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과 평택 6-① 주한미군 평택시대, 우리의 과제 _ 거기 마을하나 있었다

[평택시민신문] 지난 2018년 7월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이전이 완료됐으며, 본격적인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평택시민신문>은 지난해 세계 최대 규모의 주한미군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사 차원의 주둔역사를 정립하고, 미군과의 바람직한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미군 평택주둔 약사 및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책에는 평택의 각계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이 참여해 평택지역의 외국군 주둔 역사와 미군주둔이 평택인의 생활과 삶에 미친 영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더불어 주한미군 평택시대에 대처해야 할 지역사회의 과제 등 평택시민에게 주어진 미래의 과제를 살펴보는 내용도 담겼다. 주한미군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점에 지역사 차원의 미군 주둔 역사를 이해하고, 한미양국의 이질감을 줄이고 새로운 공동체 문화 조성에 기여하기 위해 <평택시민신문>은 해당 도서의 내용을 지면으로 소개한다.

이번 글은 강상원 평택평화센터 활동가의 '주한미군 평택시대, 우리의 과제'를 싣는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한국전쟁 후 미군이 기지를 확장하면서

2000년대 미군기지 대규모 확장하면서

대추리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평택시민신문] 정부의 일방적인 미군기지확장에 맞선 국민들의 투쟁이 벌어진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한국과 미국정부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 또한 기억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지역경제가 활성화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평택의 미래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장밋빛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평택에 던져질 과제는 너무나 크고 무겁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국가안보, 한미동맹을 앞세워 국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유린해온 지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군기지라 할지라도 국민의 주권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국민주권이 행사되어야 마땅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거기 마을하나 있었다

2007년 3월 이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두 마을. 대추리, 도두2리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평택시 북쪽의 서탄면과 고덕면을 거치면서 흘러온 안성천이 팽성읍에 이르러 군문교를 지나 남으로 황새울 들판과 도두리 들판을 거느리며 흐르다가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곳, 그 너른 들과 함께 자리 잡았던 풍요롭던 농촌공동체는 사라져갔다. 이제 그 자리에는 해외주둔 육군기지중 가장 큰 규모의 미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마을과 함께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기지와 한국전쟁통에 미군기지에 의해 쫓겨나야 했던 주민들, 기지주변에서 마을을 이루고는 바닷물을 막아 생긴 개펄을 ‘거북이 등짝이 되도록’ 등짐을 져가며 비옥한 토지로 만들어낸 주민들이 떠났다. 대부분의 많은 주민들은 각지로 흩어졌고 일부의 주민들만이 팽성읍 남산리의 행복마을로, 팽성읍 노와리 평화마을 대추리로 각각 자리를 옮겨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두 마을에 살던 이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경찰과 군대를 앞세워서 주민들을 쫓아냈다.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4년 동안이나 이주를 거부하고, 전쟁기지를 확장하려는 미국과 정부에 맞섰다. 전쟁기지로는 한 평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며, ‘올해도 농사짓고, 내년에도 농사짓자’며 싸웠다. 정부는 주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들판에 군대를 풀어 철조망을 설치하고 길목 곳곳에 경찰을 배치하고는 농사를 못 짓게 만들었다. 정부는 포클레인을 동원해 주민들의 역사와 함께했던 대추 초등학교를 부수었고, 마을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그 자리에 미군이 100년간-기실 영구히 사용하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사용하겠다는 미군기지가 자리 잡는다. 주한미군의 핵심시설이라 할 수 있는 미2사단과 주한미군사령부가 모두 이곳으로 몰려온다. 주민들은 물었다. “왜 우리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하느냐고!”

대추리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한 번, 한국전쟁 후 미군이 일본군대가 사용하던 기지를 확장하면서 또 한 번 쫓겨났다.

“미군부대로 들어간 게 대추리는 3번째여. 일제 때 쬐그만 했다고. 철망깔아가지고 프로펠라 하나짜리 비행기가 앉았던 곳이거든. 그런데 6.25가 나면서 이북에서 공산당들이 내려온거야. 그러면서 유앤군이 들어올라와 가지고. 그러면서 1953년도일 거야. 옛날 대추리는 워낙 야산이고 밭이여...그냥 일구면 밭이고 그렇게 좋았던 데라고. 그냥 도우저로 밀어서 콘크리트 부어서 활주로 만드는 거여. 그때는 전시니까 니꺼 내꺼가 어딨어. 밀어붙이면 끝나지. 안나가면 흙으로 둘러싸버리는거야. 밭이고 야산이고 밀어버리고 공구리(콘크리트를 부으면)하면 비행장이 되는거여. 전시에 보상이 어디있어? 없어. 옛날에 무슨 보상이여.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졌으니께 보상 소리가 나오는 거지.

나라도 돈이 없어서 못 움직이는데 무슨 보상이야? 그러니까 거기(구 대추리)로 간거지. 가을이야 음력 8월15일. 추석 명절에 밀어제끼니까 명절이고 뭐고 어디있어 쫓겨나야지. 제대로 뭐도 못가지고 천막치고 겨울을 난거지.”

그때 대추리만이 아니라 안정리, 두정리, 함정리, 내리, 동창리등 캠프 험프리스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졸지에 집과 농토를 읽고 쫓겨나야했고 주민들이 보상이라고 받은 것은 천막뿐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먹을 게 없었거든. 정말로 아침 먹고 점심 거르고 저녁 먹으면 잘 먹는 거야. 그런 시절이었어. 이제 거기로 와서는 농토를 확장해야 살잖아. 근데 마침 그 뒤에 농토를 조성할 땅이 생겼어. 농토 조성할 땅이 생겼는데 그거 제방을 따가지고 농토를 조성해야 하잖아. 근데 그때는 뭐가 정부에서 나왔냐면은 대여곡이라는 게 있었어. 그게 농민들에게 벼를 빌려 주고, 다시 가을에 회수 하는 거야. 그게 대여곡 이었어. 이제 그걸 빌려다가 먹으면서 제방을 조성했어. 제방 조성하는 게 그게 쉬운 게 아니야. 바다 흙을 쌓는 것이 엄청 힘들거든. 그 여덟목 가래라고 있어. 가래가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양 옆에 줄을 4개씩 그으며) 이렇게 생겨서 이렇게 생긴 건데, 이제 여기다 고리 달고 줄 달아서 양 쪽에 네 명씩. 네 명씩 줄을 잡아당겨서 둑을 쌓는 거야. 그게 여덟목 가래라고 하는 거야. 양 쪽에 네 명씩 붙어서 잡아당기는 거니까. 근데 그걸 한번 뜨면, 장정 힘으로 한 집을 흙을 파서 던지게 되요. 여기서 저기 주방 있는데 꺼정 흙이 나갈 수 있으니까. 이게 어느 정도로 쏴지냐면 한 1m 50cm 정도를 가래로 쏴. 땅이 그 갯벌을 파가지고 제방을 쌓는 거야. 그리고 이제 그 나머지는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지게에다 삽질해서 파서 짊어지고 제방뚝에 올라가서 흙을 부어서 완전히 제방을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바닷물이, 조수 때 들어오면 넘치지 않고 파도가 쳐도 넘지 않아. 이제 그렇게 해서 만든 땅이 한 30만 평되었나. 왜정 때 쫓겨 나왔던 84가구 였어. 그런데 이제 제방이 생기고 토지가 확장이 되니까 150가구가 됐지. 그 시간이 정말 (목 메여하시고 눈물을 흘리심) 그게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 제방 쌓을 적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 가래로 하루 흙을 쌓고 나면, 손이 이렇게 뒤로 가지도 못 해요. 그렇게 힘들던 게 그 작업이었어. 그건... 우리가 뭐 필수적으로 해야 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건 감내를 하지... (울먹이심) 그 우리 땅을.. 미군에게 수용한다고 ...(눈물) 우리가 농촌이라, 젊은 사람들은 없고 나이 많은 사람들밖에 없잖아. 미군부대 확장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옥토 두 번 세 번을 다듬었는데. 어느 사람이 그걸 환영하고 좋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냐 말이야. 지금도 그게 찢어지게 가슴이 아파.”

이렇듯 주민들이 미군기지확장을 저지하는 싸움에 나설 수 있었던 힘은 어려웠던 시절, 피땀흘려 가꾸었던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평택과 미군기지, 외국군대 주둔의 역사

일제시대부터 주둔하기 시작한 외국군대로 인해 평택의 이미지는 ‘군사도시’ ‘기지촌’이란 오명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급기야 용산기지 및 미2사단의 모든 부대들의 평택이전계획으로 26.8㎢(평택시 전체면적의 5.9%)에 달하는 미군기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그 어느 지방자치단체도 이렇게 넓은 면적을 공여지로 내준 곳은 없다.

 

1) Osan Air Base (K-55, 오산기지로 불리운다)

평택북부지역이 주한미군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51년이다. 1951년 2월 7일 중국인민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1.4후퇴를 시작한 유엔군은 신장동 남산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중군인민군을 격퇴하여 더 이상의 남진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투 후 한반도에 미국의 제5공군 전술전투부대가 복귀하였고, 항공비행단 공병대는 남한에서 제트 전투기를 보조할 수 있는 공군기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결과 오산리 남서쪽 지역을 후보지로 정하였고 1951년 11월 오산리공군기지(K-55)로 명명했다. 하지만 오산리공군기지는 오산시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평택군(시) 송탄면과 서탄면에 속한 신장동, 적봉리, 야리, 신야리 일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산(Osan)’이라는 부대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오산이 군사지도에 명시된 대표적인 지명이었으며 발음이 쉬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지건설은 195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기지건설 부지에 있던 서탄면 적봉리 가마골과 야리, 신야리, 원장등 마을 등 해정들 일대의 마을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에게는 대체부지나 보상금도 없이, 진위천변과 인근의 산등성이에 흰 천막 1동에 두 집씩 나눠 거주하게 하고 식량으로 구호품으로 지급된 밀가루 한 포대씩 나눠주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정부나 미군에 대하여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주민들의 강제이주가 끝난 뒤 기지조성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비행장이 완공되면서 1952년 12월 26일에는 제18전투폭격비행단과 F-51전투비행중대가 배치되었고, 이 때 배치된 비행단은 한국전쟁 후반 제공권 장악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55년 3월에는 대구공군기지에 있던 제58 전투폭격비행단이 이전하면서 오산기지는 한반도에 유일한 전술전투비행단을 보유한 기지가 되었다. 1956년 9월 18일에는 오산리공군기지(K-55)가 오산공군기지로 이름이 바뀌었다.

 

2) Camp Humphreys (K-6, 안정리기지로도 불리운다)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 외국군이 주둔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Camp Humphreys 홈페이지에 따르면 1919년 일본군이 K-6기지를 조성하고 안정리 일대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근거다. 외국군의 본격적인 주둔이 시작된 것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302부대)라는 보급부대가 안정리, 함정리, 대추리 일대에 비행장과 격납고 등을 건설하면서였다. 비행장 건설은 국내에서 차출된 2만여명의 징용대와 평택지역에서 차출한 근로보국대가 맡았다. 하지만 전시(戰時)여서 보급물자가 부족하고 건설장비도 삽과 곡괭이, 우마차 뿐이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10길(약 15m) 깊이의 격납고를 건설하다가 무너져 사람이 죽기도 했으며, 차출된 소나 나귀 등이 굶어 죽어 길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건설한 비행장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글: 강상원평택평화센터 활동가

해방 후 안정리 비행기 활주로를 접수한 미군은 경비병을 파견하여 관리만 했을 뿐 군사적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1년 한국정부는 한반도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안정리 비행장을 미군에게 공여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1952년 한국전쟁 중 미공군은 중장비를 투입하여 활주로 길이를 2400미터로 늘린 뒤 K-6미군기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기지가 확장되어 대추리 마을은 근처의 곤지나루로 강제 이주당하였고, 신정문 근처에 있었던 서정자 마을과 일곱집매 마을도 인근의 송화리 등지에 정착하였다. 1962년에는 1961년 오산부근에서 군사작전 도중 헬리곱터 사고로 숨진 미 육군 기술장교인 벤저민 험프리스를 추모하여 기지이름을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로 명명하였다.

이 외에도 고덕면에 위치한 Alpha탄약고와 팽성읍에 위치한 야전훈련장, 소총사격장이 있다. 미군기지이전사업에 따라 위 3개의 미군시설은 반환될 예정이나 그 시기는 불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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