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농악 예인…평택농악의 시조

탄생 100주년 맞아 오는 8일 기념공연

안중에서 열린 평택군민 체육대회에서 공연하는 이돌천 명인의 모습

[평택시민신문]

평택

고 이돌천 명인

농악보존회는 평택농악의 초대 인간문화재 고 이돌천 명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8일 남부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기념공연을 갖는다. 충남 천안 쌍용동이 고향인 이돌천 명인은 천안을 기점으로 주로 경기, 충남지역에서 남사당패와 농악단 활동을 했으나 평택농악 대표로 나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이어 평택농악 법고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최은창 명인과 함께 현재 평택농악의 기틀을 놓은 시조로 일컬어진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흥이 많아 모를 심다가도 농악소리가 들리면 다 팽개치고 쫓아가서 끼어들기 일쑤였다는 이돌천 명인은 농악을 업으로 삼고 농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유랑예인의 전형이었다.

 

농악소리에 홀려 시작한 유랑생활

1919년 5월 26일 천안시 쌍용동에서 아버지 이성용과 어머니 평택임씨 슬하에 1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돌천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수단으로 1931년 변홍섭(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 1대 총무)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후 같은 해 농사일을 하다가 농악소리에 혼이 빠져 유랑하는 남사당을 따라 충남 예산 신례원까지 가게 됐고 거기서 무동을 하면서 박치삼과 김종필에게 쇠와 법고를 배웠으며 그들과 함께 법고잽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랑을 했다. 18세에는 걸립패인 박운성 행중에 끼어들어 남운영 등과 함께 다니며 상쇠를 배웠으며, 남사당의 상쇠인 이원보패에도 가담했다. 21세에는 천안방축골농악대를 구성해 매년 충남에서 열린 농악경연대회에서 활약했는데, 다른 농악대는 겨룰 수 없을 정도로 잘해 1등을 도맡았다고 한다. 26세 때 아내인 손영남을 만나 결혼한 그는 아내의 아버지가 가진 많은 전답으로 먹고 살만 했으나 예인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남사당패를 조직, 유랑하는 생활을 했다. 1952년부터는 천안방축골농악대에 있으면서 안성, 예산, 송탄, 서울 등지에서 전라도지역과 웃다리(경기)지역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며 공연했다.

이돌천 명인과 조한숙 평택농악보존회장

최은창 명인과의 만남

1954년 35살 때 이돌천은 최은창이 충남 예산소방서 걸립을 할 때 무동으로 참여해 인연을 맺었다. 이후 평택인근지역 농악꾼들과 걸립공연을 했고 1960년 서울에서 남운용을 중심으로 옛 명인들이 다시 모여 만든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두 사람이 함께 법고수로 활동했다. 1980년 최은창으로부터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 요청을 받은 이돌천은 천안, 안성 등지에서 불러온 사람들과 평택군내 이름이 나있던 사람들로 평택농악단을 구성했다. 경기도 대표로 대회에 나간 평택농악단은 대통령상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이돌천은 1985년 우리나라에서 법고로는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제 11-나호 평택농악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67세가 되던 1986년 평택농악보존회라는 단체로도 지정돼 1994년 작고하기까지 평택농악 상법고잽이로 활동했다.

생전 활동 모습

천안시립흥타령농악단 창단

이돌천은 평택농악 법고춤과 무동춤을 체계화시키고, 평택농악 최고의 법고 명인으로 최고의 기예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돌천의 제자 조한숙 평택농악보존회장은 그의 논문 ‘평택농악의 연희학적 연구’에서 평택농악의 형성 계기를 마을두레패와 절 걸립패로 활동하던 최은창과 이돌천이 마을두레패와 같이 활동하던 전문연희패의 인원을 모아 평택농악이라는 명칭으로 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평택농악에는 두 가지 성격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데 최은창이 평생 거주해온 평택시 평궁리에서 전승돼 오던 마을농악인 두레패 성격과 최은창과 이돌천이 전국을 유랑하면서 활동하던 전문예인집단의 걸립패, 연희패 성격이 그것이다.

전문연희패로서 유랑생활을 하며 많은 농악인들과 교류를 갖고 공연한 덕분에 이돌천은 평택농악의 시조 중 한 사람이 되었지만 고향 천안에 농악대를 구성하는 것이 늘 소원이었다. 이를 위해 1980년부터 노력한 그는 1987년 천안시립흥타령농악단을 창단했다. 이후 천안시립흥타령농악단을 성장시키는데 노력을 쏟아 1989년 제1회 KBS사장기배 충남 농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전주대사습놀이 경연대회 등에서 수상했다. 1994년 12월 5일 별세한 그는 천안백산동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98년 9월 20일 천안시 성남면 신사공동묘지로 이장됐다. 2003년 3월 천안시는 이돌천 명인의 공덕비를 세웠고 평택농악과 천안시립흥타령농악 단원들이 제막식을 가졌다.

생전 활동 모습

 

생전 활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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