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선사본 다산 여유당전서』 간행 80주년

안재홍‧권태휘 등 평택 선각자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발행 등

조선학운동‧실학 재조명 앞장서

1938년 간행된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일제 강점기 최대 출판사업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간행

1938년 10월 27일 일제강점기 최대 출판사업의 하나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집『여유당전서』가 2018년 10월 간행된다. 올해로 만 80년이 된다. 평택 출신의 민족운동가 안재홍은 일제강점기식민사관에 맞서 조선학운동을 주창하며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와 평택출신의 후배 민족운동가 권태휘와 함께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오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집 『여유당 전서』를 교열·간행한다. 이 사업은 일제강점기 최대 출판사업 중 하나였다. 다산 정약용의 저술은 대부분 유배지인 강진에서 이루어졌다. 18년간의 귀양 후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그동안 자신의 모든 저술을 정리하여 ‘여유당집’이라 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필사본으로 내려오던 다산 문집은 인쇄본으로 1938년 평택 출신 권태휘가 사장으로 있던 신조선사에서 총 76책(전154권)으로 간행됐다.

 

평택에서 (1795)

                               다산 정약용

금년엔 해안에 비가 덜 내려
논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었는데

먹는 곡식 같지 않고 들풀과 같아
메밀대 붉은 다리 석양에 처량하다

늦게야 심은 모가 두어 치 푸르른데
메밀 대파 했더라면 저처럼 자랐을걸

메밀 익어 장에 가서 쌀과 바꾸면
올 가을 환자미는 갚을 수 있을 것을

 

다산 정약용과 평택의 소중한 인연

한국사를 대표하는 조선학의 설계자 다산 정약용은 평택과 두 가지 소중한 인연이 있다. 그는 34세의 나이인 1795년 형 정약전의 주문모 사건 연좌로 충청도 금청찰방으로 좌천되어 가는 길인 7월 28일 ‘평택에서’라는 시를 남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당대 농민의 고단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평생 노력한 다산의 산문정신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평택 출신의 민족운동가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방대한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 전서를 교열한 다산 정신 실천의 계승자이다. 민세가 1934년 9월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년을 기념해 위당 정인보 등과 함께 제창한 조선학운동은 언어운동에서는 그도 애정을 가지고 참여했던 조선어학회의 한글사전 간행 노력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으로 나타났으며, 건축에서는 기농 정세권의 북촌 한옥지구 개발, 국악에서는 이동백이 주도한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이 전개됐다. 또한 백남운, 최익한, 김태준 같은 사회주의 학자들의 참여에 의한 실학연구도 이어져 1920년대 신간회운동의 좌절 이후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조선학 연구를 통한 민공협동 노력으로 구체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민세 안재홍이 가장 존경했던 다산 정약용

민세 안재홍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민세는 다산을‘조선학술사상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다.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명예교수는 『역사속의 젊은 그들』에서 민세를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추구한 복합적 사고를 현실에서 실천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민세가 다산을 좋아하고 따랐던 이유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서 우러나온 학문적 헌신과 방대한 저술활동, 전통적 가치와 새로운 서구문명의 수용 속에서 전통유학의 개신에 대한 방향제시, 근면과 검소를 삶의 기본 가치로 삶고 선비정신의 진정성을 보여준 지식인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민세도 일평생 다산처럼 치열하게 살면서 식민지 현실극복에 힘썼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와 융합, 사회통합의 가치를 실천했으며, 술과 담배와 미식을 피하면서 국가의 선비로 살아갔다.

민세가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를 교열한 조선학운동의 산실 안재홍 생가

민세와 함께 여유당 전서 교열에 힘쓴 위당 정인보

민세와 위당 정인보는 다산 서세 99주년을 기념하며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편찬하기 직전인 1934년 7월 중순부터 석전 박한영 스님과 함께 60여일 넘게 속리산을 시작으로 논산 윤증고택, 관촉사, 고창 황윤석 고택, 정읍 내장사와 백양사, 순창 여암 신경준 고택 일대 등을 답사하고 돌아와 그해 9월 본격적으로 조선학운동을 선언하고 실천한다. 위당은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교열 작업과 관련해서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다산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그 집안에서 대대로 저서를 보관하여 왔으나 간행하지는 않았다. 지난 을축년(1925년)에 한강이 범람하여 선생의 고택이 떠내려가고 서책이 거의 사라졌다. 다음해에 간행을 대비하여 옮겨 적기는 하였으나 일을 끝내지는 못하였다. 또 10년이 되어 권태휘가 비로소 그 일의 기틀을 잡았고 나와 안재홍은 교열을 맡았다. 4년이 지나 작업이 끝났는데, 모두 76책이었다. 여유당전서라고 총칭하였다. 중도에 자금이 떨어져, 그만두었다 계속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나, 권군의 능력과 노고에 의지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가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103년이 되는 해였다.”

 

민세 안재홍, 『여유당 전서』 간행 당시 회고

민세는 해방 다산 여유당전서를 교열하면서 ‘술을 마셔도 시는 지어지지 않는구나. 적막한 남창 아래에서 앉아서 꽃 한 가지를 보네’라는 다산 정약용의 시를 즐겨 외웠다. 그는 이 시와 관련 아래와 같은 회고를 남겼다.

“일제말년 내 평택군 두릉리 촌사(村舍)에 홀로 있을 적에 다산의 여유당 전서를 교정한 일이 있어 다산시의 오언일절이 퍽 마음에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술도 아니하고 시도 아니 짓는 나에게는 이 다산의 풍이 가장 마음에 찾았다. 남창 앞에 몇 포기 꽃을 가꾸어두고 의자에 홀로 기대어 이 시를 외우는 것이 한 정취였다.

 

민세의 고향후배였던 신조선사 사장 권태휘 재조명 필요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간행과 관련해서 평택 진위면 가곡리 출신 민족운동가 권태휘의 노력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 민세와는 고향 선후배 사이였던 그는 3.1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1827년 창립한 신간회운동애도 핵심 인물로 민세와 함께 활동했으며 안재홍이 조선일보 사장을 지낼 때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항일운동가다. 그는 출판사 신조선사의 사장으로 『여유당전서』 간행의 실무적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 시기에 여유당전서뿐 아니라 산경표의 저자 여암 신경준의 저작 등 다수의 실학자 문집 간행을 통해 조선정신의 계승과 수호에 힘썼다.

 

안재홍 생가의 정체성을 살려 기념교육관조성으로 민세 정신계승에 힘써야

수년전부터 평택학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지역에서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하나의 학문이 단순한 이름 짓기를 넘어서 학(學)으로 정립되려면 학파의 형성과 지속적인 학술연구의 소재 개발과 성과 구축이 필수적이다. 그런 면에서 평택학은 당위성을 넘어서는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여기에 평택학 인식의 지평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핵심 소재로서 민세학 재인식의 중요성이 있다. 조선학 운동을 주창한 민세는 경기실학의 보고 다산학에서 커다란 지적 자극을 받았다. 이런 정신의 계승이 고대사연구, 언론, 언어, 정치사상, 교육, 문화론 등 다산 이후 최대의 저술 활동을 한 민세의 학술 실천 활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번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간행 80주년을 맞아 조선학운동, 실학 재조명의 핵심에 안재홍, 권태휘와 같은 평택의 선각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후대에 널리 알려나갈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민세 생가의 장소정체성을 살려 향후 안재홍 역사공원 조성시 시민 청소년들이 조선학운동의 터전이었던 이 곳에서 다양한 연구와 교육· 문화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콘텐츠도 적극적으로 준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황우갑 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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