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3‧1만세운동 학술토론회 ‘경기남부 3‧1운동과 평택 3‧1운동 조명’

경기남부 3‧1운동 종합 분석 및 평택‧안성‧화성 3‧1운동 집중 분석

평택 3‧1만세운동 학술토론회의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3‧1만세운동 중 ‘가장 광포했던 만세운동’으로 기록돼 있는 평택 지역의 3‧1만세운동과 함께 경기남부지역의 3‧1만세운동을 조명하기 위한 ‘제1회 평택3‧1만세운동 학술토론회’가 지난 8일, 평택시청소년문화센터 세미나실에서 평택3‧1독립운동선양회(회장 정수일)의 주최, 평택시‧평택시의회‧평택문화원의 후원으로 열렸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2019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평택 3‧1만세운동 성역화 사업 추진과 함께 진행된 것으로 지금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평택 3‧1운동에 대해 학술적 의미를 찾고 평택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획됐다.

토론회는 ▲성주현 청암대 교수의 ‘경기남부지역의 3‧1운동의 전개와 특성’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소장과 장연환 효명고 교사의 ‘평택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김대용 안성3‧1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의 ‘안성 3‧1운동의 특징과 기념사업’ ▲이혜영 화성시 학예연구원의 ‘화성 3‧1운동과 100주년 기념사업’ 등 기조발제로 구성됐다.

토론회에 앞서 정수일 회장은 “평택지역의 3‧1운동은 일제가 ‘가장 광포한 만세시위’로 인식했던 것처럼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진행됐던 만세운동이었다”면서 “이 토론을 통해 평택 3‧1만세운동의 전개와 특징을 종합적으로 밝혀 의미를 새롭게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다음은 ‘제1회 평택3‧1만세운동 학술토론회’의 기조발제 발표를 요약한 내용이다.

 

>> 기조발제

 

성주현 청암대학교 연구교수

경기남부지역 3‧1운동의 전개와 특성

경기남부지역의 3‧1운동의 시위 회수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수원군은 13개면에서 25회, 용인군이 11개면에서 19회, 시흥군이 8개면에서 17회, 광주군은 13개면에서 17회, 진위군이 9개면에서 16회, 안성군이 5개면에서 8회, 이천군은 3개면에서 8회, 여주군에서는 3개면에서 4회의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이러한 경기남부지역의 3‧1운동의 특성을 정리해보면 첫째 시기적으로 3월 초순부터 4월까지 8개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경기도에서 실제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은 더 많았겠지만, 일제가 확인한 기록만 봐도 283회에 달한다. 이러한 수치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횟수이며, 참가인원도 16만8000여 명으로 가장 많은 규모였다. 경기도의 만세시위 중 경기남부지역에서 전개한 3‧1만세시위는 대략 135회이며, 서울의 만세시위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경기남부지역의 3‧1운동의 두 번째 특성은 천도교와 기독교인 등 종교인, 청년 및 학생, 주민과 노동자 등 다양한 주도계층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3월16일 수원장날 만세시위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추정되며, 수원군 장안면‧우정면‧향남면, 광주군 돌마면‧언주면, 용인군 수지면‧내사면‧남사면, 진위군 북면 등에서 진행된 3‧1운동 만세시위는 기독교‧천도교‧천주교 등 종교인이 주도했다. 종교인 뿐 아니라 조선약학교 학생이던 이인영은 안성군 이죽면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진위군 서탄면, 광주군 동부면, 용인군 수지면에서는 이장이나 구장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세 번째 특성은 초기에는 평화적이었으나 3월 중순 이후 과격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농촌지역에서는 지세와 호세를 비롯하여 지세부가세, 시장세, 도장세, 연초세, 주세, 면비, 각종 조합비 등을 주민에게 부과시켰고, 주재소 설치로 헌병과 경찰의 주민 억압을 통해 지배통치에 순응토록했다. 이러한 식민통치는 주민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게 했고, 때로는 과격하게, 때로는 폭력을 수반하는 시위로 바뀌는 배경이 됐다.

네 번째 특성은 만세시위에 대한 일본 측의 탄압과 보복 등의 대응이 심했다는 점이다. 이는 경기남부의 3‧1만세시위가 격렬하고 광폭했기 때문이다. 안성군에서는 126명이 구속돼 재판을 받았고, 수원군에서는 52명이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또한 제암리와 고주리에서는 30여 명이 학살됐고, 이밖에 다른 지역에서도 대부분의 농가들이 방화되어 생활의 터전을 잃었다.

 

장연환 효명고 교사
(공동발제: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 소장)

평택 3‧1운동의 성격과 특징

평택지역의 3‧1운동은 3월9일부터 시작되어 4월10일까지 약 1개월 동안 약 20차례 전개되었다. 평택지역 3‧1운동에는 약 5800명의 인원이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257명이 체포되었고, 사망 64명, 부상 174명 등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평택지역의 3‧1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일찍 발생하고, 격렬하게 전개 된 이유는 철도교통의 발달, 근대교육의 발달, 천도교의 확산 등으로 꼽을 수 있다.

경부선은 1905년 1월 1일 개통되었고, 평택지역에서는 평택역, 서정리역, 진위역이 설치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발행한 <조선철도여행안내>에 따르면 ’평택역 설치는 진위군청이 있고, 경기도와 충청도가 만나는 지점이며, 평야가 넓어 농산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아산마과 연결되어 수로교통의 이점이 있고, 안성 및 둔포와 가까워 상업적으로 유리하며, 대로가 지나가고 교통이 편리한 점, 군청과 경찰서, 우편소, 학교조합, 조선상업은행지점, 소학교 등이 소재한 점이 고려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평택역의 설치로 평택역전에 근대도시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3‧1운동 등 다른 지역과 관련한 정보 습득이 농촌지역에 비해 빨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평택지역의 근대교육도 발달됐는데, 1898년에는 진위면에 진위군수의 주도로 사립 진문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를 토대로 1899년에는 진위면 봉남리에 진위공립소학교가 개교했다. 1905년까지 전국적으로 설립된 관립‧공립소학교가 60개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진위공립소학교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개교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대 서당들은 한문서당과 함께 근대학문도 가르치는 개량서당도 많았다. 1917년 일제 기록에 의하면 진위군 전체 서당은 115개였다. 근대학교와 서당의 존재는 농촌지식인층의 증가를 가져왔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농촌지식인층이 많았다는 점에서, 학교를 매개로 연결된 인적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도교의 확산도 3‧1운동에 영향을 줬다. 평택지역에는 천도교가 이른 시기에 들어왔고, 고덕면과 현덕면에는 천도교 수원교구 소속의 면전교실이 설치되었다. 또한, 진위군 지역에는 진위교구가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천도교 활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한 것을 알 수 있고, 천도교의 확산과 조직적 체계는 현덕면 권관리‧기산리 일대에서 최초의 봉기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철도교통과 근대교육의 발달, 천도교의 확산 등의 영향으로 전개된 평택지역의 3‧1운동 특징을 살펴보면 ▲경기남부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전 지역이 봉기한 점 ▲현덕면 옥녀봉 및 계두봉, 평택역전, 진위면 봉남리 등 세 곳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전개 된 점 ▲농촌지식인층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는 점 ▲초기에는 천도교 중심으로 전개되다 농민, 상인, 학생 등 일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 ▲초기에는 비폭력적으로 전개되다 일제의 검속과 탄압이 강화되면서 점차 폭력적으로 변한 점 등이 있다.

 

김대용 안성3‧1운동기념관 학예연구사

안성 3‧1운동의 특징과 기념사업

안성에서의 만세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3월 말경부터였다. 3월28일부터 원곡면 마을 주민들이 원곡면사무소에 모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29일, 30일, 31일에도 만세를 부르고 자진해산하는 등 만세운동이 고조되었다.

만세운동의 움직임은 4월1일 대대적으로 폭발했다. 1000여명의 원곡면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시작했고, 양성면으로 이동했다. 당시 양성면에서도 1000여명의 주민들이 양성경찰관주재소에서 만세를 외치고 해산하려고 했는데, 이들 양성면 주민들과 원곡면 주민들이 합세해 2000명의 군중이 운집하게 됐다. 이때부터 만세운동이 폭력적으로 변화했는데, 주재소를 향해 투석하기도 하고, 주재소의 기물을 파손하고 방화하기도 했다. 이어 양성우편소와 양성면사무소를 차례로 습격했고, 양성면의 잡화점‧상점‧고리대금업을 하는 일본인의 가게와 집을 습격하고 파괴했다. 4월1일과 2일에 걸친 원곡‧양성의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통치기관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틀간 해방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양성면에서 시작된 안성의 만세운동은 읍내면에서도 발생했는데, 안성경찰서의 일본경찰이 즉각 출동해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도자를 체포하면서 일찍 진압됐다. 죽산지역에서도 4월1일부터 3일까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주민들이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등을 파괴하는 실력 항쟁의 양상을 보였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경찰과 군병력을 동원해 만세운동 참여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진압 과정에서 총칼은 물론 발포를 통한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원곡‧양성면에서는 276호의 가옥이 소실되고, 사상자가 43명에 달했고, 800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 실제 확인되지 않은 부상자도 많았으므로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안성 3‧1운동 기념사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자료를 확보해 안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있으며, 유족회와 함께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 사적지 관리를 위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건의 장소, 인물의 생가, 활동 장소 등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이혜영 화성시 학예연구원

화성 3‧1운동과 100주년 기념사업

화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21일 동탄면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전개되어 4월15일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시점까지 이어진다. 특히 화성의 3‧1운동 시위가 무력항쟁적인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송산 3‧1운동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어 발안과 우정‧장안지역으로도 무력항쟁이 확산됐다. 이러한 항쟁으로 화성전역에 80여 곳에 걸친 대대적인 횃불시위가 전개됐고, 사강주재소 노구찌 순사의 타살과 화수주재소의 기와바다 순사의 타살이 발생했다.

한편 화성지역의 무력시위 확산에는 기독교 및 천도교 등의 종교 때문이 아니라 향촌문화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송산면 일대에는 남양홍씨 참의공파를 비롯하여 정효공파, 대호군파가 세거하고 있었는데 유독 참의공파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참여한 사실이 주목된다. 송산지역 3‧1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3‧1운동의 주도자이자 이 지역의 남양홍씨 참의공파의 어른인 홍면옥이 지역에서 갖는 지위와 영향력, 집성촌이 갖는 강고한 위계적 질서, 혈연적 공동체 의식 등이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우정‧장안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은 차병한, 차병혁, 차희식, 차경규 등인데, 이들은 모두 장안면 석포리에 세거하고 있던 연안차씨 강렬공파의 후손들이다. 선대부터 내려오던 혈연적 유대감과 지역적 관계망은 구장 차병한을 위시하여 차씨 일가들이 4월3일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화성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서로 친인척관계로 중첩돼 있다. 혈연을 바탕으로 한 화성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인적 관계망은 이 지역에서 3‧1운동이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일어나게 된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마을에서 누가 3‧1운동을 주도하는가에 따라 마을주민들의 참여정도에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랜 기간 동일한 지역에서 한마을을 이루며 형성된 향촌사회의 집성촌이 갖고 있었던 지역적 혈연적 관계의 중첩은 격렬하게 진행된 화성 3‧1운동의 작동 기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각 지자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화성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은 단지 100주년이 되는 한 해만을 위한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이 단지 그날의 행사를 치르기 위한 사업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업과 행사의 구분이 필요하다. 또한 독립운동 사업의 중장기적인 발전 전략에 대한 필요성과 그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며 정책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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