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_ 이광섭 향토사연구위원 / 시민기자

인물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나 폄하는 역사에 대한 왜곡을 낳아

정확한 자료와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인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

 

이광섭 향토사연구위원 / 시민기자

[평택시민신문] 우리고장 평택의 서북쪽 외진 곳에 청북읍 고잔리 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은 고령신씨 즉 신숙주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동족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평택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된 신숙주 선생의 영정과 선생의 증손이며 성종 임금의 부마였던 신항 그리고 현손인 신의 위폐가 모셔진 ‘고잔묘당(高棧廟堂)’이 있으나 이것을 아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래 고령신씨 들의 본거지는 경기도 의정부시로 종가를 비롯하여 사당이 그곳에 있었는데, 이곳 고잔리로 오게 된 것은 신숙주 선생의 현손인 신의가 문정황후 동생 윤형원과 대립하자 문종황후가 경상도로 보냈으나, 그 뒤 명종이 즉위하자 그를 다시 불러 승지로 등용하지만 그의 아들8형제를 경기지방으로 분산 거주시킵니다. 그 8형제 중 봉래공 신주가 이곳 고잔리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곳 고잔리는 넓은 갯벌 이였는데 신의가 돈을 주고 갯벌을 간척한 뒤 이주하게 하였습니다.

입향 후 고령신씨 들은 명문가의 배경을 바탕으로 지방호족들과 활발히 혼인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장하여 이곳 고잔리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며, 이것이 고령신씨 조상의 사당과 위패를 모신 고잔묘가 1927년에 이곳에 오게 된 배경입니다.

현재의 고잔묘는 1989년에 중건되었으며 해마다 합동추모제를 지냅니다.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며 학자로 한글창제의 일등공신인 신숙주의 호는 보한재, 희현당이고 시호는 문충으로 태종17년(1417)에 전라도 나주에서 이조정랑을 지낸 신장과 금성 정씨 사이에서 5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종 21년(1439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집현전에서 밤늦게 까지 공부하다 잠이 든 신숙주를 세종임금이 입었던 옷을 덮어주었다는 일화는 교과서에도 나왔던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신숙주 선생은 집현전 학자로 당시 성삼문과같이 세종대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으며 훈민정음(한글창제)에 큰 공을 세운분입니다. 한글창제를 위해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무려13번이나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한글 창제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무려 7개 국어 즉 중국, 일본, 몽고, 여진, 인도, 아라비아어 등에 능통하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면 글로벌인재인 셈입니다.

그러나, 신숙주 선생은 문종2년(1452년)에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계유정난에 참여하게 되며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단종2년(1454년)에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1등에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이해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역임하는 등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이듬해는 우의정에 올랐고 1459년 좌의정에 승진, 세조8년(1462년)에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예종 즉위 후 원상이 되었고 성종2년(1471년)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영의정에 재임되었습니다.

이렇듯 신숙주 선생은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서 정치력을 발휘해 여섯 임금을 섬겼으며,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20대에 집현전 학자가 되어 세종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학문연구에 매진한 형제와 같이 지낸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유정난 때 신숙주는 수양대군과의 개인적인 인연과 그의 신념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임금) 편에 섰고, 성삼문은 그 반대편에 있어서 사육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유교적 정통성에 의리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속에서 성삼문은 충신이고 신숙주는 흔히들 변절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소신이나 가치관에 따라 또는 시대 상황에 따라 처세하는 데 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인물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나 폄하의 평가는 역사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낳아 극적인 흥미로만 전락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와 사실에 입각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글날을 맞아 한글 창제의 큰 역할을 한 신숙주 선생과 관련된 향토유적지 ‘고잔묘당(高棧廟堂)’을 주말에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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