주재소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벌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탄면사무소나 절골 마을에는 3.1운동을 기념할 만한 표석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마을에서라도 나서서 100주년을 기해 표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야막리 느티나무

야막리 느티나무

다리를 건너면 야막리다. 야막은 들막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들에 허름한 막을 짓고 살다보니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야막리 들판은 일제강점기 동척의 농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하우스들로 뒤덮여 오이와 호박 토마토등의 과채류가 재배되어 전국 시설채소 1번지라는 별칭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수탈을 저지하기 위한 조직적 투쟁이 이 마을에서 시작 되었다. 처음 진위농민조합으로 출발했다. 이 마을인 천도교가 중심이었는데 서정리 조선일보지국장이던 남상환의 지도하에 오산지역 사회활동을 주도하던 박 규희씨가 농민 조합을 설립했다. 특히 천도교 집회를 하면 근동마을은 물론 화성시양감면에서도 집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후 진위농민조합은 수진농조(수원,진위)로 개편 되는데 양감의 수원 청년회 박승극, 염석주 등이 참여하면서 조직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오산천

오산천

수진농조는 합법조직이 아니었다. 혁명적 농조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빈농중심의 조직이었다. 지역의 소작쟁의를 지도하면서 농민들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일제는 위협을 느끼고 조직의 와해작업에 나섰다. 황구지 소작쟁의 혐의로 핵심간부 8명이 구속되고 5명이 갖은 고초를 당했다. 조직이 와해되고 이들이 풀려났으나 서정리 남상환은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야막리는 추정컨대 떠내려 온 섬이라고 하는 곳에 집이라 할 수 없는 움막들을 짓고 들어와 농토를 일구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빈번히 오가는 야막리들은 한말을 부리면 족히 세가마는 나올듯한 욕심나는 땅이었을 것이다. 홍수가 지면 상류로부터 더내려온 걸죽한 황톳물이 가라앉으면 그것이 그대로 양분이 되는 퇴적토는 물만있으면 얼마든지 씨를 뿌릴 수 있으니 눈독들인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기차를 타거나 신작로를 걷다가 아 살만하겠다 싶으면 터를 잡고 흙을 일구었겟지......, 그렇게 얻은 땅에서 소작료로 주고나면 겨울날 것을 걱정해야 한다면 이들에게 누구나 평등하게 골고루 나눠갖는 세상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일 것이다.

평화로운 들판에 삶의 지난한 투쟁들은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마을 마다 공동체의 강력한 힘들이 살아서 꿈틀거렸음을 느낀다. 야막리는 사리를 사리는 야막리를 보면서 서로의 정체성을 만들고 때로는 배우고 때로는 가르치고 투닥거리며 맞대고 살았을 것이다. 눈앞에 진위역을 두고 달리는 기차를 바라본다.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부산가는 특급열차는 6시간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지금은 2시간 남짓, 세상은 변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길 위에 남긴 땀과 피의 흔적이 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 만년의 역사를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렇다.

어딘들 삶의 치열했던 흔적이 없을까 마는 야막리 수진농조투쟁의 흔적은 남겨야 한다. 수진농조는 소작쟁의를 활발히 진행했다. 황구지에 살았던 당시 홍건표 면장이 수진농조사건으로 피검 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관여되었고 중앙농민조합이 관심을 두고있던 조직이기도 하다. 이는 남상환이 27세로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에 잔국에서 600명 이상이 참여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경기도 지역에서는 드물게 조직적 농민저항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 한다. 역사를 올바로 기록해야만 그 후 평가도 반성도 기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방 후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지 못해 요즘 가짜 독립운동서훈자도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오산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없이 흐른다. 그리고 무심한 오리들은 그때도 지금도 그 자리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고 있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 처절했던 삶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하는지도 모른다. 아픈 과거를 기억 한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괴로움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거가 억압과 폭력, 수탈에서 비롯된 것임에야 분명히 발언하고 정리해야한다. 그들에게 옭아맨 폭력은 어떤 형태라 하더라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돈과 권력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농민들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야말로 타도 돼야 할 불의의 돈이요 권력인 것이다.

한도숙

전국농민회 총연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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