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주년 창간특집 오피니언]

최초항쟁지 성역화에 역량 집중하기 보단

평택지역 전체 3·1운동의 의미 기억하는 사업 추진해야

1919년 3월 11일 및 3월 31일 만세운동의 성지 서부역(구 평택역) 광장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평택시민신문] 1919년 3월 1일 정오 종로3가 탑골공원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한국기독대(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1894~1928)을 비롯한 학생들이었다. 고종황제 장례식을 기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약속했던 민족대표 33인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정오가 되자 참다못한 경신중학교 학생 정재용(1886~1976)이 팔각정에 뛰어올랐다.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자 탑골공원에 운집했던 학생들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수 만 명의 군중들이 합세했다. 학생과 군중들은 남대문과 덕수궁 대안문(대한문) 양쪽으로 나눠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대안문(대한문)으로 몰려간 무리들은 만세를 부르는 한 편 외국 공사관에 들어가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시작된 3.1만세운동은 며칠이 지나도록 사그러들지 않았다.

같은 날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에서도 ‘일본놈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이튿날에는 경기도 개성, 3일에는 충남 예산에서도 만세를 불렀고, 4일에는 전북 옥구, 8일에는 경북 대구, 10일에는 전남 광주, 강원도 철원, 함경도 성진 등 전국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기남부지역은 3월 1일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앞에서 전개된 시위가 최초다. 하지만 초기의 만세시위는 산발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만세시위가 농촌지역까지 확산된 3월 말, 4월 초가 되면 규모가 커졌고, 각 지역이 연대하는 양상을 띠었으며, 원곡·양성처럼 폭력적인 시위도 나타났다.

 

평택지역에서도 만세시위 격렬

평택지역은 근대교통이 발달한데다 일찍부터 천도교가 전파되어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병헌은 ‘3.1운동 비사(祕史)’에서 3월 9일 현덕면의 옥녀봉과 계두봉에서 전개된 만세시위가 평택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뒤에도 오성면 숙성리, 평택역전, 진위면 봉남리, 야막리, 서탄면 사리, 청북읍 백봉리 등에서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나타났다.

평택지역의 만세운동은 최초 항쟁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또 3월말 4월 초에는 규모가 커졌고 폭력 시위도 많았으며 점차 지역 별로 연대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참여계층도 천도교인을 비롯해서 전직관료, 면장, 농촌지식인, 상인, 농민층 등 매우 다양했다. 평택지역이 이 같은 특징을 보인 것은 천도교의 조직적 활동과 농촌지식인의 적극적인 역할, 일제의 수탈에 대한 반감과 민중들의 능동적 참여 때문이었다.

평택지역 만세시위는 평택역전과 진위면 봉남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군중들은 시위대를 조직한 뒤 평택역전으로 진출하려고 애를 썼으며 북부지역에서는 봉남리로 진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 같은 양상은 철도 개통 뒤 평택역전이 진위군청을 비롯한 공공기관과 헌병주재소, 우편국, 금융기관, 교육기관이 집중된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기 때문이며, 진위면 봉남리는 과거 진위군청과 헌병주재소가 있었던 곳으로 북부지역의 정신적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평택지역 만세시위에는 6000여 명이 가담했으며, 64명이 사망하고 257명이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광포한 투쟁이다.

 

평택지역 3.1운동 선양사업 아쉬워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중앙과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선양사업 준비가 활발하다. 서울지역도 학계, 정·재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경기남부의 수원, 화성, 안성시에서도 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수원시는 새해 벽두부터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또 시민들의 성금으로 100주년 기념 조형물을 제작하고 기념시설 및 학술대회 개최, 전시, 남북교류를 준비하고 있다. 화성시도 역사, 문화, 건축전문가, 독립운동가 후손, 역사 및 교육전문가 100명으로 ‘화성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안성시도 원곡·양성 3.1운동항쟁시발지인 원곡파출소 앞에서 만세광장 동상제막식을 가졌으며,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과 자료집 발간, 학술대회, 순국선열의 날 추모행사 등을 계획 중이다.

지난 8월 8일 평택지역에서도 각계 인사들이 모여 ‘평택 3.1운동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추진위 상임위원장 정수일씨는 ‘평택처럼 3.1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에 기념탑, 기념공원 하나 없는 것이 말이 되냐’는 말로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필자도 동감하는 부분이다. 추진위는 평택시의 지원을 받아 최초 항쟁지 부근인 현덕면 권관리 평택호 인근에 기념탑과 기념공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독립운동 인물 발굴, 학술대회 개최, 시민교육을 개최했거나 준비하고 있다. 추진위의 사업은 환영할 만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다.

먼저, 최초 항쟁지 성역화에 너무 많은 예산이 사용되고 있다. 평택지역 3.1운동 유적은 최초 항쟁지였던 현덕면의 옥녀봉과 계두봉 외에도 평택역전(원평동 구역전)과 진위면 봉남리 진위면사무소 앞이 상징적 성지다. 또 규모나 내용면에서 서탄면장 윤기선의 서탄면사무소 앞 만세시위, 서탄면 사리, 진위면 야막리, 청북읍 백봉리도 중요한 유적이다. 필자는 내년이 100주년만 아니라면 우선 최초항쟁지에 기념공원과 조형물을 조성하고 점차 사업을 확대하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내년은 100주년이다. 평택지역 3.1운동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하는 기념비적인 해이다. 그렇다면 최초항쟁지 성역화에 대부분의 역량을 투입하기보다는 예산을 분배하여 평택지역 전체 3.1운동의 의미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학술연구와 유물수집, 사료수집과 정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약 내년 또는 내후년에 ‘평택 3.1운동 기념관’이라도 건립하게 된다면 당장 사료와 유물 부족에 직면할 것이다. 사료와 유물이 풍부할수록 콘텐츠가 풍부해진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학술연구와 새로운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이번에 평택시가 발주하고 한성대학교가 시행한 ‘독립운동가 조사발굴사업’은 감히 졸속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인물은 발굴도 중요하지만 철저하고 객관적인 고증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만 콘텐츠로 활용할 수가 있다. 한성대학교 보고서는 그런 측면에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가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가 우리 삶의 가치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치고 지역민에게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평택지역은 수원시, 안성시, 화성시에 못지않는 3.1운동의 성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변변한 조형물, 기념공원 하나 없었다. 조사, 연구 사업도 미진했고 유물수집이나 기념관 건립도 추진되지 못했다. ‘얼마나 살기 좋은 도시인가’는 경제적 풍요가 기준이 아니다. 마음까지 살찌우는 문화 예술 없이는 결코 잘 살 수 없다. 우리는 전통이 자랑스러운 도시, 문화가 풍요로운 도시, 평택시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도시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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