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의 부락산·고성산 등반 100주년에 즈음해 (1918. 8~2018. 8)

민세, 부락산·고성산 오르며 “민족은 죽지 않는다” 깨달음 얻었을 것

그의 부락산·고성산 행은 단순한 유희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다짐과 이를 위한 전환학습을 구상하는 시간

1918년 8월 평택 부락산·덕암산을 지나 안성 고성산 아래 무한산성에서 안성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민세 안재홍 (사진보정: 이수연 전 한국사협 부이사장)

100년 전 8월 부락산·고성산에 오른 민세 안재홍

[평택시민신문] 우리 고장 평택의 독립운동가 민세 안재홍은 1918년 8월 서정리를 거쳐 부락산·덕암산을 지나 안성 고성산에 오른다. 민세는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귀국, 친구인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1915년 중앙학교 학감으로 청년 인재양성에 힘쓴다. 그러나 그는 일제를 비판하는 불온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둔다. 사직 이후 1917년 민세는 모교인 중앙YMCA (현 서울 YMCA) 교육부 간사로 잠시 활동한다. 민세의 청년기 사상 형성에서 기독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안재홍은 기독교가 정신의 길, 신념의 길 사상의 길을 열면서 구제와 자기구제를 위한 해방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안재홍은 여기에서 청년 인재 양성에 힘썼다.

안재홍이 간사로 활동하던 1917년은 일제의 탄압으로 1916년 중앙YMCA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학부는 폐지되었고 영어, 일어, 공예과와 노동과 학습을 병행하는 노동야학이 있었다.

 

부친의 죽음과 둘째 아들의 출생, 그리고 부락산·고성산행

1917년 5월 25일 민세는 부친 안윤섭의 죽음으로 평택에서 부친상을 치른다. 그리고 1919년 4월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 약 2년 가까운 기간 고향에서 칩거한다. 1918년 5월에는 둘째 안민용을 낳는다. 첫째 안정용을 1915년에 낳았으니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장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던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죽음까지 겹쳐 심리적으로도 어려움이 큰 시기였다. 안재홍을 기억하는 동네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민세는 매일 아침 지금은 미군탄약고에 들어간 알파탄약고 정상에 오르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 걷기와 등산을 좋아하던 안재홍은 부락산·고성산에도 자주 올랐다고 한다.

100년 전 민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산을 올랐을까? 수년전 돌아가신 민세 외동딸 안서용씨 유품에서 찾은 사진 속 민세는 무한산성에서 안성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기록을 좋아했던 그는 사진 옆면에 당시 상황 관련 친필 메모도 남기고 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가득한 식민지 현실의 우울함, 삶의 교과서로 민세의 신학문 습득을 권장하고 지원했던 부친의 죽음, 이제 막 태어나 3개월이 안된 둘째 아이의 출생. 일본 유학후 돌아와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던 중앙학교 학감의 강제 사직과 모교 중앙YMCA 활동에서 느낀 좌절과 낙향 그리고 2년간 자기 성찰의 시간이 이어질 즈음 부락산·덕암산·고성산에 오른다.

 

부락은 밝음이요 빛,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난 여정

민세는 자신의 글 『조선상고사 관견』에서 부락산의 어원을 “밝다”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 부락산에서 고성산에 오르는 길은 빛이 가득하다. 일생을 일하고 일생을 읽을 각오로 살아간 안재홍은 이 날 답사를 통해 “민족은 죽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무엇이고 하나씩 하되 의미 있는 것을 꼭 해야겠다는 다짐과 성찰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락산·고성산 행은 단순한 유희의 시간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다짐과 이를 위한 전환학습을 구상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부락산·고성산은 선비의 산이자 선배의 산

부락산·고성산은 분명 선비의 산, 선배의 산이다. 선비는 고구려 선배제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체적 용맹함과 지적 냉철함을 간직한 고구려의 선배는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지고 북방 강대국의 외침에 맞선 그 당당함의 근거였다. 부락산·고성산에도 이런 선비의 정신, 선비의 정신이 면면이 흐른다. 조선 건국의 기초를 세운 삼봉 정도전의 지적 투쟁을 정리한 삼봉집 목판본이 그것이다. 이 고장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한국 지성사에 우뚝 솟은 삼봉의 고혼만은 지금도 부락산, 고성산과 함께 할 것이다.

부락산 자락 동령마을에는 조선 중종때 개혁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와 병자호란기 청나라 심양땅에 끌려가 조선선비의 기개를 보여 준 추담 오달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기억 전승하는 충의각이 있다. 또한 고성산 자락에는 평택 팽성 출신으로 임진왜란기 이순신 장군을 도와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한 방덕룡 장군의 묘가 있다.

 

지금까지 부락산·고성산은 물리적 공간에만 촛점 맞춰져
인문적 관점과 선비정신에 비춰 이 장소의 의미 살려야

 

부락산·고성산은 3.1 운동의 민족정기가 살아 숨 쉬는 산

이런 기개와 정신이 살아 있어 1919년 기미 만세 운동 때 평택에서는 부락산 자락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안성의 양성, 원곡에는 3일간 군민이 치열한 항일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지금 고성산 자락에는 그 거룩한 순국을 기억하는 3.1 운동기념관이 서있다. 안성의 옛 지명은 백성이라 한다. 안재홍은 백성의 어원도 “밝다”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민세는 유난히 빛을 좋아했다. 그가 손수 지은 자녀 정용, 민용, 서용의 앞글 자는 모두 빛과 관계가 깊은 글자들이다. 그는 진정한 광야, 해가 비치는 땅을 희구했는지도 모른다. 민세는 빛을 희구하면서 이 산행을 통해 민족은 죽지않는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국토답사와 산행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제시한 민세

안재홍은 생애 중요한 결정적 시기마다 걷기와 산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갔다. 안재홍은 삶을 일관하여 자기주도 학습을 실천했다. 그는 9번 옥중 생활에도 입옥할 때 마다 공정한 독거방 생애에서 유유히 냉철 공명한 자기와 현실을 향한 회고와 비판을 통해 자신의 이념을 체계화해 나갔다. 그는 생애 결정적 선택의 시기에 국내외 여행을 통해 전환학습을 경험했다. 안재홍은 1913년 일본 와세다대 유학중 중국 상해·남경·청도·제남·북경·심양 등지를 100일간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 첫 대장정을 통해 국외 독립운동의 여건에 여의치 않음을 인식하고 이후 국내에서 민족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좌우협동의 신간회가 해소의 위기에 처하고 재만 동포들이 고난을 받아 어려움에 처하던 1930년 7월 30일 백두산정상에 오른다. 안재홍의 백두산답사는 민족혼을 고취하고 민중 계몽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자아성찰의 시간이자 치열한 현실인식과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열정, 백두산정계비의 마지막 현장 고증이었다. 1934년 7월에는 박한영, 정인보 등과 함께 30여일 넘게 충북 속리산, 충남 논산 관촉사, 전북 고창 실학자 황윤석 고택과 순창 신경준 고택, 남해 통영에서, 여수, 목포에 이르는 충무공 유적지 답사를 다녀온다. 같은 해 9월 6일 서울에서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년을 맞아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조선학운동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 밖에도 그는 1926년 4월 하동 쌍계사 답사, 1929년 광주 무등산 기행, 1935년 일본 동경 기행 1936년 황해도 장수산 ·구월산 기행 등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졌다.

 

안재홍의 열린 민족주의도 이런 폭넓은 사유의 결과

역사학계에서는 민세를 20세기 민족주의자 가운데 한국 민족주의의 미래비전을 가장 세련되게 정리하고 제시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안재홍은 새로운 전통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자기문화의 전통위에서 서구의 발전한 선진문화를 수용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는 우리 자신의 문화 및 그 사상에서 조선인이면서 세계적이고, 세계적이면서 조선적인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민세의 이런 열린민족주의도 그가 늘 강조했던 국토답사를 통한 조선의 특수성에 기초한 세계인식의 결과였다. 이제 민세가 자주 오른 이 산에는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국제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어 민족적 국제주의, 국제적 민족주의의 만개를 꿈꾸고 있다.

 

부락산·고성산의 인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더 넓어져야

글 = 황우갑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시민사회 전문기자

부락산에서 고성산에 이르는 길은 몇 년 전 경기도에서 걷고 싶은 길 10선에도 선정된 적이 있으며 주말이면 시민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아직까지 부락산은 구체적인 인문적 관점에 기초한 맥락성을 중시하는 장소라는 인식보다 물리적인 공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몇 년 전 평택과 안성이 공동으로 추진한 평안 해오름길 사업도 이곳이 가지는 다양한 장소자산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등산로 정비 수준에 그쳐 아쉬움이 더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락산·고성산의 선비 정신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의 지평도 넓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100년 전 20대 후반의 식민지 지식인 민세가 이 산을 오르며 생각했던 정신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후대 사람들의 예의일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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